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니스트이자 여성학자인 정희진 씨가 최근 〈한겨레〉에 쓴 칼럼 ‘징병제는 최선의 선택’에서 모병제를 비판했다.

정희진 씨가 생각하는 모병제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군대를 사회로부터 이탈·분리시켜 군대와 군대가 저지르는 문제들을 은폐시킨다. 둘째, 군대의 “전문화”, “민영화”를 낳아 군대가 “전쟁 주식회사”로 기능하게 한다. 셋째, 사회적 약자들이 군역을 전담케 한다. “어느 사회나 지원병 제도는 계급화, 인종화 된다. 여성 비율도 높아진다. 말이 ‘지원’이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구조적 징병제다.”

그는 더 나아가 징병제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지원병 제도는 전쟁과 군대로 인한 제반 논의가 특정 소수 집단의 문제로 축소 … [반대로] 보편적 의무로 운영되는 징병제는 어쩔 수 없이 전사회적인 관심사가 된다 …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일’은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 좋다는 역설이다.”

“징병제가 군대의 민영화, 프로페셔널리즘을 피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자 ‘군대로부터 군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징병제가 지속돼 온 한국의 군대를 보면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정희진 씨는 징병제가 군대에 대한 “시끄러운” 상태를 낳아 군대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히려 징병제는 군대를 “원래 그런 곳”으로 고착화시킨다. “모두”가 “일시적으로” 군대를 거쳐 가야 하는 현재의 징병제하에서 병사와 그의 주변인들은 군대라는 공간에 어떠한 책임 의식을 갖지 않는다. 그저 “무사히” 전역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군대에 관여하면 군대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군대는 유사시 명령에 따라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집단이다. 병사들은 적국의 평범한 주민들도, 심지어 내 나라의 평범한 이웃들도 살인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베트남과 광주에서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는 자국 지배계급의 이해에 반하는 개인과 집단을 살상하는 데 쓰인다. 

따라서 군대는 명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의 본능과 양심에 반하는 명령을 강제하기 위해서 본능과 양심을 억누르는 논리와 물질적 장치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군대는 예나 지금이나 폭력과 부조리의 온상이자,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세뇌의 장이다. 아무리 의복이나 막사가 따위가 부분적으로 개선되어도, 군대가 군대의 성원에게 가하는 폭력의 크기는 전혀 줄지 않는다. 사회적 관심이나 참여가 존재한다고 해도 이런 군대의 본질적 성격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군대의 본질

또한 징병제하의 한국은 미국이 생산하는 각종 첨단 무기의 주된 고객이자, 세계 최고 수준의 무기를 직접 개발하고 수출하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국방비는 국가 예산 중 가장 우선적으로 책정되고, 해마다 줄어드는 법이 없다.

강력한 군대를 소망하는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군대가 징병을 통해 유지되든 모병을 통해 유지되든, 그것과 상관없이 늘 첨단의 무기, 더 강한 살상력을 원한다. “전쟁 주식회사”의 번성은 모병제의 단점이 아니라 (또한 징병제를 통해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군대(와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 자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물론 모병제를 실시하면, 사병을 이루는 절대 다수가 사회적 약자들일 것이라는 정희진 씨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 고됨을 공유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일까.

우리는 시야를 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이른바 3D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이 진정으로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을 원해서 그 일을 하는가. 이들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안락한 삶을 사는 전문직 노동자들도 언제 경쟁에서 밀려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타인에게 돌아갈 이윤을 만드는 데 생의 대부분을 바친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살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노동계급은, 자신들이 사회의 부를 생산하면서도 모두 어떤 식으로든 예속 상태에 놓여 있다. 모든 노동계급은 각자의 일터에서 생존 경쟁에 내몰려 육체와 정신을 혹사시킨다. 그러므로 모병제하의 사병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성찰은, 자본주의 체제하의 노동계급 전체로 확대돼야 한다.

모병제하의 사병들은 자본주의 체제하의 노동계급이다. 모병제하의 군대는 노동계급의 수많은 일터 중 하나에 불과하다. 징병제로 인해 모병제하의 군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곳 대신 다른 열악한 일터를 전전할 노동계급의 존재와 그들의 처지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들을 위해서 없애야 할 것은 모병제하의 군대가 아니라 군대를 필요로 하는, 그리고 노동계급에게 착취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다.

정희진도 징병제하의 군대가 낳는 문제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징병제냐 모병제냐, 문제가 분명한 두 선택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 하는 이유는 군대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희진 씨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일’은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 좋다”고 전제하고 징병제를 대안으로 주장한다. 물론 군대는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단, 군대를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그렇다.

노동계급의 힘으로 자본주의를 철폐한다면, 체제의 수호자인 국가, 국가의 지배수단인 군대도 사라질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일’은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 좋다”면, 누군가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돼야 하니, 모든 이가 비정규직이 돼야 할까. 누군가가 ‘살인 무기’가 돼야 하니, 모든 이가 ‘살인 무기’가 돼야 할까.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한 일”이 존재한다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누구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경험”하지 않게 해야 한다.

자본주의

이처럼 군대의 폐해를 극복하는 방법은 모병제도 징병제도 아니다. 군대·국가·자본주의 체제의 폐지가 궁극적인 해결책이다. 그렇다고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만이 대안일 뿐, 모병제든 징병제든 똑같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현재 한국의 조건에서 징병제의 폐지와 모병제 도입을 제시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 대안은 모든 임금노동 관계의 철폐이지만, 그것이 당장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는 비정규직으로 차별을 받고 있으니 전 국민이 비정규직이 되자’고 주장해야 할까. 그럴 때는 ‘사용사유 제한’이라도 주장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징집제의 폐지와 모병제로의 전환은 그간 유지돼 온 냉전 안보 논리의 약화, 노동계급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 전파의 약화, 국가의 지배·탄압 수단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또한 국방비 감소를 통한 복지 비용 확충, 군대를 거부하는 이들의 인권 보호, 경제인구 증가에 따른 사회적 부의 증가, 병력 확보를 위한 사병들의 처우 개선 등을 가능케 할 것이다.

물론 모병제로의 전환이 지배계급의 의지에 따라 진행된다면 병력 감소를 상쇄하기 위해 첨단 무기를 도입해야 한다는, 이른바 “양보다 질”의 논리에 의해 오히려 국방비가 증가할 수 있고, 이와 더불어 지배 이데올로기와 안보 논리가 강화되는 등 모병제 도입으로 인한 진보적 의의가 상당 부분 감소할 것이다. 게다가 전술했다시피 모병제는 군대의 근본적 성격에서 비롯하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동계급에 의한, 노동계급을 위한, 군축과 평화, 복지를 지향하는 운동을 통해 모병제를 이뤄내야 한다. 또한 군대 자체의 본질적 성격을 폭로하며 군대·국가·체제를 모두 철폐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