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일 ‘위안부’ 합의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일본 정부는 ‘위안부’에 대한 법적 책임을 부정하고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최근 일본 외무성 관리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출석해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이를 문제 삼지도 않았으며, 초등 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서술마저 축소시켰다. 한·미·일 동맹 강화에 이바지할 한일관계 개선을 ‘위안부’ 문제 해결보다 더 중시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학계에서도 《제국의 위안부》 출간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를 놓고 논란이 진행돼 왔다. 세종대 박유하 교수(이하 호칭 생략)는 《제국의 위안부》 등에서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이 있음을 부정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가 군국주의 일본 국가가 저지른 국가 범죄라는 점을 흐린다.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의 원인으로 종종 가부장제 또는 남성 중심 시스템의 문제를 내세우는데, 이 주장도 일본의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박노자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그 책에서는, 피해자의 눈물도, 그 눈물에 대한 저자의 그 어떤 자비의 마음도, 군대 성폭력 피해자의 눈물을 사회가 언젠가 닦아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박유하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 서문에서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나름대로 ‘사죄와 보상’을 했다”고 강변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이제까지의 20년 동안에는 오로지 소수의 관계자들의 생각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태도를 결정지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의견이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박유하는 정대협 등 ‘위안부’ 관련 단체 등의 활동으로 한일관계 ‘개선’이 지지부진하다고 보고, 이에 불만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이 없다는 (일본 우익들의) 주장을 수용하는 방식을 통해 양국 간의 이견을 좁힌 뒤, 일본 리버럴들이 요구하고 있는 타협안+α를 일본 정부가 수용하도록 결단을 촉구”(〈한겨레〉 길윤형 기자)하는 것이다. 즉,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방안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표현의 자유?

 

당연히 ‘위안부’ 피해자들은 《제국의 위안부》에 크게 분노했다. 특히, ‘위안부’를 19세기 후반 해외 성매매에 종사한 일본 여성을 가리키는 “가라유키상의 후예”에 견주거나,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다는 등의 헛소리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크게 모욕하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기한 출판 금지 가처분 재판에서도 법원은 이 진술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중대하게 침해한다고 옳게 봤다.

그럼에도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법적 다툼이 계속되는 와중에, 최근 박유하는 자신을 비판한 박노자 교수 등의 글에 대해 언론중재위에 ‘중재’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들이 박유하를 고소해 법원이 책 34곳을 삭제하라는 가처분 결정까지 내놓은 데 이어 검찰이 지난해 11월 박유하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하자, 《제국의 위안부》 문제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논쟁으로 번져 왔다. 몇몇 지식인들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선 안 된다’며 명예훼손죄 기소와 가처분 결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이 성명에는 홍세화, 장정일, 김규항 등 일부 진보·좌파 지식인들도 참여했다.

물론 좌파는 원칙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검열 없이 의견과 주장이 활발하게 교환되는 것이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사람들의 저항에 이롭기 때문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지배계급의 착취와 지배에 맞서 노동계급이 비판의 무기를 휘두르는 데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다.

예컨대 얼마 전 예술가 홍승희 씨는 ‘사요나라 박근혜’라는 제목의 박근혜 풍자 그림 등을 그렸다는 이유로 검찰 소환 통보를 받았다. 홍승희 씨가 박근혜를 풍자하는 것은 권력자들의 탄압 등 불이익을 무릅쓴 용기 있는 행동으로, 그에게는 얼마든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탄압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에 한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주류 일간지 1면에 동성애 혐오나 무슬림 혐오를 조장하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린다면, 이를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고 용인해야 할까? 프랑스 시사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비극적으로 숨진 시리아 난민 아동 아일란 쿠르디가 죽지 않고 성장했다면 독일 여성을 성폭행하는 원숭이가 됐으리라는 내용의 추악한 만평을 게재한 바 있다. 이런 것을 표현의 자유라고 옹호해선 안 된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논할 때 구체적 맥락을 따져야 한다. 즉, “누구의 자유이고 무엇을 하려는 자유인가”를 물어야 한다. 노동계급을 이간질하거나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발언과 주장까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옹호할 수는 없다.

《제국의 위안부》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진실을 종합해 볼 때 ‘위안부’ 문제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가 조직적으로 자행한 성노예 범죄였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 국가 범죄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의 피해를 제대로 호소하지 못한 채 침묵해야 했다.

지금도 한·일 지배자들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천대하고 있다. 아베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행태를 계속 자행하고 있으며, 박근혜 정부는 사실상 이를 방조하고 있다. 이렇게 ‘위안부’ 피해자들이 입은 상처에 《제국의 위안부》는 소금을 뿌리는 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국가가 박유하의 입에 재갈을 물리라고 좌파가 앞장서서 요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로서는 박유하를 막을 뾰족한 수단이 딱히 없었을 수 있고, 더구나 기왕에 법적 분쟁으로 비화한 마당에 언론·출판의 자유 운운한다는 것은 박유하를 사실상 엄호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일부 좌파 인사들이 이런 책을 표현의 자유 프레임으로 옹호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지지하는 사회운동과 진보적 대의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김영익(〈노동자 연대〉 신문 편집팀을 대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