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동안 낙태는 세계적으로 큰 이슈였다. 지난해 가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3만 명 이상이 낙태죄 폐지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폴란드에서는 우익 정부가 이미 대부분 금지된 낙태를 완전히 금지하려고 하자 여성 10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결국 정부의 반동적인 시도를 좌절시켰다. 미국에서도 공공연히 낙태권을 축소하겠다고 공언한 트럼프 취임에 맞춰 전국에서 1백만 명 이상이 시위를 했다. 한국에서도 보건복지부가 낙태 처벌을 강화하려 하자 여성들 수백 명이 “낙태죄 폐지”를 외치며 도심을 행진했다.

세계 곳곳의 이런 저항 움직임은 여성 차별 반대 운동과 논의가 활발해지는 상황과 맥을 같이한다. 오늘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나고 평등에 대한 기대가 커졌지만, 여전히 여성의 몸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현실이 존재한다. 특히 새 세대 여성들은 정부의 낙태 처벌 강화 움직임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낙태는 여성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낙태는 여성이 자신의 몸과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지와 관련된 문제다. 국제적 구호인 “내 몸, 내 선택”(My body, My choice)는 아주 단순 명쾌한 구호다. 즉, 낙태를 할지 말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여성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에게 낙태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면, 여성은 출산을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의 인생도 계획할 수 없다. 따라서 합법적이고 안전하게 낙태할 권리는 여성해방에 핵심적인 요구다.

불법 하에서 낙태

지난해 거대한 정권 퇴진 운동의 여파로 정부의 처벌 강화 시도는 좌절됐지만, 한국에서 낙태는 대부분의 경우에 여전히 불법이다. 모자보건법상 낙태는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 유전학적” 장애가 있거나 강간·준강간에 의한 임신인 경우 등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된다. 이때조차 임신 24주 이내에만 허용되고, 반드시 배우자 남성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2005년에 보건복지부가 추정한 한국의 연간 낙태 시술 건수는 34만 건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기혼 여성 세 명 중 한 명이 낙태 경험이 있다. 그중 대부분은 법이 허용하지 않는 낙태다.

낙태가 불법인 상황에서 여성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낙태 사실을 숨기고 괜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비싼 병원비를 감당해야 한다. 낙태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2010년 이명박 정부가 낙태 단속을 강화하기 전에도 낙태 시술 비용은 평균 30만 원가량이었다. 임신한 10대 청소년이 시술 비용을 마련하려고 성매매를 했다는 경찰 보고도 있다.

2010년 이명박 정부가 낙태 단속을 강화하면서 사정이 더 나빠졌다. 낙태 시술을 거절하는 병원이 늘었고 비용이 수백만 원으로 치솟았다. 부유한 여성들에게야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월급이 2백만 원도 안 되는 대다수 여성 노동자와 10대 여성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여성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용해 온라인상에서 안전성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낙태약을 판매하는 사기꾼들도 생겨났다.

2012년에는 18세 여성이 낙태 수술중에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 이 학생은 임신 6개월이 된 상태에서 위험한 수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다. 병원은 이 여성의 비참한 상황을 이용해 6백50만 원이나 뜯어냈다. 초기에 적은 비용으로 안전하게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면, 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좀 더 처참하다. 2012년 세계보건기구의 발표를 보면,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낙태의 절반가량인 2천2백만 건이 ‘안전하지 않은 낙태’이다. 그리고 그 결과 연간 4만 7천 명이 사망하고 8백50만 명이 합병증을 얻는다. 그중 다수가 낙태가 불법인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아시아의 나라들에서 벌어진다.

낙태가 불법인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이런 끔찍한 현실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보여 준다. 법이 낙태를 범죄로 취급할 때조차, 여성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신의 출산을 통제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출산이 여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금지와 규제는 낙태를 멈추지 못하고, 오로지 여성들을 심각한 위험과 고통으로 내몰 뿐이다.

낙태죄를 폐지하고 낙태를 전면 합법화하라 ⓒ이미진

낙태 전면 합법화

낙태죄는 당장 폐지돼야 한다. 지난해 정부의 처벌 강화 시도가 좌절됐지만, 낙태죄가 존재하는 한 이런 시도는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또한 단지 처벌받지 않는 데서 그쳐선 안 되고 여성들이 원할 때 언제든 낙태를 할 수 있도록 낙태가 합법화돼야 한다. 즉, 첫째, 여성이 원할 때 조건 없이 낙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안전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건강보험이 적용돼 돈 걱정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여성 노동자들은 낙태 시술 뒤 충분한 휴가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여성 혼자서도 쉽게 낙태할 수 있는 낙태약(미프진)을 도입해야 한다.

