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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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교수
박노자는 내가 자영업자 서민을 “부르주아”로 보고, 그들을 배제한 채 “‘완벽한 리론’으로 무장된 ‘완벽한 로동자’만이 ‘완벽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사료를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역사가라면 당대의 텍스트도 이렇게 터무니없이 해석하고 판단해선 안 될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단체 밖 다른 활동가들이나 저술가들의 주장을 언제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해서 설명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면, 그러지 못한 경우도 많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박노자도 A4용지 7쪽밖에 안 되는 글을 오독해 놓고는 버젓이 SNS 상에 그릇된 논평을 공개하는 일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 오해를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나는 소자영업자들을 단 한 차례도 “부르주아”로 부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을 적대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물론 노동계급은 중간계급의 일부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중간계급 가운데 특히 영세 소농이나 영세 노점상, 철거민, 빈민 등은 노동계급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흔히 노동자의 가족일 뿐 아니라, 그들의 일부는 얼마 전까지 노동자였다가 실직한 사람이거나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족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처지이기가 쉽다.”
그리고 나도 소자영업자 등 서민층 중간계급 사람들이 노동계급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제 위기로 고통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지배계급이 자본주의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에 떠넘기는 과정에서 중간계급의 일자리도 불안정해지고 복지 혜택도 감축된다. 게다가 노동자의 이웃 주민으로서 그들의 환경도 파괴를 당한다. 그래서 중간계급의 일부도 자본주의의 일부 효과들에 적개심을 품게 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내 글은 천대받는 계급들과 집단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나는 그 연합의 내부 역학관계, 특히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사이의 동역학에 관심을 나타냈다. 레닌과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 개념을 바탕으로 한 관심사인 것이다.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관계 문제가 진정한 쟁점이다”라는 소제목 하에 이 문제를 논의한 단락도 있지만, 한 구절만 인용하면 이렇다:
“계급투쟁이 일어나면 이 집단도
[전통적 중간계급과 신중간계급 모두를 가리킴] 양대 계급 중 어느 한쪽으로 이끌린다. 노동자 투쟁이 강력할수록 이 계층 하층의 일부 사람들은 노동자 편으로 이끌릴 가능성이 커진다.”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민중주의적이었음을 언급할 때도 나는 오클랜드의 오큐파이 운동은 “부두 노동자 등 조직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오큐파이 운동”이었다고 특별히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렇다. 모든 진정한 혁명은 민중 혁명이다. 그러나 그 혁명을 이끈 게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와 영국 혁명이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처럼 부르주아지인 경우에는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것이고, 1917년 러시아 혁명처럼 노동계급인 경우에는 ‘사회주의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발전의 동역학이 이윤 시스템이고, 이윤의 원천이 잉여가치이고, 21세기 자본주의가 취하는 잉여가치의 압도적인 부분이 노동계급에서 나온다는 이론적·경험적 연구 결과를 보면, 헤게모니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노자가 노동계급의 현재 의식이라는 주관적 문제들을 제기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박노자는 노동계급의 현재 주관적 조건에 대해 우리가 낙관적 평가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실증적·이론적 반론을 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그 대신에 노동자연대의 “도그마주의”
도그마주의?
박노자는 나와 노동자연대를 “도그마주의”로 매도한다. 방법론 분야에서 도그마주의는 경험을 무시하고 교리
또한, 같은 호에 실린 김하영의 글은 지난해 민주노총 노조운동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민중주의적 경향의 사고·행동의 사례들을 예리하게 들고 있다. 박노자가 우리를 “도그마주의”라고 비판하려면 이런 경험들에 반대되는 반증과 함께, 더 나아가 자신이 지지하는 종류의 전술들이 효과적임을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할 것이다. 저 멀리 노르웨이에서 그저 언론과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한국 노동운동의 실상에 대해 정확하고 자세하게 아는 양 착각하면서, 국내 노동운동의 내부에서, 그것도 그 기층에서 분투하며 고민하는 투사들의 실제 경험을 무시하고 도리어 그런 사람들을 도그마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이야말로 도그마주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도그마주의 비판에 합리적 핵심이 있으려면, 인식의 절대성과 불변성을 부정하고 의심의 타당성을 긍정해야 한다. 운동하는 투사들이 전술 문제에서 이런 방법론적 회의를 구현할 수 있는 주된 수단은
그렇다고 해서 이 같은 인식론적 실용주의가 회의주의나 인식의 상대성을 지지하고 정치적 실용주의
사실, 방법 면에서 우리 단체 활동가들에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교리
특수성에 대한 오해
위에서 보았듯이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은 역사적 경험을 초월할 수 없는 데다 사회 관계들도 계속 변하는 것이므로, “완벽한 리론”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분석과 실천에
박노자는 이론이 나라별로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모든 이론은 상황화
그러나 “일국의 특수성들은 세계 경제의 운동 과정의 기본 특징들이 일국 내에서 독특하게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 일국 자본주의는 오직 세계 경제의 일부로서 이해해야 한다.” 박노자가 “한반도의 남반부”라고 부른 곳을 포함한 신흥국의 자본주의는 이언 록스버러가 지적했듯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게 아니라 제국주의 체제의 확립과 선진 자본주의 산업국들의 세계적 자본축적의 맥락 속에서 발전한 것이다.
일국적 특수성이 세계적 보편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더 예시하면 이렇다. 분단 문제는 미·소 두 초강대국이 세계를 양분한 당시 제국주의 체제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전쟁도 두 초강대국 간의 제국주의간 충돌이 한반도에 국한돼 벌어진 사건
“베네수엘라에 맞는 혁명리론”, “로서아의 력사적 경험에 맞는 혁명리론”, “한반도 남반부
박노자는 과거의 제3세계주의자들과 현재의 포스트식민주의자들처럼 일국의 특수성을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의 ‘보편적 특징들’ 위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하나의 전체
박노자가 이렇게 세계를 국민국가들의 단순한 총합으로 이해하는 바람에, 세계 자본주의와 분리된 실체로서 일국 자본주의가 박노자 머리 속에서 상정될 수 있게 됐다. 세계 자본주의와 분리된 일국 자본주의가 개념적으로 성립되니 일국 사회주의라는 퇴행적 공상도 개념적으로 성립할 수 있게 됐다. 그가 왜 각종 “우리식 사회주의”들을 실제의 사회주의 사회의 한 형태로 보는가가 설명된다.
1970~80년대 민중론의 발전적 계승?
일국적 특수성을 예외주의적으로 이해함에 따라 박노자는 우리에게 1970~80년대 민중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라고 주문한다. 물론 아무리 패러다임의 혁명을 이루며 등장한 이론이라 해도 이전 이론의 모든 측면을 전면 기각할 수는 없다. 레닌이 그의 저작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
하지만 계급투쟁 문제로 말하자면 소련 붕괴 전 각종 민중론들은 스탈린주의와 그 민중주의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건질 것보다는 버릴 것이 훨씬 더 많다. 레닌은 나로드니키의 영웅적 투쟁정신과 극도로 세밀하고 효과적인 조직 기술은 계승하면서도 그들의 테러리즘 전략이나 그 밖의 많은 것들은 이어받지 않았다. 나는 요즘의 한국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과거 한국 민중주의자들의 영웅적 투쟁정신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존한 옛 민중주의자의 대다수가 개혁주의자
그런데 박노자는 갑오농민전쟁
2016년 3월 6일 최일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