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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강경대를 부를 화염병 전담 기동 타격대

지난 3월 초 김대중 정부는 화염병 전담 기동 타격대 창설을 발표했다. 정부 발표는 화염병과의 전쟁 선포에 해당했다.

사진 채증 작업을 통해 화염병 시위 관련자들을 끝까지 추적해 구속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신고한 사람들에게 주는 신고 보상금을 10배로 올리고 화염병 투척자들에게 법정 최고형을 구형하겠다고 발표했다. 1989년 화염병 처벌 특별법을 만드는 데 일등공신 노릇을 했던 이한동은 화염병 제조에 쓰이는 주류 판매를 제한하겠다고까지 발표했다.

대우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에 대한 항의 시위에서 화염병이 등장하자마자 정부는 이토록 민첩하게 움직였다.

김우중이 세계 전역을 버젓이 오가고 있는데도 소재 파악이 힘들다며 구속하지 못하는 경찰이 화염병 시위에 대해서는 그리도 신속하게 행동했다. 화염병 시위에 대한 그들의 신속한 대응은 건강 보험 재정 파탄에 대한 대응과도 대조적이다. 정부는 보험 재정 파탄에 대해 별다른 대응 없이 시간만 끌고 있다.

공안 검사들은 화염병 시위 엄단 대책이 필요하다며 한목소리를 냈고 급기야 공안 정국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했던 공안대책협의회가 부활했다.

3월 9일 전국의 공안 부장과 공안 검사 103명 전원이 참가해 연찬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올해를 "공안 검찰 활동의 원년"으로 삼자고 결의했다. "집단적인 화염병 투척 및 쇠파이프 사용 폭력 시위에 대해서는 주동자는 물론 배후·제조·운반·사용자 모두를 끝까지 추적하고 검거해서 구속 수사하는 등 강력 대처"하자고 결의했다.

화염병 전담 기동 타격대는 백골단의 악몽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청바지와 청자켓을 입고 시위대를 끝까지 뒤쫓아 가 쇠파이프로 흠씬 두들겨 패는 것으로 유명했던 악랄한 체포조가 다시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그러자 정부는 화염병 전담 기동 타격대의 폭력성을 가리기 위해 위장책을 만들었다.

경찰청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 시민참관단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시민참관단 제도는 마치 평화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의 보완책도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식의 위장이었다. 그러나 "제3자의 눈으로 경찰의 진압 활동이 평화적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12개 단체에게 참여를 부탁했다."는 경찰청의 주장과는 달리 인권운동사랑방에 따르면 "그 어떤 단체도 경찰청으로부터 참관을 부탁받은 적이 없었다."

민생 공안?

김대중 정부는 기동 타격대가 "민생 공안"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호텔 롯데와 사회보험 노조에 경찰력을 투입시킨 장본인인 경찰청장 이무영은 기동 타격대 발족이 "국민들이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배려 조치"라며 구역질나는 위선의 말을 뱉았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정작 "민생"이 위태로울 때는 고성능 장비들을 지급하는 데에 인색했다. 홍제동 화재 진압 때문에 목숨을 잃은 소방관들은 방화복을 지급받지 못해 방수복을 입고 있었다. 반면, 경찰은 기동 타격대에게 방화복뿐 아니라 방화 장갑, 소화포와 개인 소화기 등을 즉각 마련했다. 심지어 방염 처리된 특수 진압복까지 구비했다.

기동 타격대에는 최첨단 고성능 진압 장비들이 아낌없이 지급됐다. 특수 무술 유단자들로 엄선된 기동 타격대원들이 무거운 진압복과 군화 차림으로는 "기동성이 떨어진다."며 특수 운동화, 소형 방패 등의 "신소재의 진압 장비들"을 갖추게 했다.

정부는 항상 집회와 시위 진압이 "민생 공안"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1999년 집회·시위 진압에 동원된 경찰은 연인원 324만 명에 이른 반면, 재해·재난 대비에 동원한 경찰은 연인원 6만 4천999명밖에 안 된다.(경찰청, '1999년 재해 재난 관리 활동')

재난 피해 때 뜨지도 않던 헬기가 "민생"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는 곳에는 어김 없이 나타나곤 했다. 작년 은행 노동자들과 한통 노동자들의 농성장, 대우차 부평 공장의 농성장 주변에도 헬기가 등장했다. 3월 7일 대우차의 해고 노동자들이 공장에 들어가려 하자 즉각 3∼4대의 헬기가 떴다. 경찰은 헬기를 띄워 20미터 저공 비행을 하면서 "전원 체포해서 사법 조치하겠다."며 협박하는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 한 해 동안 재난 관리를 위해 경찰 헬기가 뜬 경우는 다 합쳐도 겨우 20차례에 불과했다.

