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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신문 - 민중의 심금을 울리는 신문은 ‘대량 설득 무기’다

1789년부터 1794년에 걸친 프랑스 대혁명은 혁명적 신문들이 사태 전개를 좌우하는 데서 결정적 구실을 한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혁명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치른 결정적 전투였다. 혁명은 왕과 귀족의 낡은 봉건적 질서를 일소했다. 상인·의사·법률가 등의 중간계급이 지배하는 국민국가가 출현했다.

옛 질서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래서 거듭거듭 혁명은 신흥 자본가 계급의 일부가 민중과 동맹을 맺고 반혁명을 패퇴시켰을 때만 전진할 수 있었다.

장-폴 마라는 당시 가장 급진적이고 영향력 있는 혁명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전적으로 그가 만든 혁명적 신문 〈민중의 벗〉(L’Ami du Peuple) 때문이었다.

〈민중의 벗〉은 하루에 2천 부 가량 팔렸다. 기층에서 혁명을 이끌었던 주요 활동가들은 대부분 이 신문을 읽었다.

마라의 신문은 새로 등장한 정치 클럽이나 지역 회합에서 큰 소리로 낭독됐다. 그런 클럽이나 회합이 혁명을 전진시켰다.

신문 기사는 대부분 마라 자신이 직접 썼다. 아울러 독자 편지도 큰 구실을 했다. 신문은 끊임없이 자기만족에 반대했고 옛 질서에 맞서 더 단호한 행동을 촉구했다.

마라는 자기 신문의 독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나는 우리의 잔혹한 적들을 대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태도에 분노한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 그들이 단 하루만이라도 주인 행세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횃불과 칼을 들고 각 지방을 유린할 것이다. 저항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조국의 형제들을 학살하고, 부녀자와 아이들을 도륙하고, 우리의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마라는 중간계급이 옛 질서를 패배시킬 수 있는 방법은 민중을 동원하는 것뿐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마라는 자신의 청중이 “날마다 억압자들에 맞서 나의 지지를 호소하는 불행한 사람들, 피억압자들, 박해받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중간계급의 문어체가 아니라 평범한 대중의 언어로 글을 쓴다는 이유로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을 비웃었다.

“나는 민중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지 식자층이나 신사 나으리들을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내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알기 쉬운 글이다.”

1790년과 1791년 내내 마라는 혁명이 위험에 빠졌다고 경고했다. “왕가는 다시 국외 탈출을 도모하고 있다. 왕은 반혁명을 기도하는 혁명의 적들을 이끌려 한다.”

그의 말이 옳았음이 입증된 것은 1791년 6월 왕족들이 파리를 탈출해 국경까지 달아나 반혁명 군과 합세하려 했을 때였다. 그들이 성공했다면 혁명은 분쇄됐을지도 모른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온건파” 지도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라의 경고와 다른 혁명적 저널리스트 카미유 데물랭의 호소에 대중이 응답을 했다.

역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의 메시지는 아주 잘 전달됐다. 그래서 왕이 탄 마차가 달아나고 있을 때 곳곳에서 망을 보고 있던 민중에게 발각됐다.”

국경에서 겨우 몇 시간 거리도 되지 않는 바렌느에서 마침내 왕은 그 지역 우체국장 장-밥티스트 드루에에게 체포됐다.

마라가 만든 〈민중의 벗〉은 프랑스 혁명기의 신문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신문일 뿐이다. 다른 신문들도 민중에게 영향을 미치려 했다.

1794년 여름 이후 혁명은 옛 질서를 분쇄했다. 중간계급의 더 우경적인 분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여전히 보통 사람들은 빈곤과 불의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급진화해 새로운 혁명을 주장했다.

그라쿠스 바뵈프는 낡은 봉건 귀족의 질서를 제거하는 것을 넘어서서 더 평등한 새 사회를 건설하자는 투쟁 전망을 제시했다. 바뵈프는 자신의 신문 〈호민관〉(Le Tribun du Peuple)을 중심으로 지지자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사료를 보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그 때 10살 반이었던 바뵈프의 아들 에밀이 쓴 편지를 보면 〈호민관〉 제41호의 배포 상황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 그는 동네의 구두수선공과 다양한 남녀 시민들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6부에서 12부 가량씩 신문을 가져가며 자신과 친구 몫의 2부 값을 치렀고 나머지 판매 대금을 나중에 주기로 약속했다.”

점차 반동화한 정부는 바뵈프의 조직을 완전 파괴했고 그는 1797년에 처형됐다.

그러나 그의 유산과 프랑스 혁명의 유산은 다음 세대의 혁명가들을 고무했다. 이제 그들은 그 탄생에 프랑스 혁명이 일조한 자본주의 사회에 맞서 투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