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야 김득영 동지(1976-2015)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한 노동자연대 회원이 그가 연락이 잘 안 되자 찾아갔다가 뒤늦게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와 나는 많은 활동들을 함께했고, 그가 노동자연대를 탈퇴한 후에도 나름 협력을 해왔다. 그래서 마음이 참 아프다.

그는 1976년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음악에 큰 관심이 있었던 그는 서울 재즈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했고, 재즈 밴드에서 베이스를 치는 음악 활동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가정 불화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워했고 깊이 좌절했을 뿐 아니라, 형편이 여의치 않아 신문과 택배 배달 등을 하며 힘들게 생계를 꾸려나갔다.

고 김득영 동지 ⓒ<노동자 연대> 자료 사진

나는 2008년 촛불항쟁 속에서 그를 처음 봤다. 당시 노동자연대에 가입한 그는 적지 않은 나이에 매일 새벽 신문 배달을 하면서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회 현장에 나왔다.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2010년 5월 우리는 강남역에서 〈레프트21〉(〈노동자 연대〉의 옛 이름) 신문을 함께 판매하다가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 당했다. 그때 우리는 유치장 안에서 인권 침해에 맞서 단호하게 싸웠는데, 김득영 동지는 그 경험이 좋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후 우리는 대책위를 꾸리고 법정 투쟁에 나섰다. 그는 지지 서명 받기, 모금 등 여러 활동들에 대체로 잘 참가했다. 그는 1심 최후진술 준비를 조금 어려워했다. 그가 쭈뼛거리며 낸 최후진술문 초안은 짧지만 할 말은 다 하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토론해서 내용을 다듬었다.

최후진술을 하는 날, 우리 연행자들은 판사의 압력 속에서도 끝까지 할 말을 다했다. 그런데 김득영 동지는 판사의 제지에 마지막 몇 문장을 말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위축됐다며 두고두고 후회했다. 내가 보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가 자신의 실수를 돌아보려고 하는 점이 좋아 보였다. 이런 활동들 속에서 우리는 함께 배울 수 있었다.

그는 2013년 겨울 철도파업에 연대하다가 연행되기도 했는데, 이때에도 그는 법정에서 철도파업의 정당함을 주장했다. 

물론 그가 자신감이 저하돼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개입 강화라는 단체의 정치적 방향 전환에 호응하지 못하고 단체를 탈퇴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레프트21〉 대책위 활동은 유지했다. 불과 몇 개월 전에는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에 진정서를 넣는 문제로 그와 통화했다. 그때 전화를 끊으면서 그는 뜬금 없이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가 처했던 어려운 조건과 외로움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이를 생각하면 인간적 연민과 슬픔이 느껴진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민중의 염원을 결코 꺾을 수 없다”(최후진술문)고 생각했던 그는 부당한 탄압에 맞서 끝까지 싸우길 바랐을 것이다. 그 과제는 이제 남은 동지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