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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인상 - 미국의 또 다른 곤경

유가 인상 - 미국의 또 다른 곤경

이수현

지난 5월 30일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정유산업 중심지 코바르에서 발생한 유혈 인질극을 계기로 배럴당 42달러(이하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기준)까지 치솟았던 국제 유가가 6월 8일 현재 37달러로 낮아졌다.

그러나 유가 급등의 여러 원인을 고려하면, 당분간 고유가 추세는 지속될 듯하다.

최근의 유가 급등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첫째, 중동의 정치적 불안정을 꼽을 수 있다.

중동에는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 세계 2위의 석유 보유국 이라크, 각각 이라크와 엇비슷한 규모의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이란·아랍에미리트연합·쿠웨이트 등이 몰려 있다.

그런데 미국이 이라크 수렁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중동의 정치 불안이 계속되자 세계 석유 수급 전망에 대한 불안 심리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국제 유가는 지난해 12월 초 30달러를 넘어선 이후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고 이미 지난 5월 7일 40달러를 돌파한 뒤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에프페통신〉은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시장이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원유’가 아니라, 중동의 공급이 안정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라고 보도했다.

더욱이 9·11 이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가 악화한 것도 세계 석유 수급 전망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일부 신보수주의자들은 9·11 테러범 19명 중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다며 사우디아라비아를 압박했다. 그리고 이른바 중동 민주화론을 내세워 이라크에 이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정권 교체”를 들먹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지배계급의 일부는 대미 투자 자본 수천억 달러를 회수하고 유가 표시 통화를 달러에서 유로화로 교체하겠다며 반발했다.

또, 이븐 사우드 왕가의 폭정·부패·친미 예속, 사회 불평등 심화, 빈곤·실업 증가 등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점령에 대한 분노와 맞물리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정 불안이 심화했다.

이 때문에 세계 1위의 석유 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동 지역 석유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이 의심받으면서 세계 석유 수급 전망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된 것이다.

둘째, 미국이 베네수엘라 같은 산유국의 우익 쿠데타를 지원하고 정정 불안을 조장하는 것도 유가 인상에 일조하고 있다.

부시 정부는 자국이 수입하는 석유의 상당량을 공급하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두 차례나 군사 쿠데타를 사주한 바 있다. 또, 인근 콜롬비아에 대한 군사 지원을 확대하는 등 그 지역의 정치 불안정을 심화시켜 석유 공급 전망을 어둡게 만들었다.

피해자

셋째, 중국 경제의 고속 성장과 미국·일본의 경기 회복이 맞물린 것도 유가 인상에 기여했다.

중국은 세계의 원자재를 빨아들이며 해마다 10퍼센트 이상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중국의 석유 수요는 해마다 약 8퍼센트씩 증가하고 있다. 또, 미국의 석유 수요도 지난해 5퍼센트 증가했다. 일본 경제도 올해 14년 만에 가장 높은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세계은행 추산 3.1퍼센트).

이렇게 세계 석유 수요는 증가하는데, 공급 여력은 부족한 상황이다.

1985년에 세계 석유 생산량은 하루 1천5백만 배럴의 여유분이 있었다. 당시 세계 총수요량의 약 4분의 1이었다.

현재는 약 2백만 배럴 ― 세계 수요의 3퍼센트도 안 된다 ― 의 추가 생산이 가능할 뿐이며, 그것도 거의 사우디아라비아만 그럴 여유가 있다. 게다가 그 2백만 배럴도 실제로는 이미 생산되고 있고 단지 석유수출국기구(OPEC) 쿼터량에 반영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분석이 대체적이다.

넷째, 석유 다국적기업들도 국제 유가 인상에 한몫 하고 있다.

미국의 소비자 감시 단체 ‘퍼블릭 시티즌’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석유기업들 간의 인수합병으로 국제 유가는 전례 없이 높은 수준에서 유지됐다.

오늘날 미국에서 사업 중인 세계 5대 석유 기업들 ― 엑슨모빌, 셰브런텍사코, 코노코필립스, 비피-아모코-아르코, 로열더치셸 ― 이 세계 석유 생산의 14퍼센트, 미국내 석유 생산의 48퍼센트, 미국내 정유 생산의 50퍼센트, 휘발유 소매시장의 약 62퍼센트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석유 회사들은 재고를 일부러 낮게 유지해 고유가를 지속시켜 막대한 이윤을 벌어들인다.

그리고 그들의 이윤을 보장해 주기 위해 보통 사람들, 특히 제3세계 민중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고유가가 지속하면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의 빈국들이 수입하는 상품의 가격도 오를 것이다. 그리 되면 그런 나라들이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리는 돈도 늘어나 외채 상환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세계적인 빈부 격차는 더욱 심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은 난방 기구나 조리 기구 등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연료를 구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식료품 가격의 동반 인상 때문에 음식 자체도 구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이것은 이미 밑바닥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각종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게 만들고 심지어 죽음의 벼랑 끝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런 빈곤과 고통 때문에 죽어야 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점령에서 비롯한 간접적 사상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될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 자국의 석유 수급을 안정시키는 것뿐 아니라 중국·유럽연합(EU)·일본 등 이른바 “동급 경쟁자들”에 대한 석유 공급도 확실히 통제하려 했다.

그들의 중동산 석유 의존도가 미국보다 더 높기 때문에 중동산 석유 통제권 강화는 미국의 세계 패권 유지·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제 유가 급등은 미국의 그런 전략이 좌초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또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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