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열린 주장과 대안〉 10호의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에 대한 논쟁 글이다.


이원재 동지가 쓴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은 일본 교과서 왜곡이 단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경화를 나타내는 여러 사건들과 연결돼 있음을 잘 보여 주었다.

그 글을 읽으면 왜곡된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검정 통과,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의 국기 및 국가화, 평화헌법의 개정, 미일 신가이드라인 체결과 집단적 자위권 확보 움직임, 수상을 포함한 기성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 천황제의 공식 도입 등이 서로 연관돼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글은 일본 사회 전체가 이런 우경화 물결 속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한 예로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일본 내부의 반발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왜곡된 역사 교과서에 대한 지지는 높지 않다.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이번에 개정된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는 중학교가 10퍼센트면 성공이라 여긴다.

양심적 지식인과 시민단체들의 반발도 존재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 와다 하루끼 도쿄대 명예교수 등이 역사 교과서 왜곡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일본 출판 노조와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 네트워크 21’ 등 시민단체들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반대하고 있다.

일본 최대의 교원단체인 일본교직원조합(JTU)도 ‘자체 지역조직을 통해 왜곡 교과서 채택 거부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역사·교육학자 60명이 발의한 서명 운동에는 두 달여 만에 역사관련 학자·교사 등 8백29명이 동참했다.

다수 일본인들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역사 인식에 반대하고 있다. 60퍼센트 이상이 위안부 등 과거 일본이 저지른 가해의 사실을 정확하게 기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아사히신문사 계열인 〈테레비아사히〉의 뉴스프로그램 ‘뉴스스테이션’이 교과서 검정 발표 이후 실시한 여론조사).

최근 일본에서는 일련의 우경화 행보뿐 아니라 일본 체제에 대한 대중적 반감도 함께 성장하고 있다. 이 점을 설명하기 전에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에서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간 우경화의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잃어버린 10년

일본의 우경화 과정의 이면에는 경제 위기와 이를 반영한 기성 정치의 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199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 경제는 1980년대말 절정에 달했던 투기적 호황이 지나면서 1991년에 그 거품 경제가 붕괴했다. 그 뒤 10년 동안 일본 경제는 연간 국내총생산이 1.3퍼센트밖에 성장하지 못했다.

거품 경제가 몰락하면서 떠맡은 부채로 인해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아직도 허덕이고 있다. 일본 금융기관들은 1980년대말의 광적인 투기로 국내총생산의 20퍼센트에 이르는 부실채권을 갖고 있다. 홋가이도 다쿠쇼쿠 은행과 야마이치 증권, 도쿠요 시티 은행 등이 부실 채권 부담 때문에 도산했다.

‘떠오르는 태양’으로 칭송받기도 하고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일본 기업들의 해외 사업 확장은 이제 수축되고 있다. 닛산 자동차는 프랑스 르노에 팔렸고, 소니 사는 채산성 악화로 헐리우드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 규모인 일본 경제는 1990년대 내내 침체에 빠져 있었다. 기업 부도율도 높아져 1999년에는 매달 1천5백 개 기업이 파산했다. 1999년 당시 실업률은 사상 최악이었다. 전체 인구의 4.9퍼센트가 공식 실업 상태에 있으며, 32만 명의 대졸자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홈리스들도 기록적인 수치에 달하고 있으며, 자살률도 교통 사고 사망률보다 세 배나 높다. 아시아 금융 공황 직후인 1998년과 1999년에 자살한 사람은 6만 명에 이르는데, 이들 대부분은 50대였다.

일본 경제의 특징이었던 종신고용제와 연공서열제 역시 무너지고 있다. 수천 개의 공장들이 중국이나 동남아로 이전하면서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기가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이전보다 더 적은 돈을 받으면서도 더 오랜 시간 일하고 있다. 비공식적인 연장 근무도 크게 늘어나 여느 선진국에 비해 일본 노동자들의 휴가 일수는 훨씬 적다. 1998년에 공식 유급 휴가는 17.5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9.1일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 지배계급은 전통적인 케인즈주의 처방을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 했지만 그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정부는 이자율을 거의 제로로 낮추고 일련의 공공사업을 위해 수백조 엔을 퍼부었지만 경제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은 반면 그 부담은 여타 선진국보다도 높은 재정 적자라는 형태로 즉시 나타나고 있다.

기성 정치 내에서 계속되는 수상 교체와 계파별 분쟁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며칠 전 모리 수상이 물러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후생장관이 새 총리가 됐다. 새로운 총리가 몇 달이 못 가 물러나는 상황은 1993년 자민당-사회당 체제가 무너진 뒤로 일본 정계의 일반적인 현상이 됐다.

전후 일본 공식 정치를 지배했던 자민당이 붕괴하면서 1993년 8월 비자민 연립정부가 등장한 것이 정치적 혼돈의 시작이었다. 자민당은 미국 제국주의의 신뢰할 만한 동맹자이자 천황제의 보루였다. 그러나 전후 정치·경제 영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자민당은 그 지도자들의 부패가 폭로되면서 몰락했다. 리크루트 뇌물 사건, 사가와 규빈 운송회사의 부정 정치 헌금과 탈세 등의 부정부패 스캔들이 항상 자민당을 따라다녔다.

일본 진보 진영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사회당도 자민당과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사회당은 계속하여 우경화해 미군 주둔 반대, 방위비 증액 반대, 국가(國歌) 및 천황제 반대를 철회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당은 분열하여 한 무리는 사회민주당으로 개명하였고 다른 무리는 민주당으로 들어갔다.

일본공산당도 사회당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내내 우경화 과정을 겪었다. 일본공산당은 당 규약을 42년만에 처음으로 전면 개정하면서 형식적 문구로만 남아 있던 ‘노동자 계급의 전위 정당’을 ‘노동자 계급의 당이자 일본 국민의 당’이라고 바꿨다. 또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국가와 국기로 하는 법안에 반대해 온 방침을 철회했다.

