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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속의 논쟁:
‘자주 없이 민주 없다’고 볼 수 있을까

최근 박근혜 정부는 ‘유신 스타일’식 통치를 펼치고 있으며, 통합진보당(이하 진보당) 마녀사냥까지 자행했다. 게다가 올해 초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국가 간 긴장과 갈등이 커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진보운동 일각에서는 ‘자주 없이는 민주와 복지도 없다’는 주장이 나온다.

예컨대, 10월 초 진보당 기관지 〈진보정치〉에서 진보당 이의엽 전(前) 정책위 의장은 미국에 굽실대는 박근혜를 비난하며 “‘자주 없이 민주 없다’는 명제는 엄연한 이 나라의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분단체제”가 유지돼 막대한 군사비를 쏟아붓는 한,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더 나아가 기존의 남북 합의를 이행하는 게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진보정책연구원 박경순 부원장은 “10·4 선언 이행은 우리 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필수적 요소”라고 강조했다.

물론 남한 지배자들이 북한을 핑계로 국내에서 반민주적 행태를 정당화하고 운동을 탄압하는 건 분명 사실이다. 그리고 박근혜가 북한 위협론을 내세워 군비를 대폭 증강하면서 복지 공약은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면 정말 분노스럽다.

분단체제

그러나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분단체제”나 종속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첫째, 분단이 없는 나라에서도 상당한 억압과 독재가 존재할 수 있다. 과거 아르헨티나·칠레 등 남미 나라들은 분단되지 않았지만, 가혹한 군사 독재와 억압을 겪었다.

심지어 미국과 대립하며 ‘자주’를 지킨다는 이란과 쿠바에서도 독재 정권하에서 노동자·민중은 민주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내란 음모” 마녀사냥에 광분하고 군비 증강에 열을 올리는 건 60년 넘게 지속된 분단보다는, 최근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이 영향력을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는 대외 지정학적 상황과 더 관련 있어 보인다.

둘째, 민주주의의 진정한 동력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다.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경험을 돌아보면, 남북 당국 간 대화에 진전이 있어도 국내에서 민주주의가 자동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예컨대 2000년 6·15 선언을 이끌어 낸 김대중 정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천 명 이상을 구속한 정부였다. 또한 10·4 선언의 주역인 노무현 정부는 국내에서는 일심회 사건을 터뜨려 당시 민주노동당을 탄압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분단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국은 자본축적의 독자적 기반을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거대한 노동계급이 형성됐다. 따라서 이후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복지를 쟁취하는 핵심 동력은 노동계급의 투쟁과 조직(노동조합과 노동자 정치 조직 등)이었다.

셋째, 그런 점에서 “분단체제”의 극복과 민족 자주를 최우선 과제로 꼽으며 부르주아 일부와 계급 동맹을 맺자는 전략은 노동계급 투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이는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계급들을 한데 묶는 민족 단결을 위해, 노동계급의 투쟁을 자제시키는 효과를 낳곤 한다.

그래서 자주파 동지들은 노동계급 투쟁에 헌신하다가도 ‘민족화해’를 고리로 계급 동맹을 추진하면서 모순에 부딪히곤 했다.

지금 진보당은 박근혜 정권의 마녀사냥에 시달리고 있다. 민주당은 여기에 협조하면서 진보당을 철저히 배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0·4 선언 이행에 민주주의 발전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건 공허하다.

따라서 지금은 민주당을 포함해 계급을 뛰어넘는 ‘범국민연대’를 기대할 게 아니라, 반제국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노동계급의 단결과 투쟁을 건설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