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올해는 ‘해방 6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현대사는 제국주의 억압 때문에 생긴 민족 모순과 자본주의 성장에 따른 계급 모순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 동안 한국 현대사에 대한 해석은 미국과 소련에 대한 태도, 남한 정권 지지인가 북한 정권 지지인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나뉘어 왔다.
우파는 대체로 미국의 구실을 긍정적으로 묘사해 왔다. 좌파는 대체로 스탈린주의에 호의적인 평가를 내려 왔다.
이것은 서로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 이런 역사관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분노, 저항이 부차적이거나 왜곡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바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입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다함께〉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연재할 계획이다.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함석헌), “참으로 거짓말같이 그 날은 오고 말았다”(홍윤숙), “대중적 반전 투쟁도 이루지 못한 채로 8월 15일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이하였소”(박헌영). 이들의 진술은 ‘해방’의 모순적 성격을 보여 준다.

일본 제국주의의 물리적 힘은 조선 민중 혼자만의 투쟁으로는 물리치기 어려웠다. 일본이 식민지에 대해 유럽 제국주의보다 훨씬 직접적인 통제를 가한 점(이것은 조선이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도 한몫 했다)과, 조선의 자본주의가 이제 막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저항의 힘을 근본으로 제약했다.

가뜩이나 취약했던 (민족)부르주아지는 일본의 지배 체제에 거의 무기력하게 흡수돼 있었다. 조선의 노동계급은 종종 영웅적인 희생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지만, 1930년대 후반 이후로는 거의 궤멸적인 탄압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장개석의 후견을 받은 임시정부가 있었지만, 대중적 기반이 없는 망명객 집단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채 쇠퇴해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친북 좌파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김일성은 보천보의 소규모 전투 이후 일본의 토벌을 피해 연해주로 도주했고, 해방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 주지 않았다.

일본의 패배는 식민지 조선의 민중에게는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 준 것이었지만, 제국주의 열강의 생각은 달랐다.

크리스 하먼이 지적했듯이, 당시 “대부분의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은 제2차대전을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전쟁이라고 봤다.” 그래서 에릭 홉스봄은 2차대전을 “19세기였다면 ‘진보와 반동’이라고 불렀을 나라들 사이의 전쟁”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좌파들과 다수 민족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연합군 지배자들의 전쟁 동기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전쟁 전이나 전쟁 중에나 그들은 학살 위기에 처한 유대인을 구하기 위한 행동을 묵살했다.

그래서 히틀러의 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는 1942년 12월 13일자 일기에 이렇게 쓸 수 있었다. “나는 영국인들이나 미국인들이 마음 속으로는 우리가 유대인 쓰레기들을 말살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고 믿는다.”

공황은 국가 간 경쟁을 격화시켰다. 각국의 지배자들은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들의 희생을 통해 자신이 받는 압력을 덜려고 했다. “그들은 앞 다투어 제나라 통화의 가치를 낮추고 관세장벽은 높여서 상품을 더 많이 내다팔려고 애썼다.” 이것은 곧 열강이 지배하는 블록화 -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 독일, 그리고 소련 - 경향을 강화했다.

제2차세계대전의 본질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충돌이었고, 전후 점령 정책은 그들 간의 ‘세력권’ 재분할이었다.

스탈린은 1945년 여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들과 나눈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말했다. “이 전쟁은 과거와는 다르다. 누구든 어떤 영토를 점령하면 그 곳에 자신의 사회 체제를 심는다. 누구든 자기의 군대가 미치는 곳까지 자신의 고유한 체제를 이식하고 있다.”

그래서 한반도 분단에 대한 책임이 “미국에 더 많은가, 소련에 더 많은가”, 또는 “분단고착은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 하는 논쟁은 ‘냉전 좌·우파’들을 제외하면 별로 설득력이 없다.

한반도의 운명은 이미 1943년경부터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로즈벨트는 테헤란 회담에서 한국을 완전 독립시키기보다는 40년 간의 신탁통치를 거치게 할 것을 소련에 제안했고, 소련은 이를 찬성한 바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1943년부터 [미국]국무성의 계획관들은 한국이 소련 수중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리고 1944년부터 한국에 대해 부분적인 혹은 완전한 점령을 계획하기 시작했다”고 썼다.

소련 역시 마찬가지였다. 1945년 6월의 ‘코리아에 대한 짧은 보고서’에서는 “동방에서 소련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담보는 소련과 코리아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긴밀한 관계”의 모델은, 한두 달 전에 소련이 점령지에 세운 위성국들이 될 것이었다.