하지만 1996년 하시모토 내각이 부실채권을 처리하기 위해 소비세를 3퍼센트에서 5퍼센트로 인상하려는 시도에 반대해 일본 공산당은 그 해 10월 총선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 1999년 10월에 있었던 총선에서도 공산당은 기성 정당들의 인기 하락에 따른 반사 이익으로 의석수가 15석에서 26석으로 늘어났다.

환멸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에서 이원재 씨는 일본의 정치계, 언론계, 학계 등에 편재해 있는 우익 인사들의 발호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보이는 우경화의 본류는 기성 정치·경제 체제에 있다. 이번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에서도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보다는 문부성이 막후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자민당 의원들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한 오자와가 말하는 ‘보통 국가론’(패전으로 인한 군사-안보상의 제약을 없애자는 주장)은 이시하라 신타로의 망언보다 좀더 세련될 뿐 극우 세력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이번에 수상이 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수상의 자격으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공식 표명했다. 고이즈미 수상과 함께 정조 회장이 된 아소는 “교과서 검정은 문제 없다”, “일본 헌법은 승전국이 패전국에 일방적으로 강압했던 것”이라는 등의 우익적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보수 우경화의 본산지는 자민당 출신 정치인들과 국가 고위 관료들 그리고 경제계의 거물들이다.

개량주의 정당인 사회당의 몰락과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들의 심각한 종파주의 덕분에 극우들이 성장할 수 있었다. 매우 권위적인 교육 체계, 높아져가는 실업률, 기성 정치권이 보여 주는 부패와 무기력 때문에 젊은 사람들도 극우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우경화 움직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지지만 보내는 것은 아니다. 경제 위기는 일본 사회의 안정성이라는 신화를 무너뜨렸다. 많은 사람들은 이전에 믿었던 체제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많은 노동자들은 회사가 자신을 평생 책임져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기업별 노조가 경영진과 협력하는 이전의 관행에 대해 반감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7년 춘투에서 도요타 노조가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했지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자 ‘노조 대회’에서 노동자들은 “춘투 타결이 보류돼야 한다.”, “조합은 노동자들의 요구대로 활동하지 않는다.”며 노동조합 지도부에 불만을 터뜨렸다.

정치가와 사장들의 행태에 대한 반감이 존재하며, 기성 체제 특히 경찰과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더욱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압력 집단들도 여럿 등장했으며, 단일 쟁점으로 형성된 캠페인도 많이 건설되고 있다. 그리고 교육 제도, 성차별적 고용 관행, 부패 등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평범한 사람들이 반격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다.

작년 메이 데이에서 1백7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항의 시위를 벌였으며, 일본 전역에서 1천여 개의 시위가 있었다.

노동자들의 불만 증대는 도요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노동자들은 실업의 위협, 연장 근무, 노동강도 강화 등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일본 노동조합 연맹체들이 봄마다 의례적으로 하는 '춘투'가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계기가 되고 있다. 물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관료를 뛰어넘어 정부와 기업주에 심각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체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환멸이 커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의 글 말미에 있는 북한의 조선직업총동맹에 대해 간단히 지적하고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조선직업총동맹은 우리 나라의 민주노총 같은 자주적인 노동자 조직이 결코 아니다. 조선직업총동맹은 노동자들의 단결권이나 단체 교섭권도 없는 국가 기구의 일부일 뿐이다. 민주노총과 직업총동맹을 대등한 성격의 조직인양 언급하는 것은 마치 조선직업총동맹이 독립적 노조라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김대중의 태도는 위선적이기 짝이 없다.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들끓자 김대중은 마지못해 일본 정부에 공식 항의하고 최상룡 주일대사를 불러들였다.

김대중은 1998년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과거사에 대해 더이상 문제삼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가끔씩 일본 정치인들의 독도 망언으로 한일 관계가 겉으로만 냉각됐던 때를 제외하면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과 일본의 지배자들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65년의 국교 정상화에서 한국측 주역이었고, 현재 한일의원연맹의 한국측 위원장을 맡고 있는 자가 바로 공동 여당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김종필이다.

김대중은 군위안부나 강제 징용자, 조선인 원폭 피해자 보상 등의 문제에 대해 단 한 차례도 관심을 기울이거나 일본 정부에 항의한 적이 없다.

해방 이후 이 나라 지배자들은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씌워 주기 바빴다. 해방 직후 많은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봉사한 사람들이 처벌받기를 바랐다. 대중적 지지를 받고 등장한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방해 때문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승만은 공소시효를 줄이려고 했으며, 경찰을 동원하여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기도 했다. 7천여 명의 친일파 가운데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고작 십여 명이었고, 이조차 이승만에 의해 감형돼 풀려났다.

박정희는 항일 게릴라 운동을 토벌한 일본 장교였고, 최규하는 일본 대동학원 출신의 일본 군인이었다. 윤보선은 친일 운동을 적극 지지한 자이다. 김영삼은 윤보선이 자신의 정치적 토양이 되었다고 말한다.

역대 대통령과 장관 가운데 일제 시대의 관료 출신이 40퍼센트가 넘는다. 그들은 평생 국가 원로로 대접받으며 살아왔다.

친일 전력을 갖고 있는 자들이 해방 이후 한국의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진정한 친일 청산을 할 수 없다. 정신대, 강제 징용자, 일본 거주 조선인들의 처우 등의 문제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일본 천황을 칭송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대동아 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는 글을 내보낸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진지하게 반대할리 만무하다.

친일 잔재도 청산하지 않는 정부가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에 흥분하는 것은 위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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