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경제 공황 이후 지속된 경제 위기 속에서 동아시아의 불안정과 긴장도 심화됐다. 제주 해군기지를 둘러싼 충돌도 이 맥락 속에 자리 잡은 사건들이다. 이런 맥락을 배경으로 평화주의 사상도 그 청중을 넓히고 있는 듯하다. 김영익 기자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특히 트로츠키의 사상에 비추어 평화주의 사상과 운동의 한계를 짚어 본다.


2000년대 초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해 반전평화 운동이 성장했을 때, 반전평화 운동 참가자 다수가 공유하던 정치와 정서는 평화주의였다. 당시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한 사람들 중에도 평화주의적 정서와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도 “평화는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 이뤄져야 한다는 견해가 진보진영 내에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물론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운동이나 한·미·일 군사협력에 반대하는 운동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다양한 평화주의자들과 협력해야 한다. 평화주의 운동가들은 제주해군기지 반대 운동이나 한국 기업의 무기 수출 반대 운동 등에서 군사주의를 폭로하고 비판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해 왔다.

평화주의는 스펙트럼이 넓지만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평화주의는 모든 생명이 신성한 것이라며 일체의 폭력을 거부한다. 그리고 군사주의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에서 떼어내 따로 다루므로, “합리적 이성” 같은 추상적·절대적 도덕에 기대고, 계급투쟁이 아니라 인류애에 호소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폭력 없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이상을 평화주의자들과 공유하지만, 궁극으로 그 이상을 실현하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서는 그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유럽 좌파 다수는 국제 관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논리에 따라 조정해 평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는 이것이 평화주의의 논리라고 지적했다.

트로츠키의 공헌

1917년 트로츠키는 평화주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태생적으로 근본적 결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평화주의는 사회 현상의 겉모습만을 비판할 뿐, 더 깊이 파고들어 그 현상의 근저에 놓인 경제적 원인까지 보려 하지는 않는다.” 즉, 평화주의는 전쟁과 같은 극단적 폭력을 반대하지만, 그 폭력의 근원을 제대로 밝혀 내지 못한다.

평화주의는 ‘이성의 조화에 바탕을 둔 영속적 평화’를 지향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의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개별 자본가와 개별 자본주의 국가는 나름 ‘합리적으로’ 행동하겠지만, 그 전체의 조합은 경쟁 논리 때문에 전혀 합리적일 수 없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중세 시대에는 꿈도 못 꾼 엄청난 파괴 수단들을 쌓았다.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갈등과 계급 간 적대는 그 경제적 원인이 같다. 즉, 이윤 획득을 위한 경쟁적 축적의 논리가 계급 간 적대를 낳고 또한 국가들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평화주의 논리처럼 “계급투쟁을 진정시켜 점차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보면, 당연히 국가들 사이의 갈등도 조절하고 진정시켜 점차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이론적·정치적으로 평화주의는 사회적 이해관계를 조화시킬 수 있다는 이론과 그 기초가 같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이고 서로 화해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국가들 사이의 갈등과 제국주의 경쟁도 사라지지 않는다.

트로츠키는 평화주의의 핵심 계급 기반이 중간계급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당시 프랑스의 사례를 들어, 전쟁을 두려워하는 중간계급이 왜 제국주의 전쟁으로 나아가는 자본가들을 막지 못하는지 설명했다.

“해외 차관, 식민지, 러시아·영국과의 동맹 때문에 [프랑스] 상류층은 세계 자본주의의 이해관계와 갈등에 얽히게 됐다. … 반면 프랑스 중간계급은 평생 전쟁을 엄청나게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 중간계급은 급진당의 부르주아를 자신들의 대표로 의회에 보낸다. 그 부르주아 양반의 다음과 같은 약속을 믿고 말이다. ‘나는 두 가지 수단으로 평화를 지키겠다. 첫째, 국제연맹. 둘째, 러시아 카자크를 시켜 독일 황제의 목을 치게 하겠다.’

“[그러나] 그 ‘급진당 평화주의’ 의원들은 … 파리 증권거래소가 러시아·아프리카·아시아에서 가지고 있는 다양한 금융적 이해관계에 따라 프랑스 국가가 떠맡은 기존의 외교·군사적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내각과 의회는 계속해서 평화를 말하지만, 그와 동시에 프랑스를 결국 전쟁에 휘말리게 할 대외 정책을 무의식중에 수행한다.”

비폭력 행동

다른 한편, 철저한 평화주의자들은 저항 과정에서 비폭력 (직접) 행동을 선호한다. 저항 자체가 지향하는 미래를 온전히 반영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대로, 폭력을 이용한 저항은 운동을 타락시킨다고 믿는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비폭력 행동을 투쟁 전술의 하나로 사용하기도 하며, 평화주의자들의 이런 행동에 함께하기도 한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스탈린주의의 방식에도 반대한다.

그러나 저항 운동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비폭력’을 고수하는 게 불가능할 때가 있다. 국가와 체제가 더는 그 운동을 용인할 수 없다고 보고 무자비하게 공격할 때가 그렇다. 예컨대 2008년 6월 중순 이후 국면의 촛불 운동, 2009년 쌍용차 점거 파업, 그리고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운동 때 우리는 지배자들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도했다. 이런 폭력에 맞서는 데 필요하고 적절한 저항 방식을 채택하길 주저하면 그 운동은 약해지고 주저앉게 될 것이다.

즉, 자본주의 지배자들에 맞선 폭력이 필요악일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1925년에 쓴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의 목표가 폭력의 철폐인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미래 공산주의 사회의 관습과 도덕이 아니라 자본주의 폭력에 맞선 구체적인 방향성과 방법을 다루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려는 투쟁은 결국 자본주의를 끝장내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오늘날 전쟁과 파괴를 낳는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존 제국주의 질서를 용인한 채 평화협정, 군축, 유엔(UN) 같은 자본주의 국제기구의 중재 등을 통해 평화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반전평화 운동은 여러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들의 위선적인 ‘평화’ 기조와 우리 운동 내의 평화주의를 구별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 정책과 한국 정부의 친제국주의 정책에 맞선 반전평화 운동에서 평화주의자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트로츠키의 지적대로, 보통 사람들의 평화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불신을 혼란스럽게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군사주의가 자본주의의 한 측면임을 주장하며 진정으로 전쟁과 폭력을 종식시키려면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으로 자본주의를 폐지해야 함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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