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이 김정남 피살 사건에 여러 북한인들이 연루돼 있다고 발표했다. 그중에는 북한 외교관, 고려항공 직원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김정남 독살에는 신경성 독가스인 ‘VX’가 쓰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사건 정황과 독가스 종류 등을 감안하면, 국가기관 정도가 관여하지 않고선 실행되기 어려운 사건으로 보인다. 김정은 정권이 피살의 배후일 가능성이 더 커진 것이다.

북한 당국은 말레이시아 정부의 발표에 강력히 반발했다.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 강철은 죽은 사람이 “(김정남이 아니라) 김철입니다. 여권 이름 그대로”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2월 23일 북한은 ‘조선법률가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빌려 이번 사건이 ‘남한이 짜놓은 각본에 따른 사건’이라고 했다.

국가기관이 아니고선 구하기 힘든 독가스로 피살된 김정남.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우선, 북한 측 담화를 보면 어느 대목에선 말레이시아에서 사망한 “공화국 공민”의 사인이 돌연한 “심장 쇼크”여서 말레이시아의 부검이 불필요했다고 하다가, 다른 대목에선 “명백히 남조선 당국이 이번 사건을 이미 전부터 예견하고 있었으며 그 대본까지 미리 짜놓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검할 필요가 없는 쇼크사’와 ‘남한의 사전 각본에 의한 희생’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그 누구[남한]의 조종에 따라” 수사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말레이시아는 오랫동안 비동맹 노선을 걸어 온 국가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 위기 당시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라는 미국의 압력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리고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지적대로, “우리[남한]보다 북한이 말레이시아와 [더] 가깝다.”(오마이TV 〈장윤선의 팟짱〉)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북한 측 담화가 “상호 무비자 여행이 가능할 만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관계를 크게 훼손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 당국의 담화는 김정남 피살에 김정은 정권이 연루돼 있다는 의혹만 더 키워 주고 있다.

정세현 발언

남한 우익은 이 사건을 대북 압박을 강화하고 국내 정치 지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데 이용하고 싶어 안달이다.

2월 15일 대통령 권한대행 황교안은 김정남 피살 사건을 안보 불안과 연결시켰다. “정치권에서도 정말 안보가 어려운 상황인 만큼 안보에 관한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고 지원해 주기 바란다.” 통일부는 김정남 피살을 북한 인권 문제를 국제적으로 더 부각시킬 계기로 삼겠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미국이 북한을 곧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익은 더 나아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발언을 문제 삼아 맹비난했다. 문재인 캠프의 대선자문단 위원장인 정세현은 오마이TV 〈장윤선의 팟짱〉에 출연해 김정은이 김정남을 제거한 것은 “권력의 속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승만·박정희 정권이 정적들을 많이 제거했음을 상기시키며, 그런 역사가 있는 남한이 북한을 비난만 할 처지는 아니라고 옳은 지적을 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우익은 일제히 이 발언을 물고 늘어졌다. 북한과 남한을 어떻게 같은 반열에 올려 놓을 수 있느냐며, 정세현 전 장관의 안보관이 의심스럽다고 비난했다. 평소 정세현 전 장관이 사드 배치에 반대해 온 점도 문제로 거론됐다.

물론 이는 문재인을 겨냥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문재인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정세현 전 장관의 발언이 부적절했다며 그와 선을 그은 것이다. ‘더러운 잠’ 논란에 이어 문재인은 이번에도 비겁하게 우익의 공세에 뒤로 물러섰다.

남북의 두 세습 권력자들 박근혜의 위기는 김정은에게 과연 희소식이었을까?

정세현 전 장관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남한의 역대 권위주의 정권들도 자신의 정적을 암살하거나 처형했다. 이승만은 (안두희를 내세워) 김구를 암살하고, 조봉암을 처형했다. 박정희도 자신의 충복에서 정적으로 변한 김형욱을 프랑스에서 납치해 죽였다는 합리적 의혹을 받았다. 박정희가 1973년 일본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살해하려 한 사건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야비하고 폭력적으로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려 하는 건 남북의 권위주의 정권들이 공유한 속성이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후계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밀어 올렸던 우익이 김정남 피살을 놓고 김정은을 비난하고 인권 운운하는 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이다. 적반하장은 남북 지배자들의 공통된 속성인가.

“싸우는 형제들”

남과 북의 정권들이 정적을 제거한 역사는 단지 각 독재자들의 개성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1980~90년대 일부 진보적 학자들은 냉전 하의 남북관계를 연구해, 남북이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서로 닮은꼴을 형성해 왔음을 지적했다. 남북의 두 국가들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적대하면서도 국가 형태나 통치 행위에서 비슷한 면이 많았던 것이다. 예컨대 1970년대 세계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남한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 헌법을 밀어붙였는데, 그때 김일성 정권도 주석제를 도입하는 개헌을 단행했다. 남북 모두 비슷한 시기에 위기를 맞아 똑같이 1인 독재 강화로 대응했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남북 양 체제의 본질적 성격이 같은 것과 관련이 있다. 양측 모두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경쟁하면서, 그 경쟁에서 승리하려고 똑같이 한 정당이 국가 권력을 모두 틀어쥔 채 국가자본주의적 발전을 추동했다. 그 체제를 유지하려고 남북 지배자들은 공히 반대자를 탄압하고 노동계급을 엄청나게 착취했다. 남북 권력자들은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서로 싸우는 형제들”인 것이다(적대적 공존 관계). 그리고 이 점은 남한의 국가 형태가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오늘날에도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남북 지배자들이 “서로 싸우는 형제들”이라는 점은 김정남 피살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는 또 다른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독재자 아버지의 후광에 기대어 권력을 잡은 박근혜가 정권 퇴진 운동으로 탄핵될 지경이 된 것을 보며, 같은 세습 권력자인 김정은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가뜩이나 트럼프 정부의 등장으로 대외 정세의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북한 관료 체제의 내부를 점검하고 자칫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촉발할 만한 관료 내 분열 요소를 미연에 방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까?

북한은 지난해 12월 남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표결 이후, 충분한 사전 예고 없이 초급당위원장대회를 열어 당 기초 조직 책임자들을 불러 모았다. 거기서 김정은은 “패배주의, 우는 소리를 하며 자기 앞에 맡겨진 과업을 제대로 수행 못하는 초급당조직들”을 질책하고 단속했다. 이런 게 단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