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이 대통령궁을 에워쌌다. 그들은 증오의 대상이던 백만장자 대통령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의 퇴진을 요구했다. 며칠 후 그는 불명예 퇴진하고 마이애미로 도망가야 했다.
몇 주 동안 계속된 대규모 파업과 거리 전투의 정점이던 그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대중 파업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 사례였다.
대중 파업은 머나먼 이역만리에서나 일어나는 에피소드도 아니고 역사책 속에나 나오는 케케묵은 이야기도 아니다. 지난 5년 동안 유럽에서는 대중 파업이 일어났던 나라들이 아니라, 대중 파업이 일어나지 않았던 나라들이 예외였다.
그런 파업들은 얼마나 중요한가? 어떤 상황에서 대중 파업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대체하기 위한 투쟁을 대중 파업이 도대체 어떻게 진전시키는가?
이런 논쟁들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비슷한 논쟁이 19세기에도 격렬하게 벌어졌다.
1905년 1월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련의 놀라운 사건들은 이런 논쟁의 양상을 바꿔 놨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푸틸로프 기계 공장에서 전투적인 노동자 네 명이 해고된 것에 반발해 시작한 파업이 도시 전체의 대중 파업으로 확산했다.
다양한 공장과 작업장의 노동자 약 15만 명이 그 투쟁에 참가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 언론과 집회의 자유, 농민에게 토지 분배,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요구했다. 전에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파업들이 벌어진 적이 있었지만, 이토록 광범하고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파업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며칠 뒤, 약 20만 명의 파업 노동자들이 짜르의 동궁으로 행진했다. 짜르의 군대가 군중에게 발포했고, 뒤이어 기병대가 사람들을 습격했다. 적어도 1천 명이 살해당했고 거의 2만 명이 부상당했다.
그 학살이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됐고, 이 사건들에서 영감을 얻은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사상을 구체화시켰다. 룩셈부르크는 당시 독일의 대규모 노동계급 사회주의 운동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폴란드 태생의 혁명가였다.
1906년 룩셈부르크는 《대중 파업, 정당, 노동조합》이라는 팸플릿을 썼다. 오늘날까지도 이 팸플릿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대중 파업이 하는 구실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분석으로 남아 있다.
팸플릿의 많은 부분에서 룩셈부르크는 1905년 사건들의 복잡한 과정과 결과를 자세히 분석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그녀가 끌어 낸 세 가지 이론적 결론은 대중 파업을 전술과 무기로 이용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둘러싼 그 전의 빈약한 논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첫째, 룩셈부르크는 대중 파업에 대한 이전의 분석들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투쟁은 개별 공장이나 산업에서 벌어지는 임금이나 일자리 등등 노동조건을 둘러싼 투쟁을 말한다.
정치투쟁은 정치적 권리나 국민연금 정책을 둘러싼 투쟁 또는 사람들이 증오하는 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는 투쟁 등이다.
룩셈부르크는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주장했다. 《대중 파업》에서 그녀는 “이 둘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고 썼다.
“모든 정치투쟁의 고양기 뒤에는 수많은 경제투쟁의 싹을 틔우는 기름진 퇴적물이 남는다. 또한, 역으로, 끊임없는 경제투쟁 덕분에 정치적 휴지기마다 노동자 투쟁이 활력을 유지한다.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에 새로 활력을 불어넣는, 노동계급 역량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다.
“경제투쟁은 운동을 하나의 정치적 초점에서 다른 초점으로 이동시킨다. 정치투쟁은 빈번히 경제투쟁을 위한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경제적 요인들과 정치적 요인들은 러시아 노동계급 투쟁의 동전의 양면이다. 둘의 결합이 바로 대중 파업이다.”
룩셈부르크 주장의 핵심은 흔히 한두 부문의 노동자들이, 예컨대 한 가지 정치적 문제를 둘러싸고 투쟁을 벌이는 데서 대중 파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신감을 얻어 흔히 첫번째 집단의 요구와는 다른 그들 자신의 요구를 제기하게 된다.
전에 어떤 행동도 취한 적 없는 집단들이 가장 기본적인 노동조합 문제들을 제기할 수 있다. 또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도약해 근본적인 정치적 변화를 요구할 수도 있다.