“조건 없이”가 뜻하는 바는 사유나 기간 제한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정의당은 ‘사회경제적 사유에 따른 낙태 허용’을 주장한다(20대 총선 당시). 물론 이것만 허용해도 현재 이뤄지는 낙태의 많은 부분을 포괄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저러하게 조건을 다는 것은 언제나 그 조건을 충족하는지를 입증해야 한다는 문제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낙태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여성이 아니라 조건을 심의하는 의사나 국가기구 같은 제3자가 갖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독일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에서도 의사 2명이 승인한 뒤에야 낙태가 허용된다.

낙태 허용 기간도 쟁점이다. 물론 한국에서 낙태의 96퍼센트 이상이 임신 12주 이내에 이뤄진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후기 낙태도 방어해야 한다. 오랫동안 임신 상태를 유지해 왔음에도 더는 임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면, 그 여성에게 그럴 만한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기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오히려 위급한 여성들을 위험한 낙태로 몰고가는 것일 뿐이다.

상담이나 숙려 기간 의무화 등의 조건도 없어야 한다. 물론 낙태 과정이나 낙태 이후 나타날 수 있는 결과들, 필요한 경우 피임법 같은 정보들은 기본으로 제공돼야 한다. 그러나 가령 독일에서 낙태 전 의무적 상담은, “임신의 지속을 위하여 부녀를 격려하고”, “태아가 생명에 대한 독자적 권리를 가지는 것[을] … 부녀에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미국 텍사스주에서 여성들은 낙태 시술을 받으려면 적어도 24시간 전에 초음파 검사를 받아 태아의 모습과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는지를 의사한테 확인받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런 제도는 여성들에게 괜한 죄책감을 심어 주고 낙태 시술 문턱을 높이므로 반대해야 한다.

남성 파트너의 동의를 얻어야만 한다는 제한도 없어야 한다. 파트너 동의를 의무화하면 여성이 남성의 동의를 얻지 못해 원치 않는 출산을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요컨대, 낙태 선택은 의사도 국가도 파트너도 아닌 온전히 여성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 여성의 요청만으로 합법적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의 몸은 인큐베이터가 아니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낙태가 “살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생명 존중’ 주장은 그 자체로 위선이다. 사실 낙태 금지가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심각하게 해친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낙태 반대 진영에는 전쟁을 지지하고 이주민 추방에 혈안이 된 호전적이고 무자비한 자들이 많다. 트럼프와 마이크 펜스가 대표적이다. 유럽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낙태 반대론자들은 나치들이다. 미국의 전쟁을 지원하고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조차 반대하고 세월호 참사와 진실 은폐에 책임이 있는 우익 정부가 ‘생명권’ 운운했던 것도 역겹다.

물론 낙태는 인간이 될 잠재력이 있는 세포 덩어리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살인”이라는 것은 완전히 비약이다.

배아나 태아는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는 생명체이긴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만약 “가능성”만으로 인간이라고 한다면, 피임과 자위도 해선 안 되고 성 관계는 오로지 출산을 위해서만 해야 한다는 논리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심지어 강간을 당해 임신해도 낙태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듯 ‘생명권’ 주장을 강변하면 매우 반동적인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무엇보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여성의 몸에 철저히 의존해 있는 태아의 “권리”가 이미 독립적 인격체인 여성의 권리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사실 세포 덩어리와 한 인간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여성을 하찮게 취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포 덩어리의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면, 여성을 단지 출산 도구로 취급하는 것일 뿐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낙태 금지가 마치 성경 말씀인 양 이야기한다. 그러나 교회가 낙태를 언제나 금지한 것은 아니다. 또한 언제나 “살인”이라는 이유로 금지한 것도 아니다.(이에 대해서는 본지 216호에 실린 ‘낙태의 역사 ─ 원시 사회에서 자본주의까지’를 참고하시오.)

지난해 11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사제에게 낙태의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고 밝혔다. 가톨릭 교회는 원래 이 권한을 주교들이나 소수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한정해 왔었는데, 모든 사제에게 이 권한을 부여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당시 교황은 여전히 낙태를 “죄악”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발표는 가톨릭 내부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자의식 상승에 조응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 내부의 긴장과 변화가 있다는 사실은 낙태가 교리나 ‘생명’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임을 보여 준다.

