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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 결과 ─ 부시 승리는 미국인의 보수화 덕분인가?

케리가 선거에서 패배한 후 미국 좌파들은 대부분 의기소침해 있다. 특히 생계까지 내팽개치고 적극적으로 케리 선거운동을 했던 많은 기층 활동가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이번 선거 결과에 실망한 것은 비단 케리 지지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선거에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동성애자 결혼, 낙태권 등 다른 중요한 문제가 연동돼 있었다.

불행히도, 같은 날 투표를 통해 12개 주에서 동성애 결혼이 금지됐다.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도덕적 가치들’(실제로는 보수적 가치관)이 선거의 당락을 결정지었다면서 미국 대중이 보수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부시만 아니면 된다”던 미국의 많은 좌파 인사들도 케리 패배의 원인으로 미국인의 “보수화”를 들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활동가들의 절망감을 더 부추기고 있다. 어떤 활동가들은 미국과 미국인이 싫어서 캐나다로 떠나고 싶다고 한다.

케리를 지지한 대표적인 중도좌파 주간지 〈네이션〉은 케리의 패배 때문에 “이 나라의 진보운동은 거대한 후퇴를 겪게 됐”고 “앞으로 4년은 매우 어두울 것이다 …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고 경고했다.

《파레콘》(북로드, 2003)의 저자이자 〈Z넷〉의 운영자인 마이클 앨버트는 미국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물질적 이해관계에 따라 케리에 투표하지 않았”고,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에서도 반부시 정서가 광범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케리의 패배에 실망했을 것이다. MBC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중 64.5퍼센트가 케리의 당선을 바랐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선거에 대한 한국 진보진영 내 적잖은 평가는 미국 좌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참여연대의 홍성태 정책위원장은 “다수의 미국인이 호전적인 방식으로 미국식 생활을 유지할 수 있기를 원한 결과가 부시의 재선”이라고 주장했다.

평화네트워크의 정욱식 소장은 “미국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건강한 비판의식을 유권자들이 버렸다”고 말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른다면, ‘노동자의힘’의 논평처럼 “현 시점에서 제국을 붕괴시킬 기본적인 힘은 제국의 외부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2003년 2·15 국제공동반전행동이나 이번 8월 공화당 전당대회에 항의한 시위대 규모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반전 운동은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운동 중 하나였다.

더구나 제국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운동은 당장의 규모를 떠나 매우 커다란 전략적 의의가 있다. 만약 진정으로 미국의 평범한 대중이 보수화하면서 미국 운동이 몰락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거대한 손실일 것이다.

실제로는,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의 전통적 기반인 노동자와 소수인종, 빈곤층 다수는 투표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55퍼센트로, 2000년보다 조금 늘었을 뿐이고, 증가는 상당 부분 ‘기독교 우파’의 동원 때문이었다.

‘도덕적 가치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선거전이 후반으로 올수록 선거 의제는 점차 보수적이 됐고, AP 출구조사에 따르면 투표자의 22퍼센트가 ‘도덕적 가치’가 투표에 결정적 변수였다고 답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많은 미국 좌파에게는 쓰린 말이겠지만, 만약 그들이 케리에게 정치적으로 종속되지 않았다면 결과는 다소 달랐을 것이다.

만약 미국 좌파들이 네이더를 지지하고 선거 때 “부시가 싫다”에 더해 이라크전쟁·팔루자학살·아부그라이브만행·의료개혁·일자리·임금 등에 대해서 토론하고 진보적 대안을 호소했다면, 그리고 힘들게 모은 기금을 억만장자 후보 케리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반전 운동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집회나 토론회를 조직하는 데 썼더라면, 설사 부시가 당선됐더라도 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더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좌파들은 케리의 친전쟁·친기업 정책을 변호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과 정력을 소진했다.

덕분에, 케리는 좌로부터의 별다른 압력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마음놓고 우경화할 수 있었다. 동시에, 공화당 우파와 가까운 ‘기독교 우파’들은 낙태와 동성애자 결혼 반대 같은 명확한 자기 쟁점을 가지고 대중 내 후진적 부문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러한 후진적 대중의 상당수는 경제 양극화 속에서 삶이 파괴당한 노동자와 빈곤층이었다. 민주당이 공화당과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되면서 공화당이 이들의 분노를 테러리스트·동성애처럼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던 것이다.

케리는 이러한 공화당 우파 의제를 선거 기간 내내 추종했다. 결국 선거운동 기간에 주된 쟁점이 된 것은 우파 쟁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을 찾지 못한 노동자들의 일부가 우파 이슈에 표를 던진 것은 “정신적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미국의 상황은 전혀 절망적이지 않다. 미국 유권자의 70퍼센트가 부시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일부의 보수화와 상관 없이 미국에는 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존재한다. 지난 4년 간의 공화당 우파의 지배에도 미국 대중의 의식은 계속 급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올해 3월 AP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2퍼센트가 균형예산보다는 의료와 교육에 대한 투자 증대가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5월 ABC뉴스와 워싱턴포스트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54퍼센트가 낙태가 계속 합법이어야 한다고 말했고, CNN/갤럽조사에서는 81퍼센트가 낙태가 부분적 또는 전적으로 합법이어야 한다고 답했다. 또, 9월 CNN/갤럽조사에 따르면 52퍼센트가 이라크전쟁이 잘못됐다고 답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인 다수는 이라크 전쟁과 ‘도덕적 가치’와 신자유주의 개혁에 반대한다.

미국 운동이 앞으로 나갈 길은 명확하다. 먼저 민주당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할 필요가 있다. 지금 민주당 지도부는 이번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를 충분히 우경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들은 더욱 우경화할 것이다. 운동이 이런 자들에게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적 세력화가 필요하다.

미국 대선에 대한 평가에서 월든 벨로가 내린 결론은 절대적으로 옳다. “2기 부시 정부의 의제는 1기와 동일하다 ― 세계 지배. 우리의 대응도 동일하다 ― 세계적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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