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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E. K. 헌트의 경제사상사》:
신자유주의·주류 경제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

△《E. K. 헌트의 경제사상사》, E. K. 헌트/마크 라우첸하이저, 시대의창, 1,112쪽, 65,000원.

미국의 급진적 경제학자인 E. K. 헌트가 마크 라우첸하이저와 함께 저술한 《경제사상사》 제3판이 얼마 전에 번역 출판됐다. 이 책은 분량(1,112쪽)과 가격(6만 5천 원) 모두에서 부담을 느낄 만도 하지만 그럼에도 꼭 읽어 볼 만한 훌륭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의 제1판(E. K. 헌트가 혼자 쓴)이 김성구·김양화가 번역해 1983년에 출판된 적이 있지만 전두환 정권의 탄압 때문에 일부 내용이 삭제된 채 출판됐다. 더욱이 지금은 절판돼 구하기도 힘들다. 이번 3판은 이전에 누락된 것을 모두 복원했다. 또 홍기빈 씨가 번역한 이번 판본이 이전 번역본에 비해 훨씬 잘 읽힌다는 장점도 있다.

E. K. 헌트는 《경제사상사》 외에도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이매진) 등을 저술한 저명한 좌파 경제학자다. 헌트의 《경제사상사》는 아담 스미스부터 최근의 주류 경제 이론까지 2백50여 년의 경제학설을 핵심적으로 잘 요약해 놓았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어 함께 읽으면 좋을 책으로는 갤브레이스가 쓴 《경제학의 역사》(책벌레)가 있고, 자본주의 체제의 형성과정에서 경제 사상과 특히 노동가치론이 어떻게 확립됐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 고전인 아이작 일리치 루빈의 《경제사상사》(신지평)이 있다. 이 책은 아쉽게도 절판됐다.

E. K. 헌트가 쓴 책의 유용성은 신자유주의 주류 경제학의 지류들을 잘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핵심 내용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이후 ‘신고전파종합’이 다시 리버럴 신고전파 경제학과 보수적 신고전파 경제학으로 양분되는 과정과 이들 사이의 차이를 필자들은 이해하기 쉽게 요약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신자유주의 주류 경제학이라면 모두가 갖고 있는 근본적 모순을 잘 설명한다. 예를 들어 신고전파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한계생산성 이론에 따르면, 자본의 가격은 자본의 수익성으로 결정되며, 자본의 수익성은 다시 앞으로 낳을 소득인 자본의 생산성에 좌우된다. 그런데 자본생산성을 알기 위해서는 미리 자본의 가격이 결정돼야 한다. 결국 자본이란 자본 생산성에 의해 결정되지만 자본 생산성은 또다시 자본의 가격에 의존하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들은 피에르 스라파가 “신고전파 경제학에 구현되어 있는 효용 개념에 바탕한 공리주의 경제학의 지적 전통 체계 전체를 논리적, 이론적으로 완전히 초토화”한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신고전파 주류 경제학의 이론적 토대가 얼마나 취약한지는 C. E. 퍼거슨 교수의 말로 잘 드러나고 있는데, 그는 “신고전파 경제 이론에 의지할지 말지는 신앙의 문제”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역자 홍기빈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자본 개념이 무너지면서 주류 경제학의 체계가 근본부터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됐지만 이에 대해 주류 경제학자들은 신기(神技)를 부리고 있는데, 바로 침묵과 무시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저자들이 주류 경제학의 한계에서 벗어날 방안으로 마르크스가 발전시킨 자본주의 분석과 자본 개념을 소개하거나 연결시키지는 못한다는 점은 아쉽다.

약점

이런 약점은 3판의 변화된 내용에서도 반영돼 있는 듯하다. 저자들은 3판에서는 발라의 일반균형이론의 기술적 세부 사항(10장 부록), 해러드와 도마의 성장모델에 대한 설명(15장 부록), 솔로 모델(16장 부록)을 더 추가했는데, 그 내용들이 너무 학술적이다. 또 마지막 세 장을 업데이트하면서 제도주의, 포스트케인스주의 등 이른바 비주류 경제학의 흐름들을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발전에 대해서는 충분히 소개돼 있지 않다.

홍기빈 씨는 E. K. 헌트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자신의 중심적 입장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유럽 측 제도주의 흐름을 누락시킨 아쉬움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오히려 문제는 그 반대다. 저자들은 1990년대 이래로 전개된 신경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닷컴 거품의 붕괴와 2008년 세계경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분석한 성과들에 대해서는 주류와 여타 비주류 경제학의 최근 흐름만큼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은 방대한 경제학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신고전파 주류 경제학의 주요 내용과 그 모순들(자본 개념, 한계생산성 분배 이론의 문제, 신고전파 성장 이론의 문제 등)을 훌륭하게 비판하고 있다. 3판의 서문을 쓴 로빈 하넬은 자신의 젊은 시절, E. K. 헌트의 논문 한 편이 시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놨다고 회고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를 이해하고 신자유주의 주류 경제학도 나름 쓸모가 있다는 환상을 제거하는 데 훌륭한 무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