1905년에 일부 집단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다른 집단들은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했다. 그러나 짜르의 퇴위를 요구한 집단들도 있었다.
둘째, 룩셈부르크는 대중 파업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작용을 통해 보수적인 이데올로기 ― 노동자들이 체제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 를 무너뜨리기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서로 다른 산업 사이의 전통적인 경계가 무너진다.
“노동계급 전체가 어떤 직접적인 정치 행동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조직해야 하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이 공장과 작업장, 광산과 주물공장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일상적 멍에가 강요하는 작업장들 사이의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더욱이, 대중 파업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노동자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드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같은 이데올로기에 도전한다.
공동의 투쟁 경험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염원을 끌어올리고 그들의 집단적 힘에 대한 자신감을 강화한다.
“그리고 얼마나 높은 이상으로 노동자들이 도약하는가! 그들은 투쟁하는 동안에는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생계수단에 대한 고민을 제쳐놓는다.
“그들은 기술적 준비가 완벽했는지 아닌지 따지지 않는다. 일단 정말로 심각한 대중 파업의 시기가 시작하면, 이 모든 ‘비용 계산’은 양동이로 바다를 재려는 시도와 비슷한 것이다.”
물론 룩셈부르크는 일상적 시기에 파업 노동자들이 집세나 융자금을 낼 수 있을지, 일자리를 잃게 되지는 않을지, 아이들을 위해 충분히 돈을 모을 수 있을지, 그 밖의 수많은 걱정거리들을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중 파업의 위력은 노동자들이 새로운 자신감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려운 시기를 맞을 것임을 알지만, 더 커다란 군대의 일부로서 어려움을 견뎌 낼 준비가 돼 있다.
이것은 룩셈부르크의 세번째 통찰로 이어진다. 대중 파업 때문에 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 스스로 변화해, 자신들의 염원을 더욱 키우고 사회를 운영하기에 적합한 계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중 파업의 다른 역사적 사례에서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폴란드 그다인스크 조선소 점거 투쟁의 특징은 대중문화 행사가 대규모로 벌어졌다는 것이다.
작가 조합은 야간 강좌를 열었고, 약 1만 명의 노동자가 시 낭송회나 독서모임 들에 참가했다. 재즈 연주회나, 유명한 영화감독 크쉬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강연회에도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대중 파업은 민주적인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보여 준다.
1995년 프랑스 대중 파업 당시 드뢰 시에서 일어난 일은 이런 활력과 정신을 잘 보여 준다.
“철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총회를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 언론과 민주적 조직들에게도 널리 개방함으로써 쥐페 정권의 계획에 맞선 투쟁을 개방적 형태로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 운동 때문에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파업노동자들이 다 함께 모일 수 있었다. 이것은 더는 ‘그들만의’ 운동이 아니라 ‘다 함께’ 하는 운동이었다.”
대중 파업은 다른 사회를 위한 투쟁과 오늘의 투쟁을 잇는 다리다. 대중 파업은 노동자들의 힘을 보여 주고, 노동자들에게 미래를 힐끗 보여 주며,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만들어 낸다.
오늘날의 개별 파업들에서도 대중 파업의 모습이 힐끗 드러난다. 이탈리아의 자동차 대기업 피아트는 2004년 봄 3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한 국가적 파업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한때 피아트 공장 중 한 곳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생산이 중단됐다.
그 파업을 촉발한 것은 이탈리아 최남단 멜피의 노동자들이었다. 피아트 회사는 정확히 10년 전 그 지역에 전투적 노동자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그 곳에 공장을 열었다.
그러나 일단 파업이 시작하자 노동자 총회가 날마다 열려 정말로 민주적인 사회의 모습을 잠깐씩 보여 주었다.
1905년에 대중 파업은 소비에트[노동자 대표들의 평의회]를 탄생시켰고, 소비에트는 삶의 모든 측면을 조직하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는 기존의 사회 운영 방식에 대항하는 새로운 권력 형태였다.
대중 파업은 개혁을 위한 요구에서 시작할 수 있지만, 그 끝은 혁명을 향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