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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우기:
광기 어린 마녀사냥으로 얼룩진 역사와 교훈

독재 정권 치하 한국은 일상적 마녀사냥으로 유지된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봉암, 인혁당, 민청학련, 남민전 등 수많은 공안 사건과 각종 간첩단 사건이 있었다. 심지어 김대중 같은 부르주아 정치인들까지 그 희생자가 됐다.

사형당한 인혁당 사건 희생자의 어린 자녀가 또래 아이들의 ‘빨갱이 총살 놀이’ 대상이 됐을 정도로 마녀사냥의 광기는 혹심했다.

속죄양 삼기는 지배자들의 단골 카드다 2012년 9월 12일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의 ‘사법살인’ 부정 발언에 오열하고 있다 ⓒ고은이

사실, 한국 정부 자체가 제주도 4·3 항쟁 당시 3?4만 명을 학살한 “빨갱이 사냥”을 통해 건설된 국가였다.

한국에서 마녀사냥은 주로 북한을 매개로 했다. 당시 진보진영 안에는 극악한 독재와 제국주의 압력에 맞서고 민족 통일을 이루려면 (정도는 다를지라도) 북한과 연대할 수도 있다는 정서가 많았다.

이에 따라 희생양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사소한 대북 연계 혐의를 적당히 부풀리면 됐다. 몇 년 전 ‘일심회’ 사건 등이 그랬듯이, 많은 간첩단 사건이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독재 정권 시절 마녀사냥은 종종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이었다. 예를 들어, 이승만은 자신의 장기 집권이 불투명해 보이자, 당시 최대의 경쟁자로 급부상한 조봉암과 그의 진보당을 마녀사냥의 제물로 삼았다.

진보당은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며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그런데도 1958년 이승만 정권은 그가 북한의 간첩과 접선해 정치자금을 받고 공산주의자들을 국회에 당선시켰다고 날조했다. 그러고는 조봉암을 처형하고 진보당을 해산시켰다.

당시 민주당과 일부 혁신계 인사도 조봉암 마녀사냥에 동참했다. 특히 진보당에서 분당해 나간 민주혁신당 서상일은 재판에 검찰측 증인으로 나와 “진보당은 유물사관에 입각한 좌익 정당”이라며 검찰을 거들었다. 결국 마녀사냥 덕분에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획책하는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지를 수 있었다.

마녀사냥은 더욱 폭넓은 사회통제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심지어 박정희 독재 시절,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려 했던 종교계도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도시산업선교회는 좌파적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음에도 용공으로 내몰렸다. 노동조합 결성 등 노동자 권리 신장이 초착취에 기반한 자본 축적에 방해가 됐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배자들은 저항세력 일부의 ‘자극적 주장’을 실체보다 훨씬 부풀려 마녀사냥의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예를 들어, 1979년 박정희 정권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이 도시 게릴라 전략에 따라 체제를 타도하려 했다며 그 ‘폭력성’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정작 남민전이 입수한 무기는 예비군 훈련장에서 훔친 총알도 없는 소총 한 자루였다. 그들의 실질적인 활동은 유신 독재와 YH 여성 노동자 탄압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살포한 것 정도였다.

남민전에 대한 공포심을 극대화한 공안 당국의 술책과 언론의 원색적 보도는 의도한 효과를 보기도 했다. 당시 재야 운동의 일부는 남민전 사건 희생자들을 방어하길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마녀사냥의 진정한 목적은 YH사건과 부마항쟁으로 인한 정권 최대의 위기를 무마하고자 한 것이었다.

‘빨갱이’

목전의 대중적 저항운동을 마녀사냥으로 침묵시키려 한 시도는 박정희 정권 때만이 아니었다. 노태우 정권 시기 1991년 5월 투쟁 와중에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이 벌어졌고, 2008년 촛불시위 때도 원정화 간첩 사건을 만들어 국면 전환을 시도한 바 있다.

마녀사냥은 독재 정권 치하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반(半)권위주의나 자유주의 정권 역시 마녀사냥을 종종 이용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 김영삼은 대대적인 ‘주사파’ 색출 소동을 벌였다. 사노맹을 ‘주사파’의 배후로 지목해 수많은 운동권의 실소를 자아낸 서강대 총장 박홍의 발언이 신호탄이었다.

‘주사파’ 색출 소동의 표적은 단지 주사파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주류 정치계, 언론계, 학계, 노동운동 전반으로 확대돼 갔다.

북한을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국제사회주의자들(IS)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심지어 국립 경상대 교수들이 펴낸 학술 교재도 마녀재판의 대상이 됐다. 대학에서는 학사관리가 엄격해지고 학생자치권이 공격당했다.

심지어 서강대에서는 신입생들이 운동권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써야 했다. 이런 와중에 민주당은 군대와 청와대에도 주사파와 간첩이 있다며 한술 더 뜨기도 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터뜨린 영남위원회 사건은 IMF 구조조정에 맞선 울산지역 조직노동운동을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2006년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일심회’ 마녀사냥은 북한 핵실험에 대한 우익들의 분노를 달래는 동시에, 진보정당의 성장을 저지하고 그 성격을 지배계급의 입맛에 맞게 온건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의 역사에서 배울 교훈이 있다.

먼저, 마녀사냥이 벌어질 때마다 민주당 등 자유주의 야당은 사태의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봐 전전긍긍했다. 결국 그들의 해결책은 마녀사냥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류 지배자들에게 자신들도 이 체제를 힘써 지키려는 세력임을 입증받고자 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과제는 주로 ‘용공좌익’ 즉 ‘마녀’들에게 주어졌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그나마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마녀’들의 희생과 고투로 이뤄진 것이다.

둘째, 마녀사냥이 대체로 그렇듯이, 기존의 ‘상식’과 ‘여론’에 위배된다고 간주되는 소수파 집단이 손쉬운 희생양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과 ‘여론’을 빌미로 희생자들을 경원시하는 것은 사실상 마녀사냥에 동참하는 일이 된다.

지배자들은 대중의 ‘상식’과 ‘여론’에 호소해 마녀사냥을 정당화하지만, 그들이 노리는 진짜 목표는 자신들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고 대중을 위축시켜 지배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마녀소동에서 이석기 의원을 조롱하거나, 빌미를 줬다고 비난하며, 덩달아 마녀재판관 노릇을 하는 자유주의 지식인과 일부 진보 인사들의 행위는 무지하거나 비열하기 짝이 없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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