38선이 확정된 시기는 유럽 전선이 어느 정도 정리된 즈음으로 보인다.

미국은 노르망디 상륙 때까지 소련군이 독일군을 약화시킨 것처럼, 수적으로 우세한 중국의 장개석 군대가 미국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전까지 일본군을 지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부패한 “국민당의 군사적 성과는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1944년에 이르러는 그들로부터 어떠한 기대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존 루이스 개디스)

차선책은 소련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참전을 약속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대가로 1905년 일본이 러시아를 패전시키기 전까지 러시아 황제가 관할하던 동북아시아의 세력권을 회복시켜주겠다고 얄타에서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이 원자탄 실험에 성공하자 상황이 변했다. 미국은 이제 스탈린의 지원 없이도 일본을 패퇴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리히트 하임은 “일본의 점령에서 한몫을 차지하려는 포츠담에서의 스탈린의 요구는 미국을 당황하게 했으며 미국인들은 분명 스스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내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고 썼다.

그래서 미국은 이미 항복 의사를 밝혀 온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일본 열도 전체를 소련과 나누기보다는 미국이 혼자서 점령하겠다는 뜻이었다.

한반도를 향한 소련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다.

신용하는 “소련의 8월 8일 대일본전 참전은 공식적으로 얄타회담과 포츠담 회담의 약속을 지킨 것이기는 하지만, 만주에서의 군사 작전과는 달리 한반도 북부에의 급속한 육군의 상륙과 점령작전은 순전한 군사 작전이기 이전에 포츠담 회담에서 대일본전 참전의 대가로 밀약한 기득권 설정을 위한 정치 작전의 ‘속도’ 경쟁의 군사적 표현이라고 보이는 것”이라고 썼다.

일본의 항복이 확실해지고 일본 본토를 공격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트루먼은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38선을 제안했다.

소련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38선을 획정한 인물 중 하나인 미군 참모 딘 러스크는 “소련이 불응하면 위도를 하나 더 내려 분할선을 수정할 구상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소련의 쾌락을 받고 상당히 놀랐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이것을 거부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소련은 동유럽 분할 협상을 둘러싸고 다른 열강과 당장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소련은 처칠과 1944년 협정을 맺었다. 루마니아의 경우 90퍼센트는 소련이, 그리스의 경우 90퍼센트는 영국이, 불가리아의 경우 75퍼센트는 소련이,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에는 50퍼센트를 소련이 차지하는 데 동의했다.

스탈린은 ‘이탈리아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진정시키며 선동하지 말아 달라’는 처칠의 요구에 동의했다. 한반도는 유럽에 비해 여전히 부차적이었다.

더 직접적으로는, 일본 점령에 대한 자신의 지분을 미국에 요구하기 위해서는 타협이 필요했다. 당시 스탈린은 일본열도 전체를, 그것이 안 된다면 홋카이도만이라도 미국과 공동 점령하기를 원했다.

소련의 이런 모습에 대해 리히트 하임은 그의 책 《유럽현대사》(백산서당)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레닌이 살아서 이것을 보았다면 그는 이 또한 제국주의라 비난했으리라.”
그런 점에서 “조선은 8월 15일 ‘해방’된 것이 아니라, 분할 재점령당했다고 봐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미국과 소련 제국주의는 조선 민중의 자생적 진출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9월 4일 미 점령군을 이끈 하지는 자신의 장교들에게 한국이 “미국의 적이며” 따라서 “항복의 조례와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라고 지시했다.

소련 점령군이 취한 조치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소련군은 ‘조선은 조선인민의 것’이라는 그들의 입발린 말과 달리, 점령 초기에 북한 노동자들의 자주관리 운동을 분쇄했다.

그러나 분할 점령된 한반도에서 “두 강국 모두는 상대방의 구상의 실패에 이익을 가지고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은 미국과 소련을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시켰다.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사태는 바로 양대 강국 사이에 가시화한 냉전에 의해 전개됐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냉전은 제국주의 지배라는 진정한 본질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그 적대 양세력으로 하여금 엄청난 위선과 엉터리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의 명분은 그들이 사회주의를 촉진시킨다는 것이었고 미국의 구실은 그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양측 모두 그런 식의 대결인 양 주창하는 데 진지했던 것이다.”(리히트 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