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산드라 블러드워스(70)의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1992년에 쓰여진 그 논문은 자본주의 하에서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에 관한 급진적 여성주의(radical feminism) 측의 분석을 비판하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측의 대안적 분석을 제시했다. 당시 논문이 쓰여진 맥락 때문에 가정 폭력에 관한 논의가 많지만, 이 글의 주된 논박과 분석은 여성에 대한 다른 형태의 폭력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이하 여성 폭력)은 거듭 정치적 쟁점이 된다. 주로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모든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차별을 겪고, 그중 소수는 폭력의 피해를 입거나 심지어 강간당하는 일까지 있기 때문이다. 둘째,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폭력 문제를 부각시켜 왔기 때문이다. 셋째, 20세기 자본주의에서 성과 여성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특히 셋째 요인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전보다 많은 여성이 20세기에 임금노동을 하면서 여성들은 주체적 권리와 필요, 욕구를 지닌 존재임을 자각했다. 그러나 사회는 여성이 결혼 생활에서 누릴 권리를 거의 보장하지 않으면서 여성에게 현모양처를 기대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느끼는 모순은 더 커졌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서구 여성의 정체성과 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은 종전 후에도 결코 완전히 되돌려지지 않았다. 그전까지 남성 고유의 직종이던 일자리에 여성이 대거 진출하면서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경제적 자립을 누렸다. 1960년대의 “성 혁명”은 여성의 새로운 사회적 지위에 내포된 모순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노동시장으로의 진출, 피임 수단 확대, 여전히 제한적이지만 점차 쉬워진 낙태 덕분에 여성을 성적 주체로 보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는 그전까지 여성을 수동적인 주부로만 보던 것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이 성적 주체로 부각되면서, 전보다 더 노골적으로 여성의 몸을 섹스 수단으로 묘사하면서 악용할 수도 있게 됐다. 갈수록 대인관계에서 섹스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됐다. 또한 포르노나 성의 상품화가 증대하면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낡은 관념도 확산됐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여성은 광고나 포르노를 통해서든 성추행이나 강간을 통해서든 자신의 몸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불만이 있다. 이런 불만은 여성더러 가족이라는 짐을 기꺼이 떠안고 남편이나 애인에게 순종적인 아내나 연인, 어머니가 되라고 요구하는 사회와 모순된다.

이 글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제기한 쟁점과 분석, 해결책을 평가하고 성폭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가족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여성의 삶은 속속들이 변했다. 자본주의 생산과 산업혁명의 결과, 봉건적 가족 형태는 허물어졌다. 새로 산업이 생겨났고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다. 남성·여성·아이들은 공장·탄광·제분소 등에서 착취당했고 그에 따라 노동과 가족 생활은 분리됐다. 산업지구 빈민가 노동자들에게 가족은 더는 경제적 단위가 아니었다. 가족의 사회적 기능은 일부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자신의 권력과 부를 지키는 데에 가족은 여전히 중요했다. 또한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의 사망률을 낮추고 착취할 새 노동력인구를 기르는 방법으로 각자 가족을 통해 서로 보살피고 다음 세대를 양육하도록 했다.

한편, 노동자들은 고되고 긴 노동시간, 끔찍한 생활조건에 처한 가운데 가족 안에서 안식과 애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끌렸다. 그래서 봉건제와 달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은 결혼을 상대방에게 느끼는 애정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계약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족이 여성과 남성의 삶을 조직한다. 가족은 여성 차별을 유지하고 또 강화한다. 여성과 남성이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가족을 꾸리더라도 둘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다.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대부분 떠맡는다. 심지어 집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여성은 다른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보조하고 그들에게 애정을 줘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반면 남성은 여성보다 더 많이 생계비를 벌어들임으로써 ‘가장’이 된다. 남녀 임금 격차 때문에 개별 가족 수준에서 이런 불평등을 바로잡기란 쉽지 않다.

이런 가족 내 분업은 남성 지배의 산물이고 남성은 거기서 득을 본다는 여성주의적 설명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분업으로 득을 보는 것은 지배계급(남녀 불문하고)이다. 왜냐하면 현재와 미래의 노동력인구를 돌보는 비용과 수고를 노동자 가족에 떠넘기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은 임금노동과 가사라는 이중의 굴레를 쓰게 된다. 여성은 가족 안에서 남편에게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직장에서는 노동자로서 착취와 여성 차별을 겪는다. 남성도 착취를 당하지만, 성차별을 겪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가족에 부합하는 성 역할은, 남성은 강하고 능동적이고 여성은 온화하고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교육기관, 대중매체, 오락·여가 활동 등을 통해 사회 곳곳에 스며든다. 누구도 이런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핵가족’에 속하든 아니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자녀가 있든 없든 말이다.

현실의 노동자 가족은 생계를 위해 장시간 노동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양질의 보육시설 부족으로 사회 생활에 제약을 받는다. 이런 현실은 가족이 장밋빛 행복을 제공한다는 이상과 들어맞지 않는다. 이처럼 남녀가 평등하지 않고 가족의 존재가 부추기는 환상과 현실이 모순을 빚으므로, 가족은 불만과 억압이 만연한 곳이 된다.

여성의 몸을 섹스 수단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여성에게는 남성의 성욕을 채워 줄 의무가 있다는 낡은 관념을 부추긴다. 그런데 이런 관념은 단지 남성만이 가진 것은 아니다. 여성도 이런 관념을 내면화해, 남편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자책하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 폭력의 만연

계급 사회의 역사 내내 여성은 남성에 의한 폭력에 시달렸다. 자본주의는 여성과 남성의 삶을 속속들이 바꿨지만, 여성 차별은 계급 차별과 마찬가지로 사라지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생산과 분리됐지만, 생산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20세기를 거치면서 오늘날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가족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전체 가족의 3분의 1만이 남편과 아내, 자녀들로 이뤄진다. 다른 한편, 더 많은 여성이 임금노동을 하게 되고 경제적 자립을 맛본다. 이 변화는 1960년대에 여성 해방 운동이 성장하는 배경이 됐다. 여성 해방 운동은 성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과 더 효과적인 피임법·낙태법과 이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다. 그 덕분에 섹스가 결혼·출산과 별개로 여겨질 수 있었다.

모성에 대한 태도도 극적으로 변해 왔다. 20세기 후반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절반이 채 안 되는 여성만이 어머니가 되는 일을 제대로 된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결혼 관계 밖에서 태어난 아이가 1987년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18퍼센트까지 증가했다. 1인 가구에 속한 인구가 1986~87년 전체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런 변화들은 여성을 해방시킬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를 현실화하지 못하고, 여성은 여전히 천대받는다. 현실의 이런 모순 때문에 여성 폭력을 둘러싸고 논의가 활발해졌다.

현대 여성주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 초기 저작들은 여성 폭력 문제를 전혀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시몬느 드 보부아르(1908~1986)가 《제2의 성》(1949)을 통해 남녀 간 성적 관계는 모두 폭력을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첫 경험은) 소녀를 성인으로 만드는 폭력 행위”라고 주장했고, 남성이 여성을 “취한다”거나 여성이 “침해당한다”거나 여성이 남성의 성적 요구에 “굴종한다”며 양성 불평등 관계를 강조했다. “이 세계는 언제나 남성들만의 세계”였고, “여성은 인류라는 종(種)의 먹이였다”는 것이다.

