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는 이주민 통제와 국경 단속 강화를 주장한다. ‘국경은 신성불가침’이라는 주장도 흔히 동원된다. 그러나필 마플릿은 엄격한 국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본주의와 함께 등장한 것이고 국경 단속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노동자와 빈민이라고 주장한다.


왜 오늘날 국가들은 국경을 그리도 중시할까? 왜 정치인들과 언론은 “국경 단속”에 그리도 목을 맬까? 국경을 경계로 일부 사람을 배제하겠다는 생각에는 어떤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일까?

근대 초기인 17~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지역 왕국과 공국 사이의 경계는 모호했다. 국경을 단속한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다. 지역 경제가 유지되려면 상품과 사람이 오가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인구 대부분은 땅에 매여 있었지만 상인, 장인, 날품팔이, 보따리 장수, 선원, 성지순례자 등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이런 상황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절대” 왕정들은 점차 중앙집권적 통제수단을 동원해 종교적 통일성을 확립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신자와 배교자라는 딱지를 붙여 추방했다. 가톨릭을 따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유대인과 무슬림 수백만 명이 쫓겨났고, 이후 프랑스에서는 칼뱅주의자들이, 영국에서는 종교적 반대파와 정치적 급진파들이 쫓겨났다. 대부분은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일대의 식민지로 보내졌다. 이처럼 특정 종류의 사람들을 축출하거나 포함시키는 과정에서 국경이 중요한 수단으로 부상했다.

이런 추세는 산업 자본주의의 등장과 맞물려 신생 민족국가들이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더욱 뚜렷해졌다. 곳곳에서 자본가 계급이 부상하면서 사유 재산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확립할 체제 구축에 나섰다. 또한 산업화·도시화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이동했는데, 그 흐름을 통제하려 했다.

자신들의 그런 시도를 정당화하고 관철시키기 위해 지배자들은 “민족(국민)”을 내세웠다. 민족은 언어, 종교, 풍습에 따라 구별되고 각종 설화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의 조상을 따르고 동고동락해 왔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이익공동체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부추겼다. 실제로는 직접 만나거나 소통한 적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동일한 집단의 일부이고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 점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주장했다.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와 같은 초기 민족국가의 지배계급은 국경 내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영국인, 네덜란드인, 프랑스인이라는 생각을 심어주려고 상당한 에너지를 들였다. 또 지배계급은 군대, 사법부, 경찰, 감옥 등 억압적 국가 기관들을 만들었다. 이 기관들은 당시 점차 커지던 계급투쟁에 대응하는 동시에, 특정 언어나 지역에 기반한 세력을 “내부의 적”이라고 탄압함으로써 민족적 통일성을 확립하는 구실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민족적”이지 않은 말이나 방언들(독일어, 브르타뉴어, 카탈로니아어, 오크어, 프로방스어)을 탄압하거나, 대도시에서 사용하는 ‘정통’ 프랑스어의 변종으로 폄하했다.

이들 새 지배자들은 민족적 정체성, 다시 말해 누구는 민족에 속하지만 누구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토착 귀족, 교회, 종단처럼 과거에 사람들이 충성을 맹세하던 대상보다 민족의 상징물을 더 중요한 것으로 부각시켰다. 특정 깃발이나, [영국의] 브리타니아나 [프랑스의] 잔다르크와 같은 “민족의 어머니”나 “아버지”, 민족의 업적과 우월성에 관한 각종 설화가 그 구실을 했다.

국경은 지리적 수준에서 민족 개념을 나타내는 구실을 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됐다. 국경을 기준으로 “민족”에 속할 자격이 주어졌다. 동시에 국경은, “민족”에 속하지 않아 배제할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문제도 낳았다. 이윤 추구에 혈안이 된 자본가들에게 민족이라는 개념이 항상 안성맞춤은 아니었다. 자본가 계급은 민족국가를 필요로 하지만, 민족주의를 어떤 방식으로 부추길지, 국경 단속(통제력을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의 일환)을 어떻게 실시할지를 두고서 그들 안에서도 이견이 발생했다.

