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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벤(1925~2014):
평생을 거쳐 왼쪽으로 나아가며 영감을 준 사회주의자

토니 벤은 지난 40년간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좌파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중요한 노동계급 모임과 집회에는 거의 빠짐없이 벤이 연사로 초청됐고, 그는 시간만 맞으면 꼭 참석해 연설을 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자랑스럽게도 여러 해 동안 벤을 우리 ‘맑시즘’ 행사에 초청해 토론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운동들에서 그와 협력했다.

무엇보다도 다른 노동당 의원들이 우경화할 때도 벤은 좌경화했다.

언론은 1980년대 내내 벤을 “괴짜 좌파”라고 욕하며 비아냥댔다. 벤이 정말 무능한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결국 언론의 존경을 받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활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벤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토니 벤이 노동계급 정치와 사회주의에 투신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나 또한 운 좋게도 한 모임에 벤과 함께 연사로 초청돼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며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여정 내내 사람들은 벤한테 함께 사진 찍자고 요청하거나, “우리 엄마랑 통화 좀 해주세요, 당신은 엄마의 영웅이에요” 하는 식의 부탁을 하곤 했다.

에드 밀리반드[영국 노동당 대표]나 에드 볼스[영국 노동당 예비내각의 재무장관]한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둘 모두 벤처럼 쉽게 다가갈 수도, 상냥함을 기대할 수도 없는 인물들이다.

벤의 연설은 듣고 또 들어도 사람의 기운을 북돋는 힘이 있었다.

벤은 지난 30년 동안 주요한 노동계급 투쟁을 모두 지지했고, 2001년 이후 반전 운동을 건설할 때에도 커다란 구실을 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운동을 건설했고, 사람들한테 영감을 주고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에 하원의원으로 처음 당선했을 때, 벤은 자신을 “신노동당류의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노동당 좌파 지도자 어나이린 베번에 반대해 우파인 휴 게이츠컬을 지지했다.

그러나 얼마 안 돼 하원의원 자격 조건에 걸려서 벤은 의원직을 사퇴해야 했다. 전시 거국정부에서 일한 공로로 그의 아버지가 자작 작위를 받았고, 1960년에 아버지가 숨지자 벤이 작위를 물려받은 탓이었다.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해 자동으로 상원의원이 돼서 하원의원을 겸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벤은 자신의 작위를 포기하는 것을 허락 받고자 3년 동안 싸웠다.

해럴드 윌슨 정부에서 체신부 장관이 된 벤은 우표에서 여왕 초상을 없애려 하면서(여왕 자체를 없애려던 것은 아니었다) 급진성을 드러냈다.

이 계획은 여왕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자 곧 철회됐다.

벤은 좌파들이 벌인 핵무장 반대 운동, 임금 억제 반대 운동, 반노조법 통과 반대 운동, 미국의 베트남 침공 지원 반대 운동 등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더 결정적으로는 1970년대 초에 노동자 투쟁을 경험하면서 바뀌었다.

SWP의 지도적 당원이었던 크리스 하먼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벤은 1971년에 야당 대변인으로 클라이드 조선소 파업 현장을 방문했다. 당시는 조선소 폐쇄 시도에 맞서서 거대한 하루 파업이 벌어진 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자주관리하던 때였다. 벤은 곧 저항의 목소리에 공명했고 의회 내에서 좌파의 기수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벤은 자신의 관점 변화를 1976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1968년까지 나는 확실히 그저 직업 정치인이었을 뿐이고, 1968년에서야 기술이나 참여 등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딱히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1970년에 내가 쓴 페이비언협회 소책자는 거의 반(反)사회주의적이었고 민주적 색채를 띤 협조주의(경영진과 노동자의 협력을 추구하는)적인 것이었다. 1973년까지 나는 왼쪽으로 이동했고 진정한 사회주의 입장으로 점점 더 기울었다.”

1974~79년은 해럴드 윌슨과 짐 캘러헌을 총리로 하는 노동당이 집권한 시절이었다.

노동당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시를 받아들여 실업을 크게 늘리고 긴축 정책을 시행했다.

노동당 정권의 이러한 정책은 대처주의의 길을 닦았다.

벤은 정부 내에서 항의하고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정부에 남았고, 산업부 장관에서 에너지부 장관으로 좌천된 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벤은 정권의 좌파적 차폐물처럼 행동했고 그 덕에 노동당 정부는 저항을 손쉽게 잠재울 수 있었다. 1977년 벌어진 소방관 파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에너지부 장관이던 벤은 윈드스케일 핵발전소에서 벌어진 파업을 깨려고 군대를 투입하려고도 했다.