1975년 출판된 수전 브라운밀러의 《성폭력의 역사》(일월서각, 1990)는 이런 종류의 분석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일조했다. 브라운밀러는 강간이 “모든 여성을 공포 상태로 묶어 두기 위한 모든 남성의 의식적인 위협 과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들은 영향력을 얻었고, 때때로 모든 여성 차별 행동을 싸잡아 ‘폭력’이라고 했다. 여성을 희롱하려고 휘파람을 불거나, 여성 차별적 농담을 하는 따위의 행위도 여성 폭력(경미한 폭력부터 강간·구타에 이르는)이 일어날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을 모두 같은 것으로 뭉뚱그리는 것은 각 행위의 구체성을 무시할 뿐 아니라, 여성 폭력을 양산하는 사회적 관계들을 규명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브라운밀러의 책은 심각한 이론적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제쳐두더라도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폭력이 대부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오늘날 공인(共認)된 사실이다.

여성 폭력, 특히 가정 폭력이 몹시 강조되는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1970년대까지 여성주의자들조차 가정 폭력이나 부부 강간을 다루길 꺼렸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여성이 자기 방어를 하거나 외부의 도움을 구하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오늘날 비판하는 바로 그 관념들을 당시에는 여성주의자들도 일부 받아들였던 것이다. 브라운밀러는 자신이 1970년 강간에 대한 어떤 논의 과정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강간은 여성주의 쟁점이 아니”라고 여겼었고, “여성 운동은 강간 피해자들과 함께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봤었다고 술회했다. 심지어 낙태제한법 폐지 운동을 이끈 여성운동가 비어트리스 파우스트도 1977년 이렇게 말했다. “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하길 원하는 것처럼 행동해서 [여성이 강간을 자초한다는] 생각을 부추긴다. 엉덩이만 겨우 가리도록 치마 길이를 줄이고, 유두가 비치는 옷을 입고 나간다. 남성과 술을 마시거나 둘이서 차를 타고 으슥한 곳으로 가서 심지어 옷을 벗는 등 섹스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으로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잠재적으로 섹스를 수반한다는 것을 인정하길 거부하다 결국 자연스럽게 빠져나오기 힘든 처지에 빠진다.”

여성 폭력을 은폐하는 가족 이데올로기

미국 여성주의자들은 심지어 1980년대에 들어서도 부부 강간 문제 다루길 꺼렸다. 오늘날 여성주의자들은 “우리가 무엇을 입든, 어디를 가든 예스(yes)는 예스이고 노(no)는 노이다” 하고 옳게 주장하는 데 반해, 초창기 여성주의자들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행되는 여성 폭력이 은폐됐던 것은 가족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을 삼가야 한다는 가족의 가치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가족은 사생활의 공간이고 사랑의 보루라는 것이었다. 가족은 “남성의 안식처”이고, 남편이 아내에게 섹스를 요구하면 아내는 언제든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도 오스트레일리아 주(州)들은 대부분 부부 강간을 인정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부부 사이에는 강간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다이애너 러셀은 1천 명이 조금 못 되는 미국 여성들을 인터뷰하면서, 여성이 자기 남편이 행한 강간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러셀은 강간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말고 그 대신 “당신은 남편과 원치 않는 섹스를 가진 적이 있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남편에게 강간당한 여성 87명 중 오직 6명만이 “살면서 한 번이라도 강간을 당했거나 당할 위험에 처한 적이 있습니까?” 하고 처음에 물었을 때 그렇다고 답했다. 그 여성들은 거의 다 자신이 성적으로 학대당했다고 생각했지만 강간을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대”라는 것도 주관적인 평가다.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은 다른 남성이 자신에게 했다면 학대로 여길 행동도 남편이 하면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복지의 부족과 까다로운 이혼 법률도 학대당한 여성이 가족을 떠나기 어렵게 만들어, 가정 폭력이 은폐되는 데 일조한다. 다이애너 러셀이 조사한 여성의 21퍼센트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한 적이 있고, 26퍼센트는 원치 않는 섹스를 한 적이 있었다.

하층민일수록 그리고 가난할수록 폭력에 더 시달린다는 점으로 미뤄 볼 때, 1970~80년대 여성 운동을 주도한 중간계급 여성들은 그 같은 가정 내 학대를 몸소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진정한 질문은 여성주의자들이 가정 폭력 문제를 끌어안기까지 왜 그토록 오래 걸렸느냐가 아니라 왜 오늘날 그 쟁점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느냐는 것이다.

여성 폭력에 기울이는 사회적 관심

먼저, 여성주의에 관한 선입견 하나를 바로잡아야 한다. 바로 ‘성 인지 관점이 없는 구태의연한 구좌파들’에 맞서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의 권리를 옹호해 왔다는 선입견 말이다. 모든 여성주의자들과 대부분의 좌파는 여성주의만이 여성 차별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트로츠키 등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 차별 문제를 중요한 사회 문제로 봤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여성 차별을 없애기 위해 러시아 혁명 직후 공공 보육시설, 공공 세탁소, 공공 식당 등을 도입하고 여성을 해방시키고자 전례 없는 사회적 실험을 실시했다. 오스트레일리아만 보더라도 1920년대 공산당을 창당한 카타린 수잔나 프리처드의 경우,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여성 폭력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줬는데, 이는 여성주의자들보다 수십 년 앞선 것이었다.

프리처드는 자신의 소설에서 젊은 여성에게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과 여성 폭력을 참고 살라는 가족의 압력을 묘사했다. 한 등장인물은 자신의 남편이 행한 폭력을 두고 시어머니가 보인 태도를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그녀는 내가 멍든 것을 보고서 결혼은 처음에는 역겨운 일이지만 차차 익숙해질 것이라고 말했어. 그리고는 내가 남편에게 더 잘해야 한다는 거야. 남편은 나한테 홀딱 빠져 있다고. 나를 모욕하는 게 나를 위한 것일까? 나는 그에게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어. 그러나 그이의 행동 때문에 이제 나는 그가 역겨워.”

이 대사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후대 연구들이 관심 갖는 쟁점도 말하고 있다. 바로 여성에게 결혼은 별로 기대할 게 없고 심지어는 역겹기까지 하지만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1960년대에 여성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좌파가 여성 차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여성 폭력을 둘러싸고 논의가 활발해진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일하는 여성이 늘면서 여성들이 대인관계에서 기대하는 바가 높아진 것이다. 자립 능력이 상대적으로 많은 여성들은 자신감이 더 높고, 또 원치 않는 관계를 청산할 여지도 더 많다. 그래서 전과 달리 학대를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퀸즈랜드 가정폭력 대책위원회’가 만난 여성의 80퍼센트는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집을 떠날 수 있었다. 미국의 한 연구는 폭력을 당한 여성의 75퍼센트가 집을 떠났다고 보고했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비교적 자립 능력이 떨어지는 사춘기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조사한 미국의 연구도 그들의 대다수가 자신을 향한 공격을 막고 강간을 피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남자친구가 성폭력을 자행했을 때 여성의 3분의 2는 그와의 관계를 바꿨고, 그중 87퍼센트는 남자와 헤어졌다.

이혼하기 쉽도록 법이 바뀌고, 이어 부부 강간이 범죄로 인정되자 여성이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하기가 더 쉬워졌다. 비록 여전히 쥐꼬리만 한 복지였지만 그래도 학대당할 때 집을 떠날 여지를 부분적으로 만들어 줬다. 여성이 학대당하면서도 가족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나 여성이 자신을 탓하는 등의 이데올로기를 드는 연구들이 많다. 그러나 개별 여성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경제적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 요인과 이데올로기적 요인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물질적 조건이 변하면 새로운 관념이 기반을 잡고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된다.

