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공기업들에 대한 퇴직금누진제 폐지 압박이 거세다. 올해 서울지하철노조 임단협 투쟁의 핵심 쟁점도 바로 이 문제다.

정부와 보수언론, 서울시는 한 목소리로 ‘공기업 노동자 특혜’ 운운하고, 서울지하철의 부채가 마치 노동자 탓인 양 공격하고 있다.

퇴직금누진제는 퇴직금 산정의 기준인 평균임금에 곱하는 지급률이 근속연수에 따라 점점 높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누진제가 사라지면 노동자들은 엄청난 손해를 본다.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은 퇴직금이 심지어 반으로 줄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퇴직금누진제 폐지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10월 11일 2013 임단투 승리를 위한 조합원 총회. ⓒ사진 출처 서울지하철노동조합

자녀들이 대학 가고 결혼할 때까지 부모가 부양해야 하고, 복지도 매우 적은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게다가 평균 수명은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금누진제는 공기업 노동자들에게 불안한 노후에 안전망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실낱 같은 희망이자, 비빌 언덕이었다. 누진제가 적용되는 지금도 “자녀 대학 학자금을 대고 나면 퇴직금이 마이너스”라는 지하철 노동자들이 많다.

따라서 퇴직금누진제를 폐지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미래를 강탈하는 중대한 공격이다.

퇴직금누진제 폐지는 재정 위기의 책임을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공격의 일환이다. 정부는 “IMF 공황” 직후부터 공공기관에서 누진제를 폐지하기 시작했다. 지난해부터는 누진제를 유지하는 지방공기업에는 경영평가에서 감점을 매겨 성과급을 주지 않겠다는 지침을 내렸다.

공기업 노동자 이기주의?

정부는 IMF 이후 퇴직금누진제를 폐지하기 시작하면서, “공공부문이 민간기업과 공무원에 비해 과다한 퇴직금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200인 이상 민간기업의 절반가량이 누진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공무원은 월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대신, 공기업 노동자들보다 30퍼센트 가량 상회하는 퇴직금을 받고 있었다.

즉, 퇴직금누진제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가, 경제 위기에 노동자들에게 내핍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폐습’ 취급받기 시작한 것이다.

누진제로 받는 퇴직금은 노동자들이 차세대 노동력을 양육하거나 질병과 노후 보장을 고려해 현재의 임금 일부를 미래에 대신 받는 ‘후불 임금’의 성격이 있다. 그래서 누진제는 나이가 들수록 목돈이 필요한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제도다.

대법원도 ‘후불 임금’의 성격을 인정해 왔다. 퇴직금누진제 폐지는 노동자 임금의 손해이므로 반드시 단협을 통해 노동자와 합의를 거쳐야 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서울 지하철 부채가 퇴직금누진제 탓이라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서울메트로 영업 적자의 주요 부분은 무임수송비용과 원가보다 낮은 요금이다. 이것은 공공재를 제공하기 위해 불가피한 ‘착한 적자’이고, 당연히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오히려 이런 적자를 중앙정부가 부담하는 공익서비스보상제도가 서울지하철에도 도입돼야 마땅한 마당에, 애먼 노동자 퇴직금을 공격하는 것은 속죄양 삼기일 뿐이다.

지난 10여 년간 공공기관 정규직 노조들이 퇴직금누진제라는 ‘특혜’를 버린 것이 다른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민간기업도 누진제를 폐지하라는 압력으로 작용해, 모두가 하향평준화되는 길을 열어 줬을 뿐이다.

민주파 집행부의 존재 이유

퇴직금누진제의 마지막 보루인 서울지하철노조가 누진제를 지켜야 재정 위기의 책임을 공공부문 노동자에게 떠넘기려는 정부의 파상 공세에 맞서 싸우는 데도 유리하다. 실제로 다른 서울시 공기업들도 서울지하철노조의 임단협 결과만 지켜보고 있다.

무엇보다, 서울지하철노조 조합원들이 퇴직금누진제 폐지를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해 노동자들이 우파 위원장을 날리고 오랜만에 민주파 집행부를 세운 이유가 바로 전임 위원장 정연수가 퇴직금누진제 폐지를 합의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이에 엄청나게 분노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하철노조의 새 민주파 집행부는 퇴직금누진제 폐지를 수용한 채, 보전 방식과 보전 액수만을 임단협의 쟁점으로 삼으려 한다. 이미 서울모델협의회(서울시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해 퇴직금누진제 폐지 내용이 포함된 조정서에 합의했다.

노조 지도부는 누진제 폐지에 따른 손실을 최대한 보전받는 방법을 제시하겠다고 한다. 누진제를 적용받지 못하던 2000년 이후 입사자들에 대한 차별도 없애겠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조합원들이 투표를 통해 누진제 폐지를 분명히 거부했으므로, 이런 거부 의사를 민주파 집행부가 온전히 받아 안고 가는 것이 옳았다. 2000년 이후 입사자들에게도 누진제를 적용하라고 요구해 단결을 도모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현재 얼마를 보전받든, 근속연수가 길수록 누진적으로 늘어나는 미래의 퇴직금이 사라지는 것 자체가 더 큰 손해임을 안다. 정부와 서울시가 (손실액을 보전해 주는 한이 있더라도) 퇴직금누진제만큼은 없애려고 혈안이 된 이유도 이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더 부담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정부는 퇴직금누진제 폐지를 지렛대로 성과급을 확대하는 등 임금 유연화를 추구해 왔으므로 노동자들이 이를 더더욱 수용해선 안 된다.

누진제 폐지에 따른 손실액의 50퍼센트만 보전하기로 한 조정서 내용도 조합원들의 의심과 불만을 사고 있다. 최근 열린 서울지하철노조 대의원대회에서도 ‘겨우 50퍼센트 보전 받자고 투쟁하는 것인가’ 하는 목소리가 여럿 나왔다.

물론, 정부와 서울시가 워낙 강경해서 결코 만만치 않은 싸움일 것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의 장기화로 말미암아, 사용자들이 순순히 양보하는 시대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강력한 투쟁을 해야만 노동조건을 그나마 지킬 수 있다. 투사들이 퇴직금 같은 평조합원들의 핵심 불만을 충실히 대변해야만 평조합원들이 투사들의 존재 이유를 실감하고 투사들의 힘도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임금·노동조건 후퇴 압박하는 박원순 시장

개혁 염원을 업고 당선한 박원순 시장이 박근혜 정부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에게 노동조건 후퇴를 강요하고 있다는 점을 특별히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박원순 시장은 “지난 12년 동안 당신들만 혜택을 받았으니 이제 양보할 때가 됐다”며 퇴직금누진제 폐지를 압박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를 맞바꾸라고도 강요하고 있다. 구조조정 컨설팅 업체로 악명 높은 맥킨지에 서울지하철 구조조정 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을 맡기고, 서울시 부채를 줄인다면서 구조조정을 동반하는 두 지하철공사 통합안도 고려 중이다.

임금피크제와 퇴직금누진제 폐지의 경우, IMF 이후 15년 동안이나 시도됐지만 노동자들의 반감과 저항으로 도입하지 못했던 개악이다. 정작 개혁파를 자처하는 인물이 등장해 이를 처리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수파나 개혁파나 집권하면 똑같다’는 환멸과 실망을 안겨줄 수 있다. 이것은 노동자 운동이 박원순 시장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