영국에서는 이런 지배계급 내 이견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는데, 자유무역과 보호주의에 관한 논쟁이나 외국인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문제에 대한 격한 논쟁 등이 그렇다. 19세기 중엽에 일부 영국 정치인들은 이주를 전혀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정치인들은 [독일 출신의] 카를 마르크스 같은 체제 전복세력이 런던에 살고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이주민들 때문에 민족이 위협받는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 본인은, 민족주의적 감정이나 배타성의 정치가 자본가 계급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고 1870년에 썼다. 아일랜드인들을 향한 적개심이 잉글랜드 노동자들 사이에 만연한 것을 두고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런 적개심을 지탱하고 키우려는 인위적 노력이 언론과 교회와 만화, 다시 말해 지배계급 수중에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동원되고 있다.”

“이러한 적대 관계야말로 영국 노동계급이 자신의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무기력한 비밀이고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자본가 계급은 이 사실을 아주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국경에 관한 정치는 민족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둘 다 국가를 강화하는 구실을 하지만 동시에 자본가 계급의 일부가 이윤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

19세기 중엽 미국 정부는 건물과 철도를 짓기 위해 중국인 수백만 명이 이주하도록 주선했다. 이들 이주민은 미국 자본주의가 빠르게 성장하는 데 핵심적 구실을 했다. [그런데] 남북전쟁 이후 민족주의 감정과 함께 중국인을 겨냥한 인종차별이 고조됐고, 1882년 의회는 ‘중국인 배척법’을 통과시켰다. 중국인들의 이주 행렬은 끊겼고, 핵심적 경제 부문의 사용자들은 커다란 인력난에 부딪혔다. 사용자들은 일본과 이후 멕시코에서 노동력을 끌어오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런 식의 모순은 반복돼 나타났다. 지배계급 한 분파는 국경 단속 강화를 주장하며 이주민 배척 캠페인을 벌인다(포퓰리스트 정치인이 연계된 경우가 흔하다). 반대편에서 다른 자본가들은 자유로운 이주를 주장하는데, 대체로 값싼 노동력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세계의 주요 민족국가들은 제1차세계대전을 벌이며 충돌하고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국경 단속 열기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강화됐고,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여행을 할 때 여권과 비자를 요구하는 조처가 처음으로 도입됐다.

1920년대 국제 이주 규모는 전쟁이 터지기 전과 비교했을 때 크게 줄었고, 국경 단속 때문에 향후 20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민족국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 이 시기에는 “외인”을 겨냥한 포퓰리스트 캠페인들도 횡행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멕시코에서 온 이주민들이 괴롭힘에 시달렸고 추방당했다.

이런 국경 단속은 시장의 요구 때문에 점차 기세가 누그러졌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민간 사용자들뿐 아니라 국가의 공공기관들도 먼 곳에서 많은 노동력을 끌어오려고 경쟁하면서 국제 이주 규모는 다시금 커졌다. 서유럽 정부 기관들은 남유럽과 식민지에서 이주민들을 데리고 왔다. 미국에서는 정부 기구가 나서서 중앙아메리카에서 오는 이주를 관장했다. ‘브라세로 프로그램’은 그 일환이었는데 이를 통해 멕시코인 수백만 명이 건설, 농업, 서비스 부문에서 일하게 됐다.

세계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지배계급 대부분은 이주를 제약하는 건 경제에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여겼다. 한때 신성하다고 여겨졌던 국경은 무시됐고 출입국 심사는 생략됐다. 미국에서는 사용자들이 고용법을 어기고 “불법” 이주민(공식 허가 없이 국경을 넘어선 사람들)을 고용하더라도 용인됐다.

프랑스는 “미등록” 이주민 유입을 격려했고 설령 공식적 규정을 따르지 않아도 개의치 않았다. 1960년대에 프랑스에 들어 온 이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법적으로는 “불법”인 경로를 통해 입국했다. 1966년에 사회부 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공식 이민 그 자체를 해롭다고 할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관련 규정과 국제 합의를 엄격하게 지키면 노동력 부족에 봉착할 것이다.”