여성 운동의 후퇴

이런 요인들은 1970년대에 일어난 여성 운동의 변화와 맞물렸다. 여성 운동이 여성을 투사로 독려하던 계급 정치에서 멀어지고 그 대신 여성을 피해자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헤더 맥그리거와 앤드류 홉킨스는 급진적 여성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점차 늘고 있는 중간계급 전문직 여성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이렇게 쓴다. “이 중간계급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계급이 아니라 젠더[사회적 성별]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여성 해방 운동은 초기 사상가들이 계급에 관심을 가졌던 것에서 빠르게 벗어나 사회주의 정치나 좌파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모든 남성에 의한 폭력’ 이론을 주창한 브라운밀러가 이런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브라운밀러의 책이 원용하는 범죄 통계에서 주로 다루는 강간 형태인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고 하층 계급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브라운밀러는 좋게 봐야 부조리하고 나쁘게는 엘리트주의적이고 노동자 계급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힌 결론을 내렸다. “강간은 멍청하고, 거칠고, 흉측한 행위이고 이를 저지르는 것은 불량 청소년과 그 사촌형들이지, 매력과 위트 그리고 바람기 있는 난봉꾼이나 ‘정상적’으로 성욕을 배출하지 못한 소심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생각 없고, 폭력을 일삼고, 하는 짓이 뻔한 청소년들의 어깨 위에 수백 년 동안 전수된 역사적 임무가 얹어져 있다. 바로 폭력을 동원해 여성에게 남성 지배를 강요하는 것 말이다.”

강간이 보편적 인간관계의 일부라는 브라운밀러의 엄청난 주장에 비춰 볼 때, 그가 근거로 제시한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 통계가 특정 계층에 집중된 이유를 두고 그가 한 설명은 실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범죄와 폭력이 발생하는 진정한 사회 부조리에 그가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범죄율에 관한 많은 연구들은 강간이 소외된 폭력적 행동의 여러 양상의 하나로, 특히 빈곤하고 불우한 지역 청년들이 많이 저지른다고 보고한다. 브라운밀러가 근거로 제시하는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이 만일 강간의 가장 흔한 형태라 하더라도(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그로부터 내릴 결론은 모든 남성이 강간에 공모한다는 것이 아니라, 강간이 불우한 청년들의 폭력 성향의 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 돼야 한다. 브라운밀러의 분석이 이처럼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 데이타를 중심으로 했는데도, 여성주의가 계급에서 멀어질 때 그의 주장이 선도적인 구실을 했다는 것은 실로 역설적이다.

강간은 섹스와 무관하다?

브라운밀러는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강조하면서, 강간이 섹스와는 아무 관계 없는 단순한 폭력일 뿐이라고도 단언했다. 그런데 이 주장도 오늘날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강간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강간은 세 종류로 구분된다. 즉, (지인에 의한)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 이 상이한 형태 각각을 살펴봐야 한다.

① 데이트 강간

미국에서의 한 연구는 1978년~81년 3년간 청소년 여성의 7~9퍼센트가 강요된 성적 행위를 경험했다고 보고했다. 그 연구는 강요된 성적 행위를 강압이 동반된 모든 성적인 행위를 모두 포함시켰다. 성적인 신체 부위를 만지거나 강압 수단으로 언어를 동원하는 것부터 무기를 동원하는 것까지 포함했다. 이런 광범위한 정의를 기준으로 봤을 때 그 연구는 강요된 성적 행위가 벌어지는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 사례들을 조사한 결과, 많은 경우는 남성이 여성에게 섹스를 하자고 압박하는 전형적인 데이트 시나리오를 따랐음을 시사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말을 통한 압력만이 수단으로 동원됐고, 높은 비율로 [섹스에] 실패했다.”

미국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미즈〉지의 설문조사를 보면(1988년) 데이트 강간 또는 데이트 강간미수를 겪은 여성 네 명 중 한 명은 자신이 강간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사 여성의 절반가량은 다시 같은 남성과 섹스를 했다. 그리고 설문에 응한 남성 가운데 8퍼센트는 여성에게 섹스를 강요한 적이 있었는데도 그들의 75퍼센트는 자신이 여성에게 원치 않는 섹스를 강요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답했다. 이는 남성과 여성이 섹스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것과, 남녀 불평등이 가장 내밀한 관계에도 영향을 미침을 보여 준다. 그래서 여성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이 자신을 강간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거나, 심지어 강간이 일어나도 이를 알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만일 그와의 섹스를 거부하면 그가 더는 자신을 만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여성은 남성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관념(오늘날 혼전 섹스에 대한 금기가 허물어지면서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크다) 등이 여성을 압박한다. 게다가 TV와 영화 때문에, 섹스를 갈망하지 않는 젊은 남성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것이라는 인식도 광범하다. 이런 온갖 모순된 감정과 생각, 성에 대한 지식 부족, 경험 미숙이 뒤섞이면서 상호 신뢰가 무너지고 강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강간이 섹스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브라운밀러의 주장은 오늘날 청년들 사이의 성적 관계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날 청년들은 섹시하지 않거나 섹스에 응하지 않는 여성은 무언가 결함이 있다는 관념에 거듭 노출된다. 젊은 남성들은 여성에게서 섹스를 쟁취해야 하고, 세심함과 배려는 겁많은 여성에게나 중요한 것이라는 이미지와 메시지를 영화·TV·책·신문을 통해 보고 듣는다. 분명히 연인이나 지인에 의한 강간이나 강요된 성행위는 우리가 원하는 섹스 상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의 현실은 그렇다.

②부부 강간

그저 폭력에 불과한 게 아닌 경우가 흔한 또 다른 형태의 강간은 부부 강간이다. 앞서 봤듯이, “성 혁명” 당시의 여성주의자들조차 공개적으로 다루기 어려워했던 이 주제를 공산주의자 프리처드가 다룬 바 있다. 다음은 프리처드가 쓴 소설의 한 부분이다.

그의 머리가 그녀의 목을 덮쳤다. 그는 굶주리고 화난 입술을 통해 그녀의 팔과 가슴을 애무했다.

“그렉!” 엘로디는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애썼다. 그는 육중하게 누르며 힘으로 그녀를 제압했다. “제발, 제발 하지 마요. 나는 당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그는 거칠게 웃으며 거리낌없이 그녀의 저항을 물리쳤다. 그녀가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힘없이 쳐지자 그는 다시 부드럽게 변해서 그녀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엘로디, 엘로디 내 사랑.”

… 그녀가 반응하기보다는 고통 속에 헐떡이자 그는 괴로움을 느꼈다. 한눈에도 그녀는 안타까울 정도로 슬퍼 보였고 무언가에 압도돼 겁에 질린 듯 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엘로디? 왜 그래, 내 사랑?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거 알잖아.”

이 대목은 남편이 아내를 소유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겪는 혼란을 다룬 것이다. 두 등장인물은 서로 몹시 사랑했고 자녀들을 사랑으로 대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점차 개인적 친밀감에서 멀어졌다. 엘로디는 그 시대 다른 아내들처럼 아이들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책임감을 느꼈고, 이 끔찍한 일을 겪은 뒤에도 그와 계속 살았다.

