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열린 주장과 대안〉 8호에 실린 100인 위원회 관련 기사에 대한 반박글이다. 뒤이어 필자 정진희 씨의 반론을 실었다.  

성폭력의 역사를 굳이 들추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 남성이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여성에게 성폭력을 행하는 사례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성"에 대한 개념이 단지 여성을 억압하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사회화된 개념이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사회화된 남성들의 힘을 발현시키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본을 지닌 여성을 차지하려는 남성들의 열냄과 이쁜 여자만을 사귀려는 남성들의 취향도 또는 치마만 입은 여성을 보기만 해도 흥분하는 남성들까지 사회화된 의식은 그 힘을 마치 모세의 예언처럼 회사에서 집안까지 넘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성폭력의 환경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과 행위가 운동권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이러한 문제의식과 행동을 호소한 집단이 여성 100인 위원회이다. 이 위원회에서는 운동권 내 성폭력의 사례와 과정을 발표하면서 운동권의 성폭력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또한 많은 운동권 내 성폭력에 대한 공감과 쪽팔림을 함께 가져다 준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동의하는 척하면서 사실과 진실의 문제를 100인 위원회가 자의적 판단으로 개인의 인권을 무시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00인 위원회의 행동이 여성의 억압을 절단시킬 수 있는 대안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질책하기도 한다. 운동권 내의 성폭력 문제를 부르주아 언론에 발표해서 얻는 것은 100인 위원회의 명성이고 쪽팔린 것은 운동권의 도덕적 실추와 대중들에게 외면하는 구실을 주었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아직도 암암리에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보다. 운동권 내의 보수주의자들이 항상 써 먹는 조직보신주의자들 변명은 먹물들의 위선일 뿐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그들이 모르는 것에 신경 끄자!

문제는 운동권에 대장 노릇을 하고 싶어하는 인물들이다. 여기서 급진 페미니즘(극단적인 여성주의자)들이 약간의 오해를 사는 주장도 있지만 그들 역시 사회화된 남성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의사 소통의 부재로 생기는 오해를 만들고 있기는 하다. 남성이 여성에게 행하는 억압이 남성들에게만 나오는 특별한 행동양식이라고 설명한다. 때문에 밥을 먹는 행위에서 섹스하는 행위까지 모든 인간의 행동이 남성들 위주로 설계되었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남성이 주된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논리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은 남성을 쳐부수고 여성들만의 체제와 체계를 형성한 아마존을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대안이 될 것이다. 남성들은 여기서 노예로 전락하면 그만이다. 논리적인 결론이 그렇다는 것이다. 진짜 이들이 자신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꿈꾸는가?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독자적인 여성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남성들에게 당하는 억압에 대해 저항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의 의식과 행동을 비판하는 데서 발생하는 상대적 개념일 것이다. 어느 여성도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자유로운 세상에서 자유롭게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을 인간적으로 꿈꾸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논리적 모순을 비판하는 일부 전통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 "모든 남성이 여성의 적"이라 생각하는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남성이 강간범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한다."라고 비판한다. 100인 위원회 활동이 바로 여기에 논리적 모순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100인 위원회의 사례 발표 내용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100인 위원회 가슴에 못을 박고 있다.