국경 정책은 경제 상황이나 국내 정치 세력 관계 또는 대외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1970년대 초 전후 호황이 끝나자 많은 국가들이 국경 단속을 재개하려 들었다. 이전까지 수백만 노동자를 받아들였던 국가들이 이제는 “흐름”을 끊고 이주민을 추방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유럽의 경우, 유력한 사용자들이 이전 시기 동안 특정 나라들에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에 의존하게 됐고 그래서 이주민 제약을 꺼린 것이다. 그뿐 아니라 (미국 정부가 1930년대에 깨달았듯이) 이주민들도 나름의 기대와 열망을 안고 들어 온다. 이주민들은 새로 도입되는 단속을 우회하는 방법을 찾았는데, 경제 위기의 충격이 선진국보다 자신들의 모국에서 더 크다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남반구에서 이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오늘날의 밀입국 네트워크는 바로 이 시기에 생겨났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이런 네트워크가 생긴다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심지어 장려했다.

당시 유럽을 찾는 이주민들은 대부분 노동시장으로 순조롭게 유입됐고, 1990년대가 되자 유럽의 모든 주요 경제국들이 수많은 미등록 이주민에 의존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불법” 이주민 수백만 명이 체류권을 얻거나 시민권까지 획득하며 제도적으로 인정받았는데, 이주단체들의 요구뿐 아니라 사용자들의 강력한 로비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런 조처는 공인된 경로뿐 아니라 비공식적 경로로도 이주가 이뤄진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었다. 두 경로는 갈수록 긴밀해졌고 모두 사용자들에게 이익을 안겨 줬다.

일부 국가들은 “비정상적” 이주를 제약하려 할 때 유력한 사용자 단체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이탈리아 사용자연합은 정부가 “(발칸 반도, 아프리카, 인도 반도에서 오는) 노동자들의 유입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 하고 입장을 냈는데 그 노동자들이 “실업자들조차 거부할 저임금을 수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민족국가는 오래 전부터 이주민을 내치는 동시에 받아들였다. 둘 중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현지 자본주의의 요구와 민족주의 감정 중 어느 쪽이 상대적으로 강하냐에 따라 달라져 왔다. 말하자면, 해마다 날짜가 바뀌는 종교 관련 공휴일처럼, 국경 단속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가시적으로 이뤄질지는 그때그때 달랐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국경 단속이 정치적으로 중요해졌다. 경제 위기가 닥치고 사람들의 변화 열망이 커지자 각국 정부는 불안정해졌다. 그래서 부자와 특권층의 책임을 전가하는 수단으로 국경 단속을 이용했다.

많은 선진국들은 극우의 주장을 채용해서 이주민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조장했다. 사용자들이 소리 높여 이주 노동력을 요구하는 이탈리아에서도 정부는 난민을 체포하고 추방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신파시스트 조직인 ‘북부동맹’은 이에 동조하며 모든 이주민을 대상으로 식별 코드를 문신으로 새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1930년대 나치의 행태를 재현하자는 주장이 거리낌없이 제기되는 것은 정부의 공식 정책이 그런 야만적 정치에 문을 열어 줬기 때문이다.

일부 이주민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국경을 넘을 수 있다. 변칙적으로 입국하거나 체류 허가가 없어도 사면되거나 용인된다. 그러나 많은 이주민의 경우 갈수록 가혹해지는 이주 정책에 시달린다. 각국 정부는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유로 추적하거나 입국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고, 최첨단 감시 장비를 동원해 장벽을 건설하고, 국경 지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오늘날 각국 정부는 다시금 국경 단속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실체도 없는)‘국익’을 자신이 지키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 한다. 이들은 대내적으로 불평등과 불안정이 커지는 것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외부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자신이야말로 ‘민족적 단결’의 수호자라고 내세운다.

〈공산당 선언〉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민족 문제나 국경 문제에 대해 방대한 연구를 남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충성이 허상이라는 점과 국제주의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확고하게 주장했다. 모든 나라에서 자국 지배계급에 맞서 투쟁해야 하고 국경을 넘어 연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주장했다.