화염병 처벌 특별법

화염병 기동 타격대는 1989년 화염병 처벌 특별법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화염병을 운반·제조·소지한 사람들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의 특별법은 아주 신속하게 국회를 통과했다. 노태우 정권은 1988년 말부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경찰력 강화를 강조하더니 1989년에는 화염병 관련자 처벌법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당시 노태우는 북방 외교를 강조하면서 냉전 해체와 화해 무드의 선두 주자임을 자처했지만,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은 강화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는 백골단을 동원해 식칼 테러를 벌이기도 했다. 화염병 처벌 특별법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탄생한 법이다. 이 법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학생들이 잡혀 갔다. 또한,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이한동은 지금 총리가 되어 화염병 처벌을 부르짖고 있다.

올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이 일정에 올라 있다. 남북 화해 분위기를 이용해서 탄압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1989년과 지금 상황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3월 9일 전국공안검사회의가 "남북 관계 진전에 따른 화해 분위기임을 감안하여 능동적인 대공 수사 체제를 확립해야 한다."고 결의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정일 답방 일정이 가까워질수록 남북 화해 분위기를 이용해서 저항 세력들을 탄압하려는 김대중 정부의 시도도 강화될 것이다.

누가 진짜 폭력 집단인가?

정부가 대우차 해고 반대 시위대의 화염병 시위를 폭력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역겨운 위선이다. 도대체 누가 진정한 폭력 집단인가?

대우차 노동자 1천751명과 그 가족들의 미래를 망가뜨리고 산산조각낸 것이야말로 잔혹한 폭력이다.

부평 공장이 가동된 3월 7일, 경찰은 공장까지 들어와 50명씩 떼를 지어 공장 구석구석을 감시하며 노동자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는 만행을 저질렀다.

해고된 노동조합 간부들이 노조 사무실에 출입하는 것조차 막고 아예 노조 사무실로 가는 식당의 출입구를 막은 것이야말로 폭력이다. 해고자들의 농성 장소였던 산곡 성당에까지 경찰이 난입해 신자들을 구타한 것이야말로 폭력이다.

젖먹이가 딸린 아기 엄마들을 수갑을 채워 연행하고 우유병까지 빼앗은 경찰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폭력 집단이다. 시위대를 잡으러 부평역 플랫폼까지 난입하고 닥치는 대로 불심검문하고, 방패로 눈을 찍어 한 시위자를 실명 위기에 빠뜨리고, 유인물만 들고 있어도 연행한 것은? 부평역 근처 식당에서 밥 먹고 있는 노동자들을 "현행범 체포"라며 무작정 잡아간 것은? 대우차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로 가득 차 있는 유치장에 알몸수색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이 모든 폭거를 저지른 김대중 정부와 경찰이야말로 폭력 집단이다.

체제 자체가 폭력적이다. 산업재해로 하루에 9명이 죽고 철거 용역 깡패들이 노점상들의 농성장을 짓밟는 것이야말로 폭력이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요구를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이다.

우리는 어떤 폭력인가를 제기해야 한다.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고 해고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막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휘두르는 폭력인가', 아니면 '생존을 지키기 위한 폭력인가'를 구분해야 한다.

동시에, 정리해고에 저항하기 위한 좀더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품어 볼 수 있다. 꼭 필요하지는 않은 화염병 시위가 효과적인 투쟁 방법이냐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3월 17일 민주노총의 뜬금없는 화염병 시위는 되레 행진 참가 인원을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방식은 일찍부터 정리해고를 저지하기 위한 공장 점거 파업을 회피해 온 데 대한 면피용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화염병을 들었냐 안 들었냐가 전투성을 가늠하는 주된 잣대가 될 수는 없다. 노동자들은 이윤 체제에 맞서 파업 투쟁을 벌이는 것이 더 효과적인 수단임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