100인 위원회가 발표한 원인과 배경에 대해 그들은 동감한다. 그러나 과정과 결과와 대안에 대해서 그들은 단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 목욕시키고 목욕물 버리려다가 어린 아이까지 버려 버리는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100인 위원회 활동이 모든 남성들을 강간범으로 몰려는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을까? 또는 운동권의 이미지와 존재를 뿌리채 뽑기 위한 전략적 사업으로 이런 발표을 한 것일까? 아니면 잘 나가는 운동권 남자가 미워서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도덕적 치명타를 먹이는 것일까? 그는 싫다는 여성을 따라 다니는 행위와 농활에서 여학생에게 성추행한 마을 아저씨에게 실명 사과를 요구한 일을 거부한 총학생회와 콘돔으로 장난친 행동을 성폭력으로 보지 않는다고 단호하고 말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강제적 신체적 접촉과 성기를 삽입한 행위만이 성폭력이라고 확신한다는 어느 검사의 열변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 검사가 예를 들면 룸싸롱에서 아가씨에게 오늘 피고인의 성폭력 경험담을 지껄이면서 그대로 해 봐라고 요구하는 것도 성폭력이 아니다. 성기만 삽입을 하지 않으면 성폭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는 그 아가씨를 돈으로 주고 하루밤 오입을 한다고 해도 성폭력이 아니다. 왜냐하면 돈을 매개로 한 화간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여성을 여자라는 사실만으로도 폭행을 해도 폭행이지 성폭력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할 것이다. 또 한 예로 시선 폭력은 상대방에 대한 불쾌함이지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고 역시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100인 위원회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단 2건만 진짜 성폭력이고 나머지 사례들은 불쾌함 정도의 가벼운 농담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직업적 혁명가를 꿈꾸는 마르크스주의자이다. 그래서 분명하다. 논리적으로 합당한 사실만 인정한다. 정신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은 그냥 감정이다.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 아닌 사실을 발표하는 행위는 거짓말이고 그 거짓말의 위험은 "오늘날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라고 말한다. "성폭력은 단지 여성의 느낌으로 판가름되고 있는 원칙"이라고까지 한다. 법의 역사를 보면 지배계급에게 저항한 부르주아들의 제도적 장치였다.

자본주의에서의 법은 부르주아 국가 권력을 유지하는 처벌의 형태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성폭력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이고도 물리적인 행위가 있어야 하는 엄밀함을 요구한다. 계급적 관점이 아닌 처벌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성폭력은 계급 사회의 산물이다. 행위의 주체는 사회화된 남성이 마찬가지로 사회화된 여성을 억압하는 반영이다. 100인 위원회의 활동은 계급 사회에서 억압된 성폭력에 대항하는 하나의 행위이다. 그들의 발표가 논리적 모순과 사실이 아닌 화간과 장난을 가지고 성폭력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계급 사회에서 행위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한 용기인 것이다. 물론 선의의 피해자가 있으면 안된다. 그러나 성폭력을 고발한 여성들이 이중적인 모욕을 당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고발한 주체가 사회에서 정신적 직업적 육체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현실의 분위기라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논리와 사실만을 주장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교조적인 정치와 잘난 척하는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그 자신은 모를 것이다.

그의 실천을 한번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강제적인 성적 언행들이 아닌 경우에 대해서 페미니스트주의자들이 성폭력 운운하면 성적 보수주의를 이끌어 낸다. 왜냐하면 성적 표현에 대해서 숨기는 것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적 표현의 차별은 우익의 성차별주의자이다. 따라서 포로노를 지지해야 하고 인터넷 성인 방송 구속에 대해 항의해야 한다. 여기서 그는 성적 표현의 목적이 억압적인 관계인가 아닌가를 구별하지 않는 자유주의적 방만함이 있다. 모든 성적 표현은 근본적으로 자유롭다. 마치 무슨 광고 카피같지 않은가? 자유로운 성적 표현을 억압하는 것은 우익 이데올로기고 성적 표현은 강제적이지 않으면 자유롭게 표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운동권 후배가 오랜만에 머리카락을 새롭게 바꾸고 기분전환을 했다. 선배(여기서 선배는 물론 남성이다)는 노랗게 물을 들인 여성 후배에게 한마디 했다. "야 너 머리카락이 포르노 여배우 같다." 이 말을 들은 여후배 "형! 성폭력이야! 그 말 취소해!"라고 하자! 아니면 말구. 그런데 여기서 그 마르크스주의자는 그게 무슨 성폭력이야 그냥 농담이지 할 것이다. 안 봐도 정말 포로노 같지 않은가?

100인 위원회의 활동이 단지 성적 농담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 사회에서 성적 억압의 표현이 운동권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그의 똑똑함은 100인 위원회의 운동권 내 성폭력의 위험을 발표한 행위를 '단지 농담 가지고 왜 그래. 성 표현도 못해' 하고 비난을 하고 있다.

