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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연대

노동자 연대
등록일 2009년 1월 12일, 사업자등록번호 104-86-18859, 통신판매업신고 제2009-서울중구-0370호, 신문사업등록번호 서울다0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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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19:
왜 ‘소비에트’가 중요한가?

번역 전문기
210호 | 2017-06-06 |
주제: 혁명과 혁명가, 투쟁
제보 / 질문 / 의견 | 후원하기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①: 1917년 - 노동자들이 천지를 뒤흔들었던 해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②: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을 하기에 너무 후진적인 사회였나?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③: 세계대전의 그늘에서 터져 나온 반란과 저항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④: 라스푸틴과 차르 아래서 신음하던 혁명 전 러시아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⑤: 1905년 ─ 러시아 혁명의 ‘예행 총연습’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⑥: 급진적 성 해방 가능성을 보여 준 혁명 러시아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⑦: 병사들은 어떻게 혁명의 편으로 넘어왔을까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⑧: 2월혁명은 순전히 자발적이었나?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⑨: 볼셰비키는 어떤 당이었고 왜 여전히 혁명적 조직의 귀감인가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⑩: 1917년 2월 – 노동자들이 역사를 새로 쓰다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⑪: 폭발 직전의 페트로그라드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⑫: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려 한 레닌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⑬: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주의를 뛰어넘는 작업장 조직을 건설하다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⑭: 4월 테제 – 레닌이 볼셰비키를 도로 혁명의 선두에 올려놓다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⑮: 국제주의 - 혁명을 지키기 위한 필수 요소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16: 1917년 러시아의 메이데이 ― 전 세계 노동자들의 등대가 되다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17: 스탈린: 반(反)혁명의 화신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18: 극빈하고 궁핍한 노동자들만이 투쟁에 나설까?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19: 왜 ‘소비에트’가 중요한가?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0: 러시아 혁명의 영광과 비극을 모두 보여 준 크론시타트 수병들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1: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 전쟁에 충실하고 혁명을 배신하다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2: 혁명과 내전 중에도 토론과 논쟁은 중요한 요소였다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3: 노동자 혁명은 성 해방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4: 혁명은 어떻게 러시아 제국 전체로 확대됐나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5: 7월 사태 - 위기에 처한 러시아 혁명과 시험대에 오른 볼셰비키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6: 새로운 사회를 표현하고자 한 새로운 예술 양식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7: 민족 자결권 보장과 혁명의 관계를 이해한 볼셰비키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8: “빵, 평화, 토지!” – 농민과 노동자를 이어준 구호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9: “여성의 완전한 해방”으로 발을 내디뎠던 혁명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30: 코르닐로프 쿠데타: 쿠데타를 저지한 노동자들의 단결은 어떻게 가능했나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1: 차르의 보물을 놓고 지배자들이 벌인 소동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2: 노동자 권력은 독재를 뜻할까?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3: 겁에 질린 지배자들이 거짓말을 퍼트리다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4: 혁명은 사회뿐 아니라 노동자들 자신도 변화시켰다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5: 반란에 나선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신문이 필요했다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6: 혁명의 충격파가 전 세계로 퍼지다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7: 자본주의 국가 권력 vs. 소비에트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8: 10월 혁명 - 노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접수하다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39: 1917년 러시아에서 의회 민주주의라는 대안이 있었는가?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0: 제헌의회 해산은 혁명이 비민주적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가?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1: 트로츠키: 노동자 운동을 무장시킨 지도자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2: 혁명의 패배는 예정돼 있지 않았다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3: 《세계를 뒤흔든 열흘》 - 당신의 세계를 뒤흔들 책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4: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 전쟁에 목매는 지배자들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5: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지 않았다면 혁명은 패퇴했을 것이다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6: 십중팔구 처음 들을 볼셰비키 영웅 3인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7: 반혁명의 씨앗을 뿌린 러시아 내전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8: 혁명은 새로운 지배계급을 낳을 수밖에 없나?
  •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9: 연재를 마치며 - 러시아 혁명은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함을 보였다

대다수 언론과 주류 정치인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국회의원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는 게 별로 없어서 큰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선거 때조차 우리는 부유한 정치인들과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만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1917년,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대회 모습.