1982년 다이애너 러셀이 여성들에게 남편·애인과의 성관계에 대해 조사하면서 얻은 답변들을 봐도, 섹스와 폭력, 동의와 거부를 구분하는 것이 때때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과 원치 않은 섹스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여성은 이렇게 답했다. “결혼한 상황에서 그것은 참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에요. 자기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칼같이 구분하기가 어렵거든요. 하기 싫다고 다 관두고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또 다른 여성은 이렇게 답했다. “한 경우는 그거[강요된 섹스]라고 부를 수 있을 거에요. 다른 경우는 반반이었어요. 처음과 같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남편이 자기 의사를 내게 강요한다고 느꼈거든요. 내 생각에 그 차이는 남편이 섹스를 원하는데 내가 원치 않으면 그가 밀어붙이는데 그가 화를 내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나한테 나쁘게 구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그의 방식인 거죠.”

많은 경우 아내는 남편의 섹스 요구를 결혼한 사이여서 거부할 수 없다고 여기고, 그 때문에 남편은 자신이 한 번도 아내를 강간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물론 자기 아내의 성적 의사를 신경쓰지 않는 그런 남편의 행동은 배려심 부족하고 조심스럽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원치 않는 성행위’(많은 경우 여성은 그것을 강간으로 여기지 않았고, 또 자신이 수용했으므로 강요된 것도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에 특별히 이런 표현을 썼다)가 섹스와는 아무 관계 없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의 부부가 일상적으로 안고 사는 심대한 불만을 눙치고 넘어가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오직 소수 여성만이 성폭력을 겪고 소수 남성만이 성폭력을 자행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고 긍정적인 잠재력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섹스를 포함한 모든 것을 금전 관계로 전락시키려 하지만 남성과 여성 모두 그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계급 분석은 성폭력과 무관한가?

범죄 통계는 경찰에 신고되는 강간이 빈곤층에 집중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신고율이 낮은 가정 폭력을 포함한다면 실제 양상은 훨씬 더 복잡하다. 물론 모든 계급의 남성이 여성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고 결혼을 아내를 통제할 권리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양성간 불평등이 모든 계급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적 학대가 정말로 사회집단에 따라 다른 빈도수로 나타나는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1970년대 말 이후 계급 정치에서 후퇴하는 경향 때문에 (여성주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학계와 심지어는 일부 좌파들까지 그랬다) 각종 연구는 계급과 무관하다는 것에 압도적으로 집중돼 있다. 이때 사용된 한 가지 방법은 엉터리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 뒤 그것을 반박하는 것이다. 여성주의 운동가인 조슬린 스콧은 자신의 연구가 “아동학대의 원인이 오로지 무력감과 좌절 때문이라는 이론을 반박했다”(강조는 나의 것) 하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박이 아니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가족 내 학대를 그런 식으로 조야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설명이라면 무엇보다 어째서 주로 남성이 여성을(그 반대가 아니라), 또는 성인이 아동을 학대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젠더와 아동에 대한 태도, 가족의 구실 등을 모두 설명하려 한다.

또 다른 구절에서 스콧은 “실업은 필연적으로 아내 구타를 늘린다”(강조는 나의 것)는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을 반박했다고 쓴다. 그러나 그가 반박했다는 주장은 사실, 반박이 필요 없을 정도로 기계적이고 어처구니없어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 전혀 관계 없다. 오히려 여성이 폭력적인 가정을 떠나는 것이 실업 때문에 좀 더 어려워지고, 그래서 살림살이가 나은 여성보다 폭력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스콧의 주장이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에 가깝다. 그러나 스콧은 경제적 압력이나 낮은 생활수준, 억압적 직장 생활에서 오는 불만과 무력감 등이 미치는 영향을 한사코 기각하려 한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더 높은 사회경제 계층 남성이 남성 지배 사회의 메시지를 하층계급보다 더 많이 내면화하므로 더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콧의 분석은 일관되지 못하다.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지배자다. 그리고 지배자는 권력을 휘두른다”는 그의 주장은 다른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스콧은 가족 내 여성에 의한 아동학대 문제를 거론할 때는 여성이 집에 갇혀 있고 도저히 대처할 방법이 없다고 느끼는 압력, 경제적 스트레스 등을 요인으로 거론한다.

리즈 오어 등이 발표한 연구보고서 《가정 폭력》(1991)은 서문에서 계급 개념을 기각하지만, 정작 내용에서는 역사적으로 차별받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공동체에서 여성 폭력이 훨씬 더 많이 자행된다고 쓰고 있다. 오어는 계급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기각하면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원주민 공동체 내 폭력은 식민 지배라는 백인 남성의 역사가 낳은 문화적 종속과 정신적 박탈이 야기한 극단적으로 가혹한 환경 때문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같은 연구보고서에서 다이앤 커크비도 계급이나 사회경제적 요인은 중요하지 않다고 거듭 강조해 놓고서는 이렇게 쓴다. “일부 원주민 공동체에서는 가정 폭력이 너무도 심각해 90퍼센트의 가정이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백인 식민 지배의 결과임을 시사한다.”

즉, 이 연구자들은 그런 여성 폭력이 “식민 지배”, “문화적 종속”, “정신적 박탈”의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사회경제적 요인은 그런 폭력과 전혀 관계없고 계급 이론은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식민주의”를 제국주의나 계급 사회와 전혀 무관한 것인 양 다루지만, 그들의 발견, 즉 그런 요인들이 여성 폭력을 키운다는 것은 오히려 계급 분석만이 남녀 불평등 문제를 온전히 다룰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연구들이 갖는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분석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비판한다는 것이다.

남성 권력이 핵심 문제인가?

커크비는 또, 가정 폭력이 다른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충돌과 달라, 남녀 간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라는 점에서 볼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인관계에서 벌어지는 충돌이 모두 폭력을 부르는 것도 아니고, 가족 안에서는 충돌이 없는 경우에도 폭력이 자행된다는 것이다. 커크비가 이런 차이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대당하는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기”보다는 가족 자체를 지키는 것에 치중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성 폭력 문제의 출발점은 언제나 여성이 겪는 경험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편, 리즈 오어는 원인을 제공하는 인과 요인과 사건 발생에 영향을 끼치는 기여 요인을 구분하면서, 계급적 박탈감은 여성 폭력에 기여할 수는 있지만 원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둘을 억지로 구분하는 것은 순전히 오직 남녀 간의 불평등한 관계만이 원인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무엇인지 찾으려 할 때 이런 관점은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왜 다수 남성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남녀간 불평등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 연구자들이 다루는 원주민 공동체의 열악한 상황을 설명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내 이들은 젠더 말고도 다른 요인이 있다고 인정한다. “가정 폭력은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 불균등하게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가정 폭력에 대한 여성의 반응은 분명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 다르다. 높은 지위의 여성은 낮은 지위의 여성보다 폭력적 관계를 더 짧은 기간 감내하고, 그런 관계에 처하는 횟수도 적다. 반면에 실업에 처했거나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는 여성은 폭력적 관계를 더 오래 감내하고 더 자주 폭력에 시달린다.”

다시 말해, 커크비의 주장대로 여성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하더라도 경제적 요인 등이 피해자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커크비 자신도 “전업 주부인 여성이 학대를 더 많이 당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인정했다.