둘째 연이어 성적 농담과 강간을 구별해야 한다. 그는 너무도 똑똑해서 잘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100인 위원회의 활동과 페미니스트들의 경직된 사고와 행동을 그는 또한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저 농담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남성을 적으로 삼지 말고 또한 남성을 비난하는 것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계급 사회에 저항하는 투쟁을 남성과 여성이 함께 싸워야 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불평등한 조건은 남성과 여성 모두 똑같다고.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계급과 맞서야 하는 이유가 성폭력과 농담을 구별하라고 한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당시 가퐁 신부가 짜르에게 빵과 자유을 위해 청원하러 가는 시위 도중 짜르의 군대가 학살하기 시작한 현실에서 출발한 혁명이었다면 운동권의 성폭력에 대한 100인 위원회의 활동이 계급 사회의 성폭력이 운동권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현실을 고발한 출발점이 여성 억압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기초의 행동임을 이해하지 않는 그의 정치와 자만심은 단지 그의 똑똑함에서 오는 논리의 오류가 아니다. 어설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알량한 원칙과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 속에서 잘못된 행동을 강요하는 꼬마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장 노릇과 상통할 것이다.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항상 대중의 사고를 강제로 뛰어 넘으려고 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일찍이 레닌이 이 점을 간파하고 호된 야단을 친 것을 그들은 아직도 모른다. 한편 여기에서 실망한 올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철저히 자본주의화 되는 과정 속에서 여성 억압에 대해 반성할 줄도 모른다. 100인 위원회의 활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친구가 되는 것은 그들의 아픔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훌륭한 방편과 역사의 기록이 될 것이다.

여성 억압에 맞서 싸우는 100인 위원회의 활동을 한 남성으로서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면 안 되나? 아니 벌써 2001년 여성 신입생들이 대학에 들어왔다. 또한 졸업한 여성 선배들은 사회로 나갈 것이다. 롯데 호텔 성폭력 해결은 지배계급 측에서 성폭력이 아닌 상사가 직장인들에게 격려하는 가벼운 신체 접촉 스킨십이라고 처벌을 하지 않고 있다. 두 번 우는 여성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아직 어려서 모른다. 많은 남성과 여성들이 잘못된 성 지식과 성차별 속에 첫경험 내지는 수치스러운 경험을 한다. 정말 사랑해서 사랑의 이름으로 성적 영감을 교환하는 것은 정말 소수의 사람들이다. 사랑해서 얻은 성적 쾌락과 기쁨이 아닌 필요에 의한 강제적 소비적 성적 표현과 성적 교환이 어설픈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자유주의적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100인 위원회의 활동과 발표는 더욱더 값진 결과의 열매가 될 것이다.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은 님은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에서 발간한 《열린 주장과 대안》 8호 49∼54쪽을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 주장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절대 아님을 밝히고 싶다. 더불어 다른 글들은 훌륭한 분석과 주장들을 담고 있다. 표현상 과격한 표현과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맘에 안 들면 농담이라 생각하고 넘어가도 상관없다.)

 

주관적 성폭력 개념을 넘어서

정진희

정치적 논쟁을 하다 보면, '과격한' 표현으로 논리의 빈약함을 감추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김용운 씨가 《열린 주장과 대안》 8호에 실린 100인위 기사를 반박한 글이 이런 경우라 할 수 있다.