그러나 1백 년 전 러시아 혁명은 그런 말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입증했다.

1917년에는, 그전까지 핍박 받던 대중이 조직돼,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고 자기 작업장을 직접 운영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 전체의 통제권을 획득했다.

이런 일을 가능케 한 조직이 바로 “소비에트”였다. 소비에트는 노동계급 지역에 기반한 평의회였는데, 구성원의 압도 다수가 노동자와 병사들이었다.

소비에트는 1905년 러시아 혁명 때 처음 생겨났고, 1917년 2월 혁명 와중에 다시 등장했다. 노동자들은 혁명을 이끌고 지키기 위해 스스로 조직화해야 했다.

차르 체제가 붕괴하자, 혁명 세력이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차지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소비에트로 도시를 통제했다.

심지어 자본가 정치인들조차 소비에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페트로그라드

혁명 기간에 러시아를 취재했던 미국인 사회주의자 언론인 존 리드는 이렇게 썼다. “정치인들은 혁명적 대중과 어떤 연계도 맺지 못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노동자와 병사를 대표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평의회에 잘 보여야 했다.”

각각의 소비에트는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또는 군부대에서 병사들이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됐다.

많은 사람들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본보기로 삼았다. [도시 전체를 관장하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대략 1천2백 명가량의 대표자들로 구성됐는데, 이들 대표자들은 지구마다 있는 더 작은 소비에트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소비에트는 2주에 한 번 열렸고, 이 소비에트에서 1백10명으로 이뤄진 중앙집행위원회가 선출됐다. 러시아 전역에서 소비에트들은 일 년에 두 번 열린 “전(全) 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 대표자를 보냈다.

1918년 4월, 전(全) 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 파견된 한 지구 소비에트(Venevsky)의 대표자들.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혁명에 대해 토론하고 혁명을 조직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소비에트가 이렇게 큰 규모였던 것이다. 어떤 노동자들이든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서 소비에트에 파견하겠다고 요구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 회의의 분위기는 당시 참석한 사람들의 기록이 잘 보여 준다. 역사가 수하노프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초창기에 열린 한 회의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 홀에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물밀듯이 몰려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 멋지고 깔끔한 책상들 사이로 이미 담배 꽁초들이 버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자와 털 코트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소총을 비롯한 군사장비를 지닌 사람들도 간간이 보였다.”

노동자, 농민, 병사들이 혁명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나눴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썼다. “[소비에트 회의를] 참관한 농민들은 혁명의 투지를 열렬히 찬양했다. 청중은 흥분했고, 농민들의 찬양에 몰입했다. 마치 광채를 뿜는 것 같았다. [좌중이] 혁명적 투지로 하나 되는 듯했다.”

참석한 한 병사는 혁명 소식을 처음 들었던 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만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 독일군이 바로 저만큼,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멀리 있었는데요. 독일군이 소리를 듣고는 ‘이봐, 거기 무슨 일 있어?’ 하고 소리쳤어요. 우리도 크게 소리 질러 답했죠. ‘여기 혁명이 일어났다네! 차르는 이제 없다고!’”

1917년 거의 내내, 소비에트의 권력은 러시아 자본가들이 짜르 몰락 후에 세운 임시정부와 경합했다.

혁명 정당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 조직에 기반한 소비에트야말로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토대라고 봤다.  

볼셰비키는 봉기로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가 완전한 권력을 장악할 것을 호소했다. 노동자들은 10월에 그런 방식으로 권력을 잡게 된다.

관료

볼셰비키가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이용해,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가 파괴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창출했다. 성장하던 관료 집단이 스탈린의 반혁명으로 권력을 차지한 것은 나중에야 [1920년대 후반] 일어난 일이다.