우리가 진짜로 다뤄야 할 것은 다양한 경제·계급 상황이 어떻게 여성 차별 일반과 맞물리느냐는 것이다. 커크비와 오어는 “남성 권력”이 핵심이라고 강조하지만 정작 여성의 경험은 전혀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족 안에서 긴장과 갈등이 벌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족이야말로 여성 차별의 발원지라는 논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남성 권력”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지지하지 않고, 대신에 단지 남성에게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데에 치중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해서 심지어 무원칙한 동맹을 맺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아주 모호한 결론만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여성 폭력은) 모두 나이·계급·인종을 초월해 벌어지고, 다만 사회적·문화적 영향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진다.”(리즈 오어)

얀 홀스퍼는 《현존하는 과거》라는 책에서 가부장제 이론으로 성폭력을 이론화하려 했다. 몇몇 주요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그는 폭력에 대한 단순한 기술(記述)을 넘어 왜 폭력이 발생하는지 규명하지는 못한다. 특히 여성 폭력의 구조적 원인을 다루겠다고 한 부분도 사실상 현실을 기술하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프로이트와 그 밖의 다른 이론들을 동원해 남성과 여성 젠더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하려 하지만, 그때조차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두 부모 가정에서 자란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혼과 재혼 때문에 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전체 가족의 3분의 1만이 두 부모 가족이다. 게다가 개발도상국에서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기숙하면서 그런 종류의 가족을 아예 경험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처럼 홀스퍼는 협소하고 심리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으므로 근본적인 문제를 볼 수 없다. 바로 자본주의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사회 공공시설을 갖추지 않고 그 부담을 모두 여성에게 떠넘기고, 가족 이데올로기가 이를 정당화한다는 것 말이다. 이에 따라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교육, 대중매체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것으로, 그 저변에는 여성을 상대로 한 물질적 차별이 깔려 있는 것이다.

홀스퍼는 책 서문에서 “과연 우리가 말하는 일관된 체제, 즉 ‘가부장제’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고, 여성을 학대하는 남성은 여성 폭력으로 “명백히 득을 본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게다가 어째서 “여성을 학대하지 않는 남성도 같은 영역에서 폭력적인 수단 없이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 대신 사회가 공적인 “남성” 영역과 사적인 “여성”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고 보는 온갖 설명들만 제시한다. 노동조합이나 직장을 노동자 계급 남성들이 “남성 간의” 연대를 경험하며 “공공영역에서 일부 권력을 행사하는” 곳으로 치부한다. “그 결과 여성은 가족에 관해서든 임금노동에 관해서든 공적 영역에서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노동인구의 40퍼센트가 여성인 오늘날의 현실에 비춰 봤을 때 터무니없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 남성들이 그렇듯이 직장이야말로 잠재적으로 여성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홀스퍼가 언급조차 하지 않는 노동조합 투쟁 속에서야말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연대가 이뤄질 잠재력이 가장 크고 그런 연대만이 여성 차별과 여성 폭력을 끝장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혼란은 더 대중적인 글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멜버른의 한 대학교 출판부가 내놓은 소책자는 여성 차별이 “지배계급 남성에 이익”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여성 차별이 지배계급 여성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함축돼 있다. 그러나 여성 차별에 만만찮게 도전하려면 차별을 낳는 계급 사회를 공격해야 하는데, 역사를 보면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지배계급 여성은 차별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배계급의 남성을 도와 그런 도전을 꺾으려 했다.

포르노가 강간을 부추기는가?

지금까지 이 글은 자본주의가 성과 계급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삶을 다르게 조직하는 것에서 여성 폭력이 비롯한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러면, 포르노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포르노는 성폭력의 원인인가? 수전 브라운밀러, 안드레아 드워킨, 캐서린 맥키넌 등 일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조슬린 스콧은 한 대학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포르노 때문에 더 많은 폭력이 양산되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그에 대한 명료한 답은 영원히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포르노를 폭력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언론에서 강간 문제를 여성 차별적으로 다루는 것에 반대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운동단체인 ‘성폭력 선전에 반대하는 동맹’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성폭력 선전과 성폭력 사이의 인과관계를 찾지 않는다. 성폭력 선전 자체를 성폭력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포르노가 유난히 폭력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문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포르노의 90퍼센트는 강제성 없는 일상적인 성행위를 묘사할 뿐이다. 〈플레이보이〉의 폭력 수준은 1977년 이래 계속 줄어 이제는 어린이 만화보다도 낮은 수준이 됐다. 연구자들이 보고하는 포르노의 최대 문제점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포르노는 자본주의 하에서 메말라 버린 성적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지, 그 원인은 아니다. 포르노 산업이 급성장한 것은 앞서 서술한 사회 변화의 결과였다. 즉, 젊은 세대는 성에 관한 이미지가 넘쳐나는 분위기에서 자라지만 정작 성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호기심이나 심지어 진정한 인간관계의 대용물로 포르노를 찾는다.

실험 결과 섹스 영화는 남성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남성이 폭력적 강간물을 보고 공격성이 커지는 경우는 영상 속에서 강간당하는 여성이 그것을 즐기거나 아니면 시청자가 그 여성에게 분노를 느끼도록 내용상으로 유도됐을 때였다. 이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 자신은 이를 근거로 포르노를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렸지만, 사실 이 연구 결과는 사뭇 다른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현실의 많은 여성들은 성폭력 시도를 중간에 차단한다. 또, 성폭력을 즐기지도 않는다. 이처럼 포르노 속 허구의 여성과 현실의 여성을 구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 차이가 수동적인 포르노 시청자와 능동적인 강간범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여성은 남성이 자신에게 하려는 행동을 제어하려 하고 대체로 남성들은 그에 반응한다. 포르노를 보여주고 남성의 반응을 살피는 연구는 방법상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는데, 바로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은 배제한 채 단순하고 행동주의적인 자극-반응 모델로 인간을 파악하려 든다는 것이다.

포르노를 폭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스콧은 포르노가 등장 여배우들을 부당하게 이용한다는 점을 말하려고 포르노를 폭력이라고 불렀다. 그 동기는 공감할 만한 것이지만, 포르노가 폭력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만일 포르노 산업에 고용되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면 그것과 구타·강간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만일 성매매와 강간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다면 성매매 여성은 자신을 강간범에게서 지킬 수단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성 폭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마르크스주의는 어느 사회든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에 따라 모든 사회관계들이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생산을 실제로 수행하는데도 생산수단을 전혀 지배하지 못한다. 그 대신 노동자의 노동력은 상품으로 거래된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된다. 노동력뿐 아니라 여가와 섹스도 포르노, 광고업, 성매매 등의 형태로 상품이 된다.

본디 노동은 창조적이고 삶을 다채롭게 해 주는 것이지만 자본주의 하에서는 따분하고, 또한 우리를 지배하는 자들을 위한 부를 생산하고 그들이 우리를 지배할 힘을 키워 주는 것이 됐다. 마르크스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사물의 세계에서 가치가 생기는 만큼 인간 세계의 가치는 떨어진다.” 그래서 노동자가 만든 생산물은 노동자가 지배할 수 없고 오히려 노동자를 위협하는 그 무엇, 즉 노동자가 낯설게 여기고 두려워하는 대상이 된다. 이런 상황을 소외라고 한다.

