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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 ― 재판조차 없는 사형

최근 몇 년 동안 30여 개국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실종되어 살해되었다. 지난 10년간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정부에 의해 실종되었다. ( 〈앰네스티 소식지〉 중에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은 우리 나라에서 가슴 아픈 사연이 가장 많은 단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민주화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하늘로 떠나 보내야 했던 그들은 열사들의 고귀함만큼이나 크고 긴 아픔을 안고 살고 있다.

더구나 죽음의 진실마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유가협은 지금도 계속해서 의문사 진상 규명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유가협에서 낸 《누가 이들을 죽게 했는가》는 1980년대 주요 의문사 사건의 자료집이다. 이 책에는 1980년대에 논란이 됐던 의문사 사건 경위와 수사 기관의 발표에 대한 의문점이 담겨 있다.

수사 기관은 의문사들을 대부분 자살로 규정하고 수사를 종결하곤 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자살의 동기는 대부분 사회 부적응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단순 자살이 아니라 국가 기관에 의한 타살일 가능성을 보여 주는 여러 정황들이 있다.

국가 기관에 의한 살해

첫째, 의문사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민주화나 반정부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국가 기관이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내창 씨(1989년 8월 의문사)는 중앙대 학생회장이었고, 김용갑 씨(1990년 의문사)는 속초 동우 전문대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학생회를 건설하려다가 살해됐다.

김상원 씨(1986년 의문사)는 경찰과 수사 기관의 권위적 태도에 항의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죽음을 당한 경우다. 평범한 시민이었던 그는 불심 검문 과정에서 연행돼 항의하다가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 김상원 씨의 죽음은 가족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5년 만에 진실이 규명됐다.

둘째, 여러 정황과 증거로 볼 때 상식적으로 그들이 자살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자살한 장소가 그들이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낯선 곳이라든가 자살의 방법이 초능력을 가지지 않고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김성수 씨(1986년 의문사. 당시 서울대 지리학과 신입생)는 강릉에 살다가 서울로 유학와 대학을 다녔는데 부산 송도 입구의 민간인 통제구역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허원근 씨(1984년 군대에서 의문사)의 경우는 자기가 머리에 총을 쏜 다음 바로 가슴에 총을 쏘고 죽었어야 정황이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머리에 치명적 총상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바로 가슴에다 총을 쏠 수 있을까? 권총도 아니고 M16으로 말이다.

신호수 씨(198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된 지 8일 만에 시체로 발견)는 날지 않고서는 올라갈 수 없는 동굴에서 목을 메어 자살했다.

그들이 죽은 시점 또한 의문 투성이다. 학생회장에 당선된 날 죽는가 하면, 보안사나 경찰 조사를 받은 지 얼마 후에 죽은 경우도 많다.

타살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증거가 뚜렷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박상구 씨(1987년 군대에서 의문사)는 음독 자살로 수사가 종결됐음에도 어깨 부위에 꽤 깊은 칼자국이 있었고 목을 조른 흔적도 있었다. 군 당국은 음독 자살 후 고통 때문에 스스로 목을 졸랐다고 해명했으나, 자신이 낸 상처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자국이 뚜렷했다. 또 시체에서 농약이 나온 것을 확인한 사람도 없었다.

셋째, 의문사 사건을 다루는 국가 수사 기관의 태도다. 자살 동기나 유서 등 자살의 증거가 분명치 않음에도 경찰은 사인을 자살로 처리하고 서둘러 수사를 종결하곤 했다. 그리고 중요한 증거물을 의도적으로 분실하고, 증거를 인멸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허원근 씨의 경우 부대 내에서 발견된 핏자국을 지워 버렸다. 신호수 씨의 경우에 경찰은 그를 연행한 후 바로 풀어줬다며 신씨의 친필 각서를 증거로 제시했으나 피해자 가족이 필적 감정을 의뢰하려 하자 경찰은 그 증거를 분실했다고 얼버무렸다.

경찰이 시체를 탈취하고, 가족에게 부검과 화장을 강요하는 일도 다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