이런 국제주의는 오늘날 유럽연합이 내세우는 가짜 국제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유럽연합은 유럽 각국을 동원해 해로와 육로 모두 봉쇄하고 이주민 유입을 억제하려 한다. 유럽연합은 각국에서 이주민 배척을 부추기고, 그런 배척들 가운데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을 초국가적 수준에서 재현한다.

유럽연합은 “요새화된 유럽”을 추구하면서 자기 회원국들에게 국경 단속을 강화하도록 하는데, 결국 가장 심하게 배척하는 국가의 정책을 전 유럽연합으로 확산하는 구실을 한다. 그것이 낳은 결과 중 하나는 각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성장하고 유럽연합 자체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것이다. 이는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바라는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데, 국가와 국경 사이에 존재하는 전통적 모순이 현대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세계화론자들은 경제 변화 때문에 곧 “국경 없는”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민족국가와 그들간의 경쟁과 충돌은 역사의 유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은 언제나 공상이었는데, 일부 친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의 꿈나라였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조건을 지키려 투쟁하는 것을 막는 구실도 했다. 민족국가는 산업자본주의의 핵심적 요소다. 착취 과정을 감독하고, 민족적 충성심을 유도할 각종 사상을 만들고 퍼뜨리는 구실을 한다. 현대 국가는 또 국경을 필요로 한다. 국경은 지리적 한계선일 뿐 아니라, “우리”와 “남”을 구별해서 후자를 배척해야 한다는 사상을 뒷받침한다.

근대 초기 국가는 사람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주입하려고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왕정이나 의회가 민족적 전통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며 “조국에 대한 사랑”을 부르짖었다. 각 민족의 이데올로그들은 이런 충성심을 요구하려고 국경 너머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도 함께 부추겼다.

오늘날 위기에 처한 체제는 여전히 배타성에 기초한 포용과, 배척의 원리를 내세운다. 동시에 그 모순도 물려 받았기 때문에 권력자들 내 이해관계나 좌우 정치 세력의 판세에 따라 국경 단속은 완화되거나 강화된다.

진정한 국제주의는 국경 자체에 도전하고 일체의 국경 통제에 반대한다. 우리는 저들이 “국외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환영하고, 인류가 민족과 민족적 정체성에 따라 나뉜다는 생각이 모순으로 가득하고 근본적으로 허구적이라는 것을 역사를 통해 이해하고 있다. 이주민의 생명도 소중하고 모든 난민은 환영 받아야 한다.

한국 정부의 이주민 단속 역사와 현재

김종환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이주노동자 관련 제도가 전무했다. 정부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려고 이주노동자들이 관광비자 등으로 쉽게 입국하도록 유도했다.

1994년, 이주노동자들은 끔찍한 산업재해에 참다 못해 농성에 나서고,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도 산재보험을 적용하겠다고 양보한다. 같은 해, 정부는 산업연수생제도를 도입했으나 이 제도는 이주노동자들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1995년, 이주노동자들이 또다시 농성을 벌였고, 그제서야 정부는 최저임금 적용, 강제노동과 폭행 금지, 체불임금 청산 등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양보했다.

2003년,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단속과 강제 추방에 반대해 전국에서 1천여 명이 농성을 벌였다. 명동성당에서는 무려 3백80일 동안 농성을 벌였고 이주노동자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2004년, 이주노동자들의 계속된 파업과 집단적 항의에 부딪힌 정부는 산업연수생제도를 대신할 고용허가제를 도입한다. 이주노동자는 비로소 노동자로 인정받았지만 노동권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제한적이다.

2005년, 이주노조가 결성됐다. 투쟁적인 이주노동자들의 구심이 되어 금속노조, 건설노조 등에서 이주노동자를 끌어들이는 계기가 됐다.

2012년,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개악해서 이주노동자들이 사장의 동의없이는 사실상 작업장을 옮기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더 개악해서 이주노동자들이 출국한 뒤에야 퇴직금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또 난민법을 제정했는데 난민 수용은 물론, 난민 신청 자체를 거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4퍼센트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