그 결과 노동자의 삶은 그가 지배하지 못하는 노동 생산물에 압도된다. 노동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는 과정이 아니라 고되고 단조롭고, 자본이 사회를 지배하는 수단이 된다. 노동은 더는 자발적이지 않고 강요된 것이고, 그 자체로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노동이 소외됐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물리적·외부적 강압이 완전히 사라지면 노동자가 그 즉시 노동을 마치 전염병이라도 되는 양 피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

본래 노동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들어 주는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것이다. 이런 노동에서 소외됨으로써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서도 소외된다. 포르노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섹스는 진정한 인간관계의 일부가 아니라, 수동적인 익명의 시청자를 위한 소외되고 대상화된 형태로 묘사된다. 마치 자본주의 하 여성과 남성 삶의 다른 측면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왜 폭력의 가해자가 남성이고 여성은 피해자인 경우가 많을까? 양성간 불평등한 관계가 주된 이유라는 것에는 마르크스주의자와 여성주의자가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폭력은 남성이 남성을 상대로 자행한다는 것도 지적해야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고 낙담해서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수동적이고 냉소적이 된다. 노동자가 느끼는 무력감은 그들이 착취당하고 실제로도 권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객관적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는 자본의 지배와 함께 자본주의의 지배적 관념도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 남성과 여성이 여성 차별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급진적 여성주의가 주장하듯 남성에게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무슨 사악한 욕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노동조합 결성과 파업 같은 계급적 행동을 낳기도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다른 노동자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성 차별과 인종 차별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손쉬운 공격 대상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이주민이나 이주노동자가 실업의 책임을 엉뚱하게 뒤집어쓰거나, 열등해 보인다는 이유로 손쉬운 공격 대상이 된다. 이를 두고, 공격하는 노동자가 이주민이나 이주노동자에게 “권력”을 행사한다고 보는 것은 현실을 완전히 거꾸로 보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폭력은 권력을 갖지 못한 상태, 즉 소외가 낳은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공격하는 것과 지배계급(남녀 불문하고)의 행위를 대조하면 권력을 갖지 못해서 벌어지는 행위(=소외에서 비롯한 행위)와 진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사용자들은 더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여성 노동인력을 사용하려고 노골적으로 여성을 차별한다. 여성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수치심을 느낄 작업 과정을 도입하기도 한다. 유력 언론사들은 여성 차별 이미지를 퍼뜨린다. 잘나가는 중간계급과 지배계급에 속한 여성, 여성 해방에 적대적인 여성, 상업적 여성 잡지 편집자를 맡은 여성 등은 여성 차별을 적극적으로 조장한다.

직장에서 천대받고 사회적 권력은커녕 삶에 대한 선택권조차 거의 누리지 못하는 남성이 행사하는 폭력과 지배계급이 이윤을 목적으로 여성 차별 사상을 부추기는 행위를 동일시해서는 사회적 권력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분석으로는 사회를 이렇게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잘못됐다.

모든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소외를 겪지만, 각자가 가진 사회적 권력에 따라 소외의 구체적 형태가 달라진다. 현실에서 소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려면 인간 본성을 추상적으로 논하는 것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인간들의 활동과 물질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따져야 한다. 그리고 사회관계들을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의 한 부분을 떼어내서 그것만 봐서는 안 되고 전체의 한 부분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은 서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가족을 변모케 했고,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의 변화가 어떻게 여성에게 변화와 모순을 가져다 줬는지를 다뤘다.

소외된 행동 때문에 여성은 가족 안에서 피해를 입고, 온갖 이데올로기가 이를 정당화한다. 여성은 섹스 상대라거나, 응당 남편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거나, 가사와 양육을 맡아야 한다거나 등등이 그런 이데올로기의 일부다. 여성 폭력이 남성이 권력을 갖지 못해서 생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은 양성 불평등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한 개인이 다른 사람을 학대하거나 강간하게 되는 근본적 원인을 지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성 차별과 남성우월주의적 편견 때문에 공격하는 쪽은 남성, 피해를 입는 쪽은 여성이 된다. 그러나 여성도 가족 안에서 자신보다 더 불평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인 아이를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여성의 권력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만일 “남성 권력” 이론을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그렇게 주장해야 할 텐데 말이다.

인종 차별을 보면 노동자의 행동과 진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의 차이가 무엇인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지배자들은 신문과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해, 이주노동자 때문에 일자리가 없다고 선동한다. 노동자들과 달리 사용자들과 정부는 자신들의 생각을 퍼뜨리고 이를 상식인 양 여겨지도록 할 능력이 있다. 이런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질수록 지배계급은 득을 본다. 노동자들이 정부나 사용자가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에게 분노를 퍼붓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노동자들은 인종차별로 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본다. 사용자와 정부에 맞서 단결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주변의 모든 차별과 참상이 자본의 노동자 계급 착취와 그 방식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여성 폭력을 인식하려 할 때 계급이 근본적이라는 말은 여성 차별을 계급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차별을 자본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보고 여성 차별이 계급 차별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본다는 것이다. 여성 차별과 계급 차별은 별도의 사회적 양상들로서 그저 서로 “교차”하는 게 아니다. 계급 착취가 갖가지 차별을 낳고, 여성 차별과 계급 차별은 긴밀히 연관돼 있다.

계급적 관점에서 여성 폭력을 다룬다는 것은 단지 폭력이 계급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는 것만이 아니다. 노동자 계급은 균등하지 않고, 이들을 갈라놓는 요인이 많다. 종교나 인종처럼 지배계급이 조장하거나 노동자 자신이 위안과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얻으려고 기대는 요인들도 있다. 또, 사무직 노동자와 광원 노동자들이 행동 방식이 다른 것처럼 노동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들도 있다. 이런 요인들은 결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무직 노동자들은 수십 년 전보다 자신을 노동자로 여기는 경향이 훨씬 더 크다. 따라서 여성 폭력을 연구할 때 여러 요인들과 그 영향력뿐 아니라 그 요인들이 급속하게 변하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높은 수준의 계급 투쟁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덜 폭력적인 성향일 가능성이 크다. 혁명적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보면 이 점이 두드러진다.

여성과 남성이 근본적으로 갈등 관계라고 보는(즉, 분리주의적) 견해들은 이런 점들을 전혀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파업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대체인력 투입을 막았다. 그러자 하청업체 사장들의 아내들이 와서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행동이 “여성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했다. 이 사건은 지배계급이 “여성성”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어떻게 득을 보는지를 보여 준다. 만일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은 여성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에 굴복했더라면 노동자들의 투쟁력은 현저히 저하됐을 것이다. 또한 이 사례는 여성 차별 관념이 노동자 계급에 해롭다는 것도 보여 준다. 여성 차별을 했던 남성 노동자가 파업 참가 뒤 생각이 바뀌는 일이 흔히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이 근본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다고 보는 여성 폭력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갖는 문제점은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계급을 잘못 이해한다는 것(예컨대, 사무직 노동자를 중간계급으로 본다거나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뭉뚱그리는 등)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연구는 계급 이론을 기각하려는 목적으로 수행되는데, 이는 연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어느 조사에서 피해 여성이 남편이 자신을 때린 이유가 ‘밥을 주지 않아서’, ‘섹스를 거부해서’라고 답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틀렸음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소외와 관련된 모든 행동에서, 예컨대 왜 알코올 중독이 됐느냐고 물었을 때 아무도 “소외 때문”이라고 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소외라는 것이 그리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소외의 원인, 즉 자본주의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급진적 여성주의의 문제점은 여성 차별을 계급 관계에서 떼어내어 살펴보고, 여성 차별 문제를 설명할 때 어떤 형태로든 남녀의 개인적 관계 외의 요인을 도입하면 여성 차별의 중요성이 가려진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의 방법은 소외와 착취가 근본적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 일관된 분석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그럴 때만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나,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바가 변하는 것 등의 요인들이 가족 제도 속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성 차별에 관한 근래의 저술들은 적어도 가장 중요한 여성 차별 제도인 가족에 주목한다는 장점이 있다. 브라운밀러가 강조했던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에서 만연한 가정 폭력으로 강조점이 옮겨진 것은 환영할 일이다. 단지 현실을 더 잘 반영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럴 때만 가족을 하나의 제도로 다루고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어와 커크비 등이 참여한 《가정 폭력》 같은 연구서는 그 약점에도 불구하고 보부아르나 브라운밀러 등 초기 여성주의자들의 과도한 일반화, 즉 모든 여성을 남성 지배의 피해자로 그리려는 시도를 피하려 한다.

