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급속히 둔화하고 조선과 해운산업의 구조조정이 추진되면서 ‘한국판 양적완화’가 쟁점으로 부상했다. 새누리당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강봉균이 ‘한국판 양적완화’를 처음 제안했는데, 그 내용은 한국은행이 산업은행 채권을 매입해서 기업 구조조정을 지원하고, 주택담보부증권(MBS)도 매입해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낮춰 가계 부채 부담을 완화하자는 것이었다.

총선 뒤 ‘한국판 양적완화’는 위기에 빠진 대우조선해양 등 조선사들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부실을 메워 주기 위한 방안으로 정부에 의해 다시 제안됐다. 지난 6월 8일 기획재정부, 금융위 등이 조선업과 해운업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하면서 이른바 ‘한국판 양적완화’ 방식이 구체화됐다. 한국은행이 직접 산업은행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국은행과 정부가 각각 11조 원과 1조 원을 출자해 특수목적법인(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을 만들고 이 특수목적법인이 산업은행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이다. 특수목적법인이 중간에 삽입되긴 했지만 앞에서 강봉균이 말한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한국판 양적완화’

한국은행이 산업은행을 지원하는 것을 두고 양적완화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논란이 생겨났다. 경제 전반에 효과를 발휘하는 선진국의 양적완화와 달리, 조선·해운 구조조정처럼 일부 산업 지원을 위한 정책을 두고 양적완화라 부를 수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래서 일부 경제학자들은 ‘한국판 양적완화’가 아니라 ‘한국은행 특별융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타당한 지적이다. 그럼에도 이 지적은 ‘한국판 양적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에는 답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양적완화를 요구해 온 정부의 압박으로 한국은행은 최근 기준금리를 1.5퍼센트에서 1.25퍼센트로 낮췄다. 그러나 이윤율이 매우 낮기 때문에 금리를 약간 낮추더라도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게다가 금리 인하는 경기 부양 효과도 내지 못한 채(유동성 함정) 다른 부작용, 즉 가계 부채 상승과 자산 거품 확대, 외국 자금 유출과 환율 급등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미국이나 일본 또는 유로존 국가들처럼 서방의 기축통화국만이 양적완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비판도 존재한다. 부도 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양적완화로 구제하는 것이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파산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도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실제로 위기에 처하면 국가가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인정해 왔다. 2008년 미국 금융 위기 때, 이전까지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해 온 부시 정부가 대대적인 금융·기업 살리기에 나선 것을 보라. 오늘날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의 규모가 커져서 대기업을 파산하도록 내버려 두면 국민국가와 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너무 크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도 경쟁력이 떨어진 대기업에 지원하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내핍을 강요하는 데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효과가 있을 수 있다. 부도 직전인 기업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할 때 이런 무기를 내밀곤 했다.

중앙은행이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대로라면, 자본주의 경제가 자기조절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중앙은행은 경제성장률에 비춰 필요한 통화를 공급해 주는 구실만 해야지,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를 인하하거나 통화량을 늘리는 정책은 경제에 부작용만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적절한 통화를 공급해 주면 경제가 원만하게 발전할 것이라는 통화주의적 주장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올바름이 입증되지 못했다. 또한 중앙은행은 근대 국민국가가 통제하는 지리적 영역 내에서 통화를 관리하고 조율하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에 그 탄생부터 지금까지 국가로부터 독립성을 누린 적이 없다.

재벌 살리기

그럼에도 사회주의자는 ‘한국판 양적완화’를 지지할 수 없다. 특히, 미래의 노동자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고, 현재의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재벌과 채권단에게는 손실을 벌충해 주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구제금융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대부분은 부실 기업주들의 책임을 묻지 않은 채 기업 부실만 털어줬고, 그 때문에 재벌만 이득을 봤다.

조선·해운업 지원뿐 아니라 부도 위험에 처해 있는 금호아시아나, 웅진, 동양, 한진, 동부 같은 재벌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판 양적완화’가 실시된다면 결국 재벌 오너들이나 채권단이 수혜자가 될 것이고, 노동자들은 고통만 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STX조선은 4조 5천억 원을 지원받았지만, 그중 3조 7천억 원이 채무·이자 상환으로 채권단 손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2013년과 2015년에 STX조선은 대규모로 인력을 감축해 정규직 인력의 무려 42퍼센트를 줄였다.

최근에도 박근혜는 노동개혁을 외치며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하고 있고, 조선업 채권단들은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과 해고를 구제금융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더욱이 어떤 형태이든 양적완화가 경기회복에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본지 174호 기사 ‘한국판 양적완화 ─ 세계적으로 이미 실패한 정책’을 참조하시오.)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판 양적완화’가 아니라 부실 기업들을 국가가 인수해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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