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념은 김대중 정권 3년 동안 구조조정 정책을 앞장서서 집행한 자이다. 지난 1월 김대중은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일관되게 추진해 … 4대 부문 구조조정 작업을 마무리"하라며 그를 경제부총리로 재기용했다.  

진념은 1964년 경제기획원에 발을 들여놓은 정통 경제관료로 10년 동안 여덟 차례나 장관직을 맡는 바람에 직업이 장관이라 불릴 정도이다. 지난 노태우·김영삼 정권부터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그가 맡은 장관 자리만 동력자원부, 노동부, 기획예산위원회, 기획예산처 등 네 개나 된다.

그가 노태우 정권 때부터 계속해서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민중의 삶을 아랑곳하지 않는 냉혈함 때문이다.

진념이 동력자원부 장관을 맡았던 노태우 정권 당시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뛰어 올랐다. 진념은 '에너지 절약 대책'의 일환으로 전기 요금을 1991년 하반기에만 9.9퍼센트 올렸고, 매년 7∼8퍼센트 인상하는 정책을 폈다. 이뿐 아니라 시내·시외·좌석 버스 요금과 학교 수업료 등 각종 공공요금도 올렸다. 진념이 인플레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공공요금을 올리는 바람에 물가 당국인 경제기획원이 다시 공공요금을 하향조정할 정도였다.

노동법 개악 날치기

진념이 김영삼 정권에 다시 등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반노동자적 정책 때문이었다. 1994년 지하철과 철도 노동자들의 연대 파업에 혼쭐이 난 김영삼은 "노동 문제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아 노동부 장관 자리가 매우 중요하다."며 강경 정책을 펼 인물로 진념을 선택했다.

1995년 한국통신 노동자들이 파업을 선언하자 진념은 한통 노동자들이 농성하던 조계사와 명동성당에 경찰력을 투입했다. 그는 제3자 개입 금지를 매우 엄격히 적용했고, 공공 부문 파업에는 즉각 직권 중재를 했다. 이런 노력 때문에 그는 김영삼의 신임을 얻어 정권 말기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1996년 말 노동법 개악에도 진념은 톡톡히 한몫 했다. "국가경쟁력 강화와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 측면에서 반드시 올해 안에 이뤄져야 한다"며 '생리휴가 폐지', '정리해고제 도입', '변형근로시간제 도입' 등을 강력히 밀어붙였던 자가 바로 진념이었다.

진념이 "불법 파업을 할 경우 법질서를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협박했지만, 노동자들은 1997년 1월 거대한 파업 투쟁으로 맞섰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 대표 이홍구가 다급한 마음에 명동 성당에 있던 민주노총 지도부를 만나려 하자 그는 "정치권이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 궁색한 태도를 보이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초강경 자세로 일관했다.

노동자들의 대중파업에 밀려 신한국당이 정리해고제 도입을 유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정리해고제를 삭제하는 것은 노동법 개정의 의미를 퇴색케 하는 것"이라며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이 때문에 1997년 초 그가 직접 노동자들을 만나 설득하겠다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찾아갔을 때 노동자들은 "김영삼 정권의 하수인 물러가라", "노동악법 강행 주범 노동부 장관 방문 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며 그가 노동조합 사무실에 얼씬조차 못하게 했다. 그는 현대중공업, 인천 아남정공과 부평 대우자동차 노동자들한테서도 문전 박대 당해야 했다.

그렇지만 진념은 지배자들에게는 언제나 대환영을 받았다. 김영삼은 노동부 장관 자리뿐 아니라 부도난 기아차 문제도 진념에게 맡겼다. 선거 때마다 보수 정당들은 앞다투어 그를 영입하려고 추파를 던졌다. 노태우 정권의 14대 총선과 김영삼의 15대 총선 그리고 김대중의 16대 총선 때 그는 공천 후보로 올랐다.

위스키 한 병, 골프, 그리고 주식

많은 고위 관료들처럼 그도 병역을 면제받았다. 면제 사유는 질병이었지만 구체적인 병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1998년 기아자동차의 법정관리인이 됐을 때 그는 노동조합 대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나는 요즘도 위스키 한 병 정도는 거뜬히 해치운다."며 자신의 건강을 과시했다.

부도를 맞았던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이 몇 달째 월급과 상여금을 받지 못해 자녀들 유치원비와 분유 값을 걱정하자, 그는 뻔뻔스럽게도 "나도 경제가 어려워 맘놓고 골프도 못 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기아차에서 '월급 받지 않는' 회장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월급을 따로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의 재산은 공개된 것만 23억 원이 넘는다. 지난 1998년 한 해 동안에만 3억 원이 더 늘었다.

1999년에 주가가 크게 올랐을 때 그는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그의 부인 서인정(성신여대 총장)명의로 삼성전자(2백40주), LG정보통신(1천1백30주), 동부화재(1천4백60주) 주식 등을 매입해 2억 원의 평가이익을 올렸다.

기획예산처 장관 시절, 진념은 공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너무 많다며 '도덕적 해이'를 들먹였지만 당시 그가 쓴 행정 경비만 해도 9급 공무원 월급의 13배였다.

노동자는 죽이고 사장은 살리고

1964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뒤 장관에 이르기까지 그가 변함없이 간직한 생각은 철저한 시장주의였다. 그 스스로 "나는 기본적으로 시장주의자이면서, 기업주의자이다."고 말했다.

시장주의에 대한 그의 집념은 김대중 정권 동안에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김대중 정권 초기에 그가 맡았던 기획예산위원회는 공기업 민영화의 첨병이었다. 공기업 민영화로 수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공공 서비스 요금이 인상됐지만 그는 눈 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진념이 단행한 교원 정년 단축으로 약 2만 명의 교사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또한 그는 공공기관의 퇴직금 누진제도를 폐지해 임금을 삭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