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공격을 자행한 무장 조직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 이하 아이시스)는 수니파 저항 세력의 일부인 알카에다의 지부에서 비롯해 지난 1~2년 사이에 무섭게 성장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슬람 자체에 폭력성과 종파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아이시스 같은 잔혹한 조직이 기세를 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폭력성·종파성은 지난 25년 동안 이라크에서 전쟁과 UN(사실상 미국의) 제재, 제국주의 점령 때문에 자라났다.

특히 2003년부터 이라크를 점령했던 미국이 저지른 짓을 봐야 한다. 미국의 전쟁과 점령은 이미 1990년대 내내 피폐해진 이라크인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했다. 전기·수도 등 사회기반시설도 보장되지 않았다. 경제는 사실상 붕괴했다.

이 때문에, 이라크인들이 미군을 환영할 것이라는 부시 정부의 예상과는 달리 점령 몇 달 만에 대중적 저항이 일어났다.

저항은 종파간 차이를 넘어 일어났다. ‘수니파 도시’ 팔루자뿐 아니라 ‘시아파 도시’ 나자프에서도 저항이 일어났다. 2004년 4월 시아파가 다수인 이라크군 제2대대는 팔루자 저항 진압에 맞서 항명하기도 했다.

이라크인 다섯 명 중 네 명이 동조하는 대중적 저항에 직면한 미국은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종파주의 갈등을 부추겨 점령을 지속하려 했다.

내전으로 황폐해진 경제 상황이 종파간 경쟁이 심해지는 물질적 토대가 됐다. 지역 토호나 종파주의적 민병대에 의지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상황(미국이 실시한 이라크 공공부문 민영화도 여기에 한몫했다) 때문에, 서로 대립하는 계급들을 한 종파로 묶기가 쉬워진 것이다.

게다가 전란으로 산업 구조가 사실상 붕괴했기 때문에, 집단적 투쟁으로 계급적 연대를 고취할 수 있는 노동계급 고유의 힘을 발휘하기도 어려웠다.

역사적으로 세속 좌파가 저지른 과오 때문에 이슬람주의가 점령 반대 운동을 주도했던 것도 중요한 정치적 한계가 됐다.

2004년 11월 미군의 팔루자 학살로 대중 저항의 기세가 꺾이면서 종파간 갈등이 격화됐다. 학살 직후 치러진 선거로 끔찍하게 종파주의적인 시아파 정부가 등장했다. 그리고 선거를 보이콧한 수니파와 점령에 부역한 일부 시아파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종파간 내전의 양상을 띠게 됐다. 이 속에서 강경 수니파 무장 저항 세력인 알카에다가 성장할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

알카에다는 미군을 상대로 작은 전과를 올리며 약간의 명성을 얻었지만, 지독한 종파성 때문에 대중적 인기를 얻기는 어려웠다. 한편 미국은 알카에다의 성장마저 종파간 갈등을 부추기는 빌미로 활용했다.

혁명

아랍 지역의 정세가 바뀌면서 새로운 국면이 찾아왔다. 변화의 첫째 중요한 계기는 미국 영향력의 쇠퇴다. 미국의 이라크 점령이 정치적·군사적으로 실패했음이 분명해지고, 설상가상으로 2008년 경제 위기 때문에 미국은 이라크에 돈을 쏟아붓기가 더 어렵게 됐다. 결국 2011년 미군은 이라크에서 철군했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같은 지역 강국의 상대적 지위가 높아졌다.

둘째 중요한 계기는 아랍 혁명이었다. 2011년 초 튀니지에 이어 이집트에서 대중 저항으로 친미 독재자 무바라크가 쫓겨나면서 아랍 전역이 혁명적 열기에 휩싸였다. 아랍 혁명은 알카에다 같은 세력의 입지를 좁히는 효과를 냈다. 대중 저항으로 아랍 지역 독재자들이 위기에 처하자 테러만이 대안이라는 생각이 설득력을 잃은 것이다.

대중 저항의 결과로, 무슬림형제단 같은 ‘이슬람 개혁주의’ 세력이 기존 자본주의 국가를 개혁한다는 전략에 따라 이집트·튀니지·리비아 등지에서 정부 공직을 차지하거나 국가 기구에 참여했다.[‘이슬람 개혁주의’에 대해서는 본지 135호 기사 ‘ISIS 등장으로 이슬람주의를 오해해선 안 된다’를 참고하시오.]

저항은 시리아·레바논·이라크로도 퍼져 나갔다. 이라크에서 2012년 대중 저항(‘이라크의 봄’)이 벌어지자 알카에다 세력은 성장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아랍 혁명이 소강 상태로 빠져들면서 상황이 다시 변했다. 이집트·튀니지에서 혁명의 결과로 정권을 잡은 ‘이슬람 개혁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체제 ‘정상화’를 바라던 지배계급 사이에 끼어 동요하고 노동자·민중을 배신하다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반혁명을 이끌었다.

‘이슬람 개혁주의’가 몰락하자 많은 사람들이 다시 테러 활동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런 정서와 맞물려, 시리아 독재자 아사드가 대중 항쟁을 무참히 짓밟는 한편 이를 종파 간 내전으로 뒤트는 것이 서서히 먹힐 수 있었다. 아사드는 다수 수니파가 자신을 비롯한 소수파(시리아 인구의 10퍼센트가량만 차지하는 알라위파)를 제거하려 든다며 종파주의적 선동을 했다.

혁명적 대중 운동은 주변으로 밀려났고, 너무도 종파주의적이라서 알카에다조차 성토한 아이시스 같은 세력이 성장했다. 수니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종파주의적 선동을 강화한 것도 여기에 한몫했다.

어느 순간 아이시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통제를 벗어났다. 2013년 하반기에 아이시스는 시리아의 주요 도시 라까를 차지했고, 군사적 명성을 얻었다.

그즈음 ‘이라크의 봄’ 운동이 정부의 탄압으로 끝내 위축되면서, 이라크에서도 아이시스에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라크의 봄’ 운동이 가장 융성했던 팔루자에서는 2004년과 같은 학살이 재현될 것을 두려워한 수니파 저항 세력 일부가 아이시스를 받아들였다. 이윽고 아이시스는 2014년 6월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을 점령하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안

아이시스는 전쟁과 내전으로 피폐해진 절망적 상황 속에서, 대중 저항의 패배로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진정한 해결책은 아이시스를 대신할 대중 저항이 아랍에서 부흥하는 것이다. 대중 저항이 성장할 때, 사람들은 종파주의를 배격하고 종단(기독교/이슬람)과 종파(수니/시아)을 넘어 단결하자는 호소에 더 잘 귀를 기울인다. 단결이 운동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집트·바레인·시리아에서 혁명이 터져나오자 하나같이 종파주의 반대 구호가 등장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011년 아랍 혁명의 발발 배경이 된 정치·경제 위기가 여전한 상황에서 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혁명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슬람 개혁주의’의 정치적 한계를 대신할 혁명적 정치세력이 필요하다.

파리 참사를 빌미로 한 제국주의적 개입은 중동 현지 혁명적 세력의 입지를 좁히고 아이시스 같은 종파적 세력이 성장할 기회만 줄 뿐이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난민 천대와 차별도 마찬가지다.

한국 같은 친미·친서구 나라의 좌파들이 제국주의적 개입에 단호히 반대하고, 서유럽 각국에서 자행되는 난민 천대와 차별에도 반대하는 것은 아랍에서 진정한 대안이 움틀 수 있도록 기여하는 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