남성이 바뀌는 것이 해결책인가? ― 여성주의의 비관적인 대안

사회의 근저에 계급 문제가 있고 그로부터 여성 차별, 각종 가족관계, 성별 고정관념을 양산하는 교육 등등 여성 폭력을 낳는 여러 요인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이해하면 여성 폭력에 맞서 싸울 전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타도할 운동 건설이라는 장기적 과제와 연결되는 즉각적인 개혁 요구도 도출할 수 있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고용 안정, 노동조건 개선, 복지, 주택 등을 요구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개혁만으로 여성 폭력을 끝장내지는 못하지만, 여성이 폭력적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좀 더 쉬워지는 데 일조한다. 또한 여성이 남편의 소유물이라거나 여성을 섹스 상대로만 여기는 관념들을 얼마간 약화시킬 수 있다. 여성 폭력에 반대하는 지금의 운동들이 등장한 것도 바로 이런 사회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개혁을 쟁취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노동자 계급 여성과 남성을 단결시키고 강력한 노동자 계급 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더 많은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줘, 그들이 직장이나 가정에서 여성 차별에 맞서 싸우고 남성의 태도를 바꿀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이 제안하는 해결책에는 이런 과정이 완전히 빠져 있다. 얀 홀스퍼는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족을 통해 형성되는 남성 젠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젠더 형성 과정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무의식적 과정이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프로이트 등의 이론을 동원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이 가족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발 물러선다. 그는 여성과 남성이 기존 가족 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고 그저 개별 남성에게 책임이 있다는 도덕주의적 결론만을 제시한다. 이처럼, 남성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고 남성이 변해야 한다는 것은 급진적 여성주의의 상투적인 해결책이다. 오어도 비슷하게 말한다. “가정 폭력을 설명하고 그 대응을 논할 때 최우선적으로 남성성과 권력을 남용한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 오늘날 우리 문화가 직면한 시험대는 남성성을 일부 재정의해 남성들이 폭력과 여성 혐오로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계속 반복되지만 남성을 훈계한다는 것 외에는 변화를 어떻게 구현할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입장은 아주 비관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기껏해야 남성들에게 그들의 권력(정확히 말하면, 남성들이 갖고 있다고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슬린 스콧은 가장 처지가 나쁜 남성도 가족 안에서는 지배자 노릇을 하므로 “모든 남성은 체제를 유지하도록 이끌린다”고 주장했다.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흔한 관점일 테지만, 이는 수많은 남성들이 지배자들의 공격에 저항하고자 파업과 시위를 벌이고 그중에는 여성의 권리를 위한 행동도 포함된다는 것을 무시한 것이다. 스콧의 다음 말은 이런 관점의 근본적 문제점을 보여 준다.

노예 사회를 바꿀 근본적 힘은 … 노예들에게 있지 않다. … 결정적인 힘은 바로 노예 사회를 통솔하는 꼭대기 층에 있다. … 가족 안에서 학대당하고 두들겨 맞는 여성과 아동들 문제도 그 해결책은 같다. 남성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첫째, 그런 말은 피억압자들의 해방이 억압자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인데 순전한 엘리트주의다. 스파르타쿠스부터, 지난 1백50년 동안 자본가들을 악몽으로 몰아넣은 노동자들의 반란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기도 하다. 억압당하는 당사자들은 결코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이론가들이 뭐라고 떠들든 그들은 싸울 것이다.

둘째, 이런 견해는 남성들을 어떻게 바꿀지 여전히 제시하지 못한다.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한다”고 비난하지만 그들의 이론이야말로 가족 내 복잡한 관계들을 “남성성”으로 환원하고 비관적인 전망 속에서 조야한 해결책만을 제시할 뿐이다. 물론 여성주의자들이 제출하는 요구들 가운데는 직장과 교육에서의 차별 폐지처럼 사회주의자라면 당연히 지지하는 것들이 포함돼 있다. 최저임금 인상도 좌파의 전통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경제 위기와 실업, 그리고 정부의 공공부문 공격 상황에서 그런 요구들을 성취하려면 여성과 남성이 단결하고 직장에서 노동자로서 갖는 힘을 발휘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직장을 남성 영역이라고 치부하거나,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무관하다고 여긴다. 가족이 직장과 분리돼 있지 않다는 것,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가족 내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이해할 때만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빠진 함정, 즉 남성에게 변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때때로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의 개혁안 중 일부 요구들은 보수적 견해를 반영한다.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전쟁을 미화하거나 폭력적인 내용을 다루지 말라거나, 뉴스 진행자는 특정 소식을 전할 때는 슬픔과 고통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는 것 따위가 그렇다. 세계적으로 전쟁과 경제 위기, 기아 사태가 만연하고 그로 인한 폭력과 공포가 넘쳐나는데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정화해서 전달함으로써 여성 폭력이 자행될 환경적 요인을 줄여 보자는 것이다. 다시 한번 그들의 견해가 비관적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여성 차별의 발원지는 가족이다. 따라서 여성 차별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려면 동등한 임금을 위해 싸울 뿐 아니라 육아와 가사의 부담을 여성이 아니라 국가에 지우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전략은 자본의 이익을 침해한다. 특히, 경제 위기 때문에 지배계급이 공공지출을 줄이고 노동자들이 위기의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려는 시기에 이런 전략은 자본과 더 강하게 충돌한다. 심지어 전후 장기 호황기에조차 육아와 가사를 완전히 사회화하지는 못했는데 자본의 입장에서 가족 제도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어마어마하게 떠넘기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남성 지배라는 신화》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엘리너 리콕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1990년에 재출판하면서 그 서문에 이렇게 썼다. “(노동자 계급 여성이) 교육과 주택, 복지라는 (외견상) 보수적인 쟁점을 놓고 싸울 때 그들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놓고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투쟁은 더 큰 계급투쟁으로 확대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물러설 것이냐 싸울 것이냐가 관건이 된다.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대부분 자본주의 타도를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무작정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여성 폭력을 끝장내고 싶어 하지만 이를 위해 필요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국가를 이용하려 애쓰는 종류의 급진적 여성주의

