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연금 개악과 국민연금 ‘개선’을 맞바꾸려던 주류 양당의 합의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대자본가들이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 부담을 격렬히 반대하고, 박근혜도 공무원연금 개악을 원했지 국민연금 개선에는 관심이 없는 터라 양당의 합의를 못마땅해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지도부도 청와대와 대자본가들의 눈치를 보다가 서명한 지 나흘 만에 말을 바꿨다.

합의안 서명 이후 본회의 처리 무산에 이르는 과정이 보여 주듯, 양당은 공무원연금 삭감에는 이견이 없었다. ‘공적 연금’ 관련 부분만 쟁점이었다.

새누리당은 공적 연금 강화 관련 합의문이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고 애썼다. 새정치연합은 새누리당의 태도가 완강하자 처음에는 양당 대표 합의문에서, 다음에는 규칙에서 이를 빼는 데 합의해 줬다. 결국 명목소득대체율 “50퍼센트로 인상” 약속이 빠진 상태로 통과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우파 언론들이 강하게 양당 합의를 비판하고 당 내에서도 반대가 만만치 않자 김무성은 일단 멈추기로 했다. 이로써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진영은 잠시 투쟁의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그리 긴 시간은 아닐 듯하다. 양당이 곧바로 임시국회를 다시 열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여야 야합이다

양당은 이번 합의를 사회적 합의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전교조와 공무원노조가 공식 입장을 통해 ‘야합’이라 규정했듯이 노동자들은 양당 합의에 동의한 적이 없다. 본회의가 열린 5월 6일에도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소속 노동자들은 국회 앞에서 법안 통과 반대 집회를 열었다.

따라서 정의당과 주요 NGO 리더들이 양당 합의를 ‘사회적 합의’라고 치켜세운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이들은 공무원노조 이충재 위원장이 노동자들의 민주적 결정(대의원대회는 양보안을 내지 않는다고 결정했다)을 무시하고 배신적 합의를 한 사실을 애써 못 본 체하고 공무원연금 개악 합의를 인정하려 했다.

정의당 정책위원회(의장 조승수)는 “공무원들의 희생을 담보로 국민연금 강화라는 합의를 이뤄냈다”며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국민연금 개선] 논의를 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참여연대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은 “국민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중대한 사회적 합의 ... 여야정당과 노동계, 시민사회계의 의지를 모아 합의를 이끌어 낸 역사적 사건”이라고 띄웠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오건호 공동운영위원장은 “공무원 조직 대표까지 큰 틀에서 서명한 합의”라며 이제 “공적 연금 강화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토론해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반면, 노동당 정책위원회는 이번 합의가 “하향평준화”라고 옳게 비판했다. 공무원연금 개악 반대를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는 것은 아쉽지만 말이다.

당혹스럽게도, 민주노총은 공무원연금 개악에 반대하는 성명과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퍼센트 합의 이행’을 요구하는 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가 거센 항의를 받은 뒤 후자를 취소했다.

국회특위 합의문은 성과가 아니라 개악이다

물론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애초 개악 목표를 1백 퍼센트 관철시키지 못했다. 공무원·교사 노동자들의 저항과 민주노총 4월 파업,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운동, 성완종 게이트 등 때문에 개악 수위를 약간 낮춰야 했다. 우파 언론들은 이 점을 크게 부각해 ‘거북이’ 개혁이라며 “원점에서 재논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평범한 공무원·교사 노동자들 처지에서 보면 개악이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 인사혁신처가 발표한 결과를 봐도 기여금 인상액과 연금 삭감액을 합치면 6천여만 원에서 1억 6천여만 원을 손해 본다. 이 정도면 집 한 채를 뺏기는 수준이다.

소득재분배 조처 때문에 일부 하위직 공무원들의 연금이 늘어난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공무원노조 이충재 위원장이 이런 보도를 이용해 오히려 ‘성과’를 냈다고 자화자찬하는 것은 가련하다.

그러나 인사혁신처는 2016년 임용된 9급 공무원이 30년을 근무한 뒤 받게 되는 첫 달 수급액이 지금보다 3만 원 적을 것이라고 밝혔다. 더 받는 것이 아니라 좀 덜 깎인 것이다. 현직 하위 공무원들은 그보다 삭감폭이 더 크다.

공무원연금을 깎아 국민연금을 개선하겠다는 발상의 문제점

공무원연금이 일부 삭감되더라도 이번 기회에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인상할 수 있다면 전체 노동자들에게는 이익이라는 생각이 진보진영 안에 많다.