김용운 씨 글은 8호의 내 글에 대한 두번째 반론1)인데, 그의 글은 꽤 도발적이다. 그는 "어설픈 마르크스주의자", "꼬마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장 노릇" 같은 자극적인 표현들과 비꼬는 말투로 나를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비판에서 제시되는 근거는 거의 없다. 그는 주로 이죽거리는 방식으로 내 주장을 비난할 뿐 논리적 비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래서는 발전적인 논쟁이 될 수 없다. 내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비판하다 보니 왜곡도 심하다. 그의 혼동스러운 주장들을 일일이 반박한다면 내 글이 너무 지엽적으로 될 테니 모든 왜곡을 바로잡진 못하겠다. 나는 그의 글에서 두드러지는 문제점만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그는 100인위의 자의적 성폭력 개념을 비판한 내 주장이 마치 성폭력을 옹호한 것인양 다루었는데, 이것은 부당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내가 성폭력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논쟁점은 나와 100인위의 성폭력 개념의 차이지 성폭력을 옹호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김용운 씨가 100인위처럼 "여성의 불쾌함" 같은 주관적인 잣대로 성폭력을 규정한다면, 내가 성폭력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불쾌함'이란 모호한 기준대로라면, 똑같은 행동도 보는 사람에 따라 성폭력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8호에서 자의적 성폭력 개념이 갖는 문제점을 밝힌 바 있다. 김용운 씨는 이런 내 비판에 어떤 논리적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100인위 폭로에서 두 건을 빼고는 모두 "가벼운 농담"이라고 했다는 것도 왜곡이다. 나는 두 건을 제외한 나머지 사건이 "'피해자 진술'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거나 전혀 성폭력 같지도 않은 사례들"이라 얘기했지 "가벼운 농담"이라 주장하지 않았다. 비록 성폭력은 아니더라도 분노를 자아낼 만한 사건들 ― '전 오늘의 책 총무 사건' 같은 구타 사건, 농활에서 성추행한 마을 아저씨에게 실명 사과 대자보를 붙이도록 강제하는 일을 거부한 총학생회 간부의 행동 같은 ― 이 분명히 있는데, 이런 왜곡은 상당히 문제 있다.

내가 성기 삽입만을 성폭력이라고 인정했다는 그의 비난도 근거 없다. 8호에 실린 내 글 어디를 봐도 강간만을 성폭력이라 주장하지 않았다. 성폭력이 강간보다는 좀더 넓은 행위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성폭력을 강제적 성적 행위라 정의했다.

그가 흥분해서 든 성폭력 사례는 100인위의 혼동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는 강간, 성희롱, 스토킹, 매매춘, (성적이지 않은) 폭행, 눈빛 등 구별돼야 할 행동들을 모두 성폭력으로 뭉뚱그리고 있다.  

이런 주장이 갖는 문제점은 8호와 9호에서 다뤘으니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진 않겠다. 다만 그런 주관적 개념을 옹호하면 성폭력의 뚜렷한 특징을 없애게 돼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렇게 개념을 자의적으로 쓰면 대화 자체가 안 된다. 자의적 성폭력 개념에 따라 "나 오늘 성폭력 당했다."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어떤 일을 당했다는 것일까? 당사자가 아니라면 누가 그 말 뜻을 알까? 김용운 씨 글을 보고 내가 "불쾌하다"고 느낀다면(그럴 만한 구절이 많지 않은가), 100인 개념대로라면 나는 성폭행 당한 게 아닐까? 김용운 씨 논리는 자가당착을 피할 수 없다.

둘째, 김용운 씨는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남성이 강간범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한다."는 내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듯 비판했다. 100인위가 좋은 의도를 갖고 있지 않냐며 말이다.

믈론 그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100인위가 운동권 내에서 성폭력을 뿌리 뽑고 평등한 분위기를 만들려는 긍정적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비록 내가 8호에서 충분히 지적하진 못했지만 100인위 폭로가 갖는 긍정성을 분명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100인위가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해서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이론적 가정 ―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강간범으로 여긴다 ― 이 부정될 순 없다. 그가 급진 페미니즘에 대해 조금만 알아도 이렇게 단순하게 말할 순 없다.

예를 들어 급진 페미니스트 수잔 브라운밀러는 현대 페미니스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책 《성, 성폭력, 성폭력의 역사》(일월서각)2)에서 강간을 이렇게 정의했다.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 상태로 몰아넣으려는 의식적인 협박의 과정[강조는 원문 그대로]"이다.

그가 잘못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분리주의는 급진 페미니즘 정치의 핵심인데, 오늘날 여성 운동에서 성폭력을 폭넓게 규정하려는 시도는 급진 페미니즘의 영향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