전 러시아소비에트대회는 소비에트 정부의 “의회”라 할 수 있는 전 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했다. 중앙위원회가 내린 결정은 러시아 전체에 적용됐다.

그러나 존 리드가 썼듯, 지구 소비에트들이 각 지역을 맡고 있었으며, “실제로는 지구 소비에트의 권위가 가장 컸다.” “지역 소비에트들이 중앙 정부를 창출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대표자들을 바로 소환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대표자들이 공약을 지키지 않으면 [언제든] 교체될 수 있었다. 소비에트 정부의 구성은 노동자들의 결정에 따라 순식간에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만큼 만약 노동자 대다수가 볼셰비키를 지지하지 않았으면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은 직후인 1917년 12월, 소비에트 민병대가 이전 정부 지지 시위대에 발포한 일이 있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이것을 잘못이라고 봤다. 12시간 만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볼세비키 대표 몇 명이 소환됐다. 이들은 볼셰비키가 다시 지지를 얻은 몇 주 후에야 [대표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스탈린이 주도한 관료적 반혁명은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모두 뒤로 돌렸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런 사회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 사회에 대해서도 평범한 사람들은 결정 과정에 관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흔하다.

 

노동자들이 공장에서도 조직하고 통제했다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뿐 아니라 자기 작업장도 통제해야 했다.

2월 혁명 직후 많은 작업장에서 공장위원회도 생겨났다. 소비에트와 마찬가지로 공장위원회도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푸틸로프 철강 공장의 공장위원회 모임.

2월 혁명 기간에 몇몇 사장들이 달아나기도 했고, [혁명으로 정부가 날아가면서] 정부 소유의 공장에서 책임자가 없어지기도 했다.

사장이 [도망치지 않고] 남아 직장 폐쇄나 생산 방해 등으로 혁명을 사보타주하려 드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도 조직돼 생산 과정을 스스로 통제해야 했다.

공장 노동자들은 동료 중에서 자신들의 공장위원회 대표를 선출했다. 이들은 하루 8시간 노동 같은 요구를 쟁취하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공장위원회의 권한은 그 정도에 국한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심지어 고용과 해고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곳도 있었다. 이런 곳에서는 노동자들이 공장 출입문으로 드나드는 모든 것을 감독했다. 

노동자들이 통제했던 공장에서 공장의 운영을 도와줄 “전문가들”(과거 사장에게 고용됐던 사람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또는 노동자들 스스로 그런 일을 해낼 방법을 빠르게 익히기도 했다. 

미국 사회주의자 언론인 존 리드는 한 방직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썼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천을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거래하는 법을 배웠다.

페트로그라드의 사장 한 명이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어뢰 공장을 폐쇄할 것이라고 경고한 일도 있었다. 바로 강 건너 공장에서 제작되는 특정 부품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공장위원회 의장이 “내가 가지고 오겠소” 하고는 곧장 강 건너 공장의 공장위원회를 찾았다.

“동지들, 우리가 이틀 안에 그 튜브를 구하지 못하면 우리 어뢰부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되오.

“그러면 4백 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네.”

해당 공장의 공장위원회는 부품을 즉시 보내도록 조처했으며, 어뢰 공장은 문을 닫지 않아도 되게 됐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555호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①: 1917년 - 노동자들이 천지를 뒤흔들었던 해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②: 러시아는 사회주의 혁명을 하기에 너무 후진적인 사회였나?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③: 세계대전의 그늘에서 터져 나온 반란과 저항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④: 라스푸틴과 차르 아래서 신음하던 혁명 전 러시아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⑤: 1905년 ─ 러시아 혁명의 ‘예행 총연습’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⑥: 급진적 성 해방 가능성을 보여 준 혁명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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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⑩: 1917년 2월 – 노동자들이 역사를 새로 쓰다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⑪: 폭발 직전의 페트로그라드
  • 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⑫: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려 한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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