포르노가 강간 등 성폭력을 유발한다고 보는 입장은 국가에 포르노 검열을 요구하다가, 국가를 이용해 남성을 교정하려 애쓰는 더 폭넓은 여성주의 입장과 합류하게 된다. 국가를 파트너 삼는 이 입장은 마르크스주의가 주변화된 것과 앞서 언급된 사상적 혼란들 덕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헤더 맥그리거와 앤드류 홉킨스는 남녀의 개인 관계를 중심에 놓는 남성 권력 이론을 논리적으로 그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어떤 형태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브라운밀러 책이 여성 폭력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한다며 아주 중시한다. 반면에 좌파에 속한 여성들을 “여성 해방을 노동자 계급 해방이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완전히 엉터리이고 왜곡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시절부터 여성해방과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하나의 투쟁으로 여겨 왔다. 둘 중 하나만 달성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맥그리거와 홉킨스는 동등한 일자리와 임금이라는 요구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반동적 입장을 드러냈다. “이런 요구들의 공통점은 남성의 행동에 주목하지는 않고 국가에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가가 무상 보육을 실시하고, 국가와 민간 직장에서 성차별을 없애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이를 남성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 남성이 동등한 일자리와 임금을 위해 국가와 사용자들에 맞서 싸우는 것 말고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맥그리거와 홉킨스가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체계적인 공권력 사용”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국가에 전혀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적 조건을 변화시켜야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더러 되레 “비관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을 바꾸려고 부부 강간을 범죄화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과, 그것이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캔버라 가정 폭력 위기 대응반’이 “사회 변화의 진정한 주체”라고 치켜세우는데, 그 단체는 경찰·법원과 긴밀히 협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또, “가정 폭력 반대 운동의 주된 요구는 경찰과 법원이 피해자 입장에서 더 잘 개입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라는 것이다” 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먼저, 경찰의 위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찰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는 집에 침입해서 심지어는 총도 쏘지만 매 맞는 여성이 신고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무엇보다도 국가 권력을 강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주 신중해야 한다. 가정 폭력 피해여성을 돕기 위한 수많은 요구들 가운데 정부가 주택과 복지 관련 요구는 무시하면서 공권력 개입 강화 요구만 의욕적으로 수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여성부에 교육 예산을 할당했는데 그 교육의 주된 내용은 가족 문제에 경찰이 개입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운동 방식에 대한 비판은 여성주의 안에서도 오래 전부터 있었다.

엘리트주의

외견상 ‘캔버라 가정 폭력 위기 대응반’의 활동은 진보적인 것처럼 보인다. 피해여성이 경찰에 도움을 호소하면 이 대응반도 함께 출동한다. 피해여성에게 그의 권리를 조언하겠다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맥그리거와 홉킨스도 이런 방식이 갖는 문제점을 알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도움을 받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도움이 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입장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은 무능하고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없다는 피해 당사자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응반 활동이 “피해자가 수년간 학대를 겪으며 약화된 자존감에 도전”하는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들이 단정하는 것처럼 모든 피해여성들이 자신을 무능하다고 여길지도 의문이지만, 이 대응반 활동을 서술하는 그들의 논조를 보면 그 활동이 아주 엘리트주의적이고, 트라우마 상태에 빠진 여성에게 중간계급식 공상적 박애주의를 강요하려 든다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삶 전체가 전문가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는 관점을 깔고 있다. “우리가 제안하는 것은 위기대응반이 위기 때 개입하는 것뿐 아니라 피해여성이나 그 커플이 장기적 치료를 받도록 적합한 기관을 선정하고 그리로 인도할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뒤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를 부끄럽게 여기는데 이는 비이성적인 것”이라고 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고려하면 여성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비이성적이지 않고 그저 필자들이 엘리트주의에 눈이 멀었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계몽되지” 못해서 “비이성적”이라고 느끼는 자들은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동등한 일자리와 동등한 임금과 같은 사회적 환경이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이 맥그리거와 홉킨스는 여성의 요청에 따라 개입한다고 말하면서도 경찰이 대응반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가해 남성을 체포하지 않은 한 경우를 부정적으로 다룬다. 그런데 경찰이 남성을 체포하지 않은 이유는 피해자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자들은 피해여성의 요청이 없다고 체포하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 어떤 “전문가”가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든 피해여성의 의사에 반해서 개입하려는 것은 전혀 지지받을 수 없다. 과거에 이 점은 사회주의자와 여성주의자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아주 기초적인 것이었다. 많은 여성들은 즉각적인 폭력을 막는 것만을 원한다. 남성이 체포되길 원치 않는 이유는 다양한데, 그중 하나는 그 남성의 수입에 생계가 걸려 있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그런 선택을 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공동체의 경우, 정부가 가한 오랜 억압 때문에 연행에 공포를 느끼고 정부 기구에 대해 정당한 불만을 갖고 있고 그 어떤 국가 개입도 의심쩍게 바라본다.

차별에 저항할 사람들의 능력을 키우고 국가를 뜯어고칠 정치 운동을 벌이기보다 국가를 강화하자는 제안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여성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호소력을 갖는 것은 개별 남녀관계를 핵심 문제로 보고, 구체적 맥락과 무관하게 언제나 남성은 여성에게 권력을 휘두른다고 보는 견해 때문이다. 위기 대응반 활동을 지지하는 여성주의자들은 국가를 동맹으로 여기지만 국가는 계급 사회를 지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적이다.

결론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여성 폭력을 낳는 복잡한 과정을 모두 남성의 행동 방식 하나로 환원해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자본주의 역사 내내 여성은 평등한 성적 관계 형성, 성폭력 폐지, 남성과의 동등한 대우 등을 위해 싸워 왔다. 20세기 들어 생겨난 변화,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이후 생긴 변화를 통해 수많은 여성이 일자리를 갖게 됐고, 바로 여기서 많은 모순이 생겨났다. 이 문제들이 이전 시기보다 오늘날 더 공개적으로 논쟁을 촉발시킨 배경이다. 여성들은 대인관계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고, 낙태와 피임 기술 개발로 더 자유로운 성애가 가능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성은 여성을 섹스 상대로만 여기고 여성의 주된 임무는 새로운 노동력인구를 길러내고 지금의 노동력인구를 보살피는 것이라는 사회의 여성 차별에 부딪힌다.

오늘날 수많은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를 불만족스럽게 여기고, 남성이 자신의 말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을 하찮게 대한다는 불만을 갖는다. 이처럼 도처에서 불만이 쏟아지는 것은 남성이 여성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남성의 삶도 그리 순탄치 않다는 것의 반영이기도 하다. 함께 사는 여성과의 관계가 나빠질 때 남성은 결코 득을 보지 않는다. 많은 남성이 여성 차별적 행동을 하는 것은 그런 행동이 자신에게 권력을 부여해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이 폭력에 시달리는 것은 우파의 주장처럼 여성이 그것을 즐기거나 그런 행동을 유발했기 때문이 아니다. 셔 하이트의 보고서 〈여성과 사랑〉에 따르면, 61퍼센트의 여성은 한 번도 폭력을 당한 적이 없고 자신은 절대 그런 상황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또 다른 27퍼센트는 살면서 폭력을 단 한 번 경험했다고 했고, 그 경험을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여성은 폭력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려 했다.

직장에서 여성들이 동등한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을 두고 남성 개개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여성 차별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구실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여성의 삶을 바꾸고, 더는 남성이 여성을 깔보거나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서 자본주의를 타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구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주변화됐고, 우경화하는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의 사상이 더 광범한 청중을 얻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위기로 계급투쟁이 다시 대두되면 급진적 여성주의 사상은 여성 운동을 막다른 길로 이끈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노동자 계급 여성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거나, 임금을 올리거나, 직장에서 성추행을 막고자 싸우게 될 때 노동자 계급 남성이 적이 아니라 동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투쟁 속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 사회에 대한 인식이 바뀔 것이다. 여성들은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이 강하고 독립적이고 존경과 존엄을 받을 대상임을 입증할 것이다. 이런 투쟁에서 국가는 결국 사용자와 정부의 편임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할지는 미리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의식적으로 개입하고 적절한 상황 속에서 여성 차별과 인종 차별에 맞선 주장을 펴고 그에 근거한 정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