노동당 정부 하에서 겪은 쓰라린 경험은 노동당 활동가 사이에 커다란 논쟁을 촉발했다. 벤 또한 더욱 왼쪽으로 이동했다.

벤이 1981년에 노동당의 부대표 후보로 나서자 노동당의 배신에 분노한 모든 사람이 그의 선거 운동에 동참했다.

전국 곳곳에서 열린 집회에 벤의 연설을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회주의 언론인인 폴 풋은 당시 선거 운동이 “아주 신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풋은 이렇게 말했다. 벤은 “사회주의를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설득적으로 주장할 줄 알았고, 이 점에서 그는 내가 만나 본 그 어떤 노동당 좌파 인사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 덕에 벤은 정치판을 휩쓸었고, 좌파 사이에 정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은 벤의 선거 운동에 대해 악의에 찬 맹공격을 가했고, 닐 키녹을 중심으로 노동당 하원의원 일부가 배신을 했다.

49.5퍼센트를 득표한 그는 50.5퍼센트를 득표한 상대 후보에게 패배했다. 벤은 결코 실망하지 않았지만 많은 지지자들은 낙담하고 우경화했다.

벤은 1984~85년에 벌어진 광원 파업을 지원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 뛰어들었지만, 그 파업이 패배하면서 노동당의 급격한 우경화에 속도가 더 붙었다.

키녹과 그의 후임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이 자본주의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고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벤은 그러한 노동당 정책들에 반대했다.

벤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 반대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의 반대자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벤은 1990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고, 1999년 코소보 전쟁 지원에 반대한 극소수 하원의원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다.

벤은 2001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자 의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왜 벤은 노동당을 나와서 더 나은 대안을 건설하는 일을 돕지 않았을까?

그는 거듭거듭 노동당에 절망했다.

벤의 일기를 살펴보면, 그가 분노한 대상은 노동당의 이런저런 결정이나 지도자가 아니라 노동당 활동 자체였다.

1978년 1월 15일자 일기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이제 노동당 지도부는 모두 완전히 타락했으며 좌파의 성장은 당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노동당의 죽음을 뜻한다.”

1989년 5월 5일에는 이렇게 썼다. “노동당은 결코 사회주의 정당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1993년 11월 29일자 일기에서도 벤은 “노동당은 죽었다. 노동당은 그저 보수당을 비판할 뿐 정책이 없다. 노동당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노라고 답할 것이다” 하고 적었다.

벤은 때때로 진정한 권력이 의회 바깥에 있음을 인정했다.

1994년에 벤은 데이비드 밀리반드[고든 브라운 총리 시절 외무부 장관을 지낸 에드 밀리반드의 형]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출세하고 싶고, 노동당 지도자로 인정받고자 한다면, MI5[영국 정보기관], 런던 금융가, 영국 왕가, 브뤼셀의 유럽연합 관료들, 언론 제왕들, 고위 관료들과 타협해야만 할 거요.”

1963~67년 일기장의 앞부분에는 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영국은 겉으로만 하원의원과 그들을 선출한 유권자에 의해 통치될 뿐이다. 사실, 의회 민주주의는 체제의 운영진을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수단에 불과하며, 누가 선출되든 그는 체제를 운영할 뿐 체제의 본질은 변치 않는다.”

그러나 벤은 노동당 바깥은 서로 반목하는 종파들만 난무하는 황야일 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의회 밖 활동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벤은 일기에 노동당에 대한 분노를 쓸 때마다 뒤이어 의회 기구들의 최근 행보와 의회 제도에 대한 존중을 쓰곤 했다.

벤은 광적인 보수당원인 이언 페이즐리와 친밀하게 나눈 대화도 기록해 두었고, “친구”인 이녹 파월[보수당 정치인으로 인종차별적 언동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다]의 장례식에 참석한 자신의 행동을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들에도 벤은 계속해서 사회주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들 탓에 벤은 자기 주장에 감화된 사람들한테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보여 주지는 못했다.

벤이 참석하지 않는 집회, 거리 운동, 파업 대열에 우리가 익숙해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가 매우 그리울 것이다.

2009년에 벤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묘비명은 이랬으면 좋겠어요. ‘토니 벤 여기에 잠들다, 그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다.’”

토니 벤은 실제로 그랬고 오히려 그 이상의 일을 해냈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3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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