물론 공적 연금을 강화하는 것은 노동자 전체에 중요한 일이다. 용돈 수준에 불과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최소한 OECD 권고대로 60~70퍼센트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현재 한국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명목상으로 40퍼센트지만 실질적으로는 취업 기간이 짧아 20퍼센트 안팎에 머무르고 있다. 사각지대도 넓어 전체 노동자의 절반만 혜택을 받는 문제도 해결돼야 한다.

그러나 공무원연금 개악으로 절감한 재정만으로는 이런 문제들을 전혀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 국민연금의 재정 규모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하물며 주류 양당이 합의한 공무원연금 재정 절감액의 20퍼센트 가지고는 언 발에 오줌 누기다.

국민연금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면 훨씬 큰 규모의 재정이 투입돼야 한다. 보건복지부와 〈한겨레〉, 〈경향신문〉 등이 보험료 인상을 기정사실화하고는 그 규모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 까닭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을 좋아할 리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기금 고갈론을 들이대 연금 삭감을 시도하는 마당에 뭘 믿고 보험료를 더 내느냐는 이들의 항의는 정당한 것이다.

게다가 현재 5백조 원에 이르는 기금을 쌓아 두고는 용돈밖에 안 되는 연금을 지급하는 점, 불공평한 보험료 부담, 정부 지원 사실상 부재 등을 고려하면 노동자들에게 보험료를 더 내라는 것은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만 키우는 일이 될 것이다.

국민연금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면 기업주들과 정부가 세금과 보험료를 더 내도록 해야 한다. 지금의 경제 위기와 국민연금 재정 규모를 고려했을 때 자본가 계급 전체와 정부에 압력을 넣으려면 강력한 계급 투쟁이 필요하다.

이런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1995년 프랑스 노동자들은 연금과 의료 혜택을 축소하려는 정부에 맞서 대규모 파업을 벌였고, 그 결과 기업주들의 세금 부담을 늘려 복지 수준을 유지하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이 투쟁은 국제적으로도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는 장기간에 걸친 노동운동의 패배기를 끝냈고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시작된 대안세계화 운동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번 양당 합의를 두고 벌어진 노동운동·진보운동 내 혼란은 공무원·교사들의 양보를 통한 국민연금 강화 계획(‘사회연대전략’)이 오히려 이런 힘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국민연금 ‘개선’안은 공무원연금 개악을 위한 덫

박근혜 정부는 공무원연금을 개악해 재정 절감을 하려 했을 뿐, 국민연금 강화에는 애당초 아무 관심이 없었다.

박근혜 정부는 공적 연금 강화는커녕 사적 연금 활성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번에 나온 국민연금 보험료 폭탄 협박의 근거 자료도 2013년에 준비했다가 증세에 대한 반발을 의식해 잠시 미뤄둔 개악안에서 사용된 것들이다.

또, 공공 복지를 축소하고 ‘민간’(즉, 재벌들)에 시장을 제공하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투자 활성화 대책’, ‘공공부문 정상화 대책’ 등은 공공서비스를 축소해 민간 시장을 확대하거나 아예 민영화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다. 박근혜는 이를 위해 규제를 ‘단두대’로 보내 없애겠다고 이를 갈고 있다.

이런 정책은 경제 위기 속에서 기업주들에게 새로운 투자처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다. 또, 재정 지출을 줄여 이들의 세금 부담도 덜어 주려는 시도다.

새누리당이 국민연금을 개선하기라도 할 것처럼 얘기를 흘린 것은 새정치연합과 공무원노조 지도부에 공무원연금 개악 양보의 명분을 주려는 꼼수였을 뿐이다.

그러나 박근혜와 대자본가들은 이런 꼼수가 결국 복지 확대 요구를 부추기는 정치적 효과를 낼까 봐 집요하게 반대한 것이다. 심지어 국회 통과가 임박하자 〈조선일보〉는 “대통령 거부권 검토를” 요구했고 〈중앙일보〉는 양당 국회의원들에게 지도부의 지침을 거슬러 “이성적으로 판단해 반대표를 던져 주길” 요구했다. 보건복지부 관료들은 보험료 폭탄 얘기를 흘리며 저항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으로 공무원연금 개악을 막아 낼 때에야 공적연금 강화를 위한 운동도 전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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