낙태 불법화는 언제나 노동계급과 가난한 여성들에게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임수현

경제 위기와 가족제도

한국 정부는 1960년대부터 오랫동안 산아 제한 정책을 폈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출산율이 하락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자, 묵인해 오던 낙태를 단속하려 했다. 한국 자본가들과 국가는 미래의 노동력 부족을 크게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이를 낳고 싶어도 경제적 사정과 열악한 사회 복지 때문에 결혼조차 미루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는 눈 감으면서 말이다. 사실 이 사회에는 낳지 않을 권리가 제약받지만, 동시에 아이를 낳을 조건도 제한돼 있다.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주거 문제 등등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아이를 낳을지 말지, 언제 몇 명을 낳을지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쓰이는 돈은 아까워한다. 그러면서 여성과 노동계급 가정에 희생을 강요한다. 자본주의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여성의 몸을 자본주의 축적 논리에 종속시키며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부인한다.

정부의 낙태 단속·처벌 강화 시도는 오늘날 이혼, 독신, 혼외 출산 증가 등으로 ‘정통’ 가족제도가 약화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에서 지배자들은 미래의 노동력인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과 노인 부양, 간병 같은 일들을 개별 가정,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떠넘긴다.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의 물질적 기초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제도가 하는 구실 때문에 지배자들은 계속해서 가족제도를 보호하려고 한다. 보수적 성 관념과 여성관을 유포해 노동계급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도 지배자들에게 가족제도는 유용하다.

특히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 가족제도가 하는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실은 지배자들에게 더욱 절실하다. 경제 위기 시기에 지배자들은 알량한 복지조차 줄이고, 실업, 임금 삭감, 일자리 불안정 등 대중에게 고통을 전가한다. 이때 가족제도가 고통받는 대중의 경제적·심리적 안전판 구실을 하는 게 지배자들에게 유리하다.

그래서 한편에선 여성들더러 더 많이 노동시장에 나와서 착취당하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가정에서의 아내와 어머니로서 구실을 다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출산이 여성의 임무인 양 부추겨지고, 낙태 단속도 벌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낙태 공격은 단지 여성의 삶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을 옥죄려는 시도의 일부다. 낙태 공격에 맞서서 노동계급이 투쟁해야 하는 이유이다.

낙태는 노동계급의 문제다

낙태가 노동계급에게 중요한 문제인 이유는 무엇보다 낙태 불법화의 주된 피해자가 노동계급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유한 여성들은 낙태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안전한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부유한 여성들은 비용이 얼마든 별 문제가 되지 않았고, 개별적으로 의사를 고용하거나 외국에 나가서 안전한 낙태 시술을 받고 충분히 쉬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지배계급 여성들이 의사에게 낙태 시술을 해 달라고 사정하며 매달리고, 낙태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낙태 불법화는 언제나 노동계급 여성과 가난한 여성에게 치명적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낙태죄를 폐지하고 나아가 낙태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에 노동조합과 노동계급 조직들이 적극 나서는 게 중요하다.

여성운동 내 일각에는 낙태를 남 대 여의 구도로만 보면서, 피임과 낙태의 문제에서 남성의 무책임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있다. 물론 여성의 피임 요구를 거부하거나 임신·출산의 책임을 여성에게 떠넘기는 남성들은 문제다.

그러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는 이유가 단지 남성의 무책임성과 일방적 강요 때문이 아닌 경우도 많다. 낙태 문제를 남성 일반의 탓으로 돌리는 견해는 남녀 노동자들이 함께 연대해서 낙태권 쟁취 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남성 파트너의 무책임성 때문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여성들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다. 만약 낙태권이 보장돼 있다면 무책임한 남성 파트너 때문에 여성의 삶이 망가지는 일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낙태권 운동들은 노동조합 조직이 대거 참여한 경우가 많았다. 이때 남녀 노동자들은 함께 연대해서 투쟁했다. 낙태권이 보장되지 않아 뒷골목 낙태로 몰리고 삶이 망가질 위기에 처하는 문제는 남성 노동자들의 여성 파트너, 딸, 동료의 문제이기도 했다.

지난해 폴란드 검은 시위 대중운동으로 발전하는 데서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의 공식적 지지와 참가 독려가 중요했다 ⓒ출처 Razem(폴란드 좌파당)

그중에서도 가장 멀리 나아간 경우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세워진 노동자 국가는 세계 최초로 여성의 요구에 따른 낙태를 합법화했다. 여성의 요청 말고는 어떠한 낙태 제한 조건도 없었다.

1970년대 영국에서는 보수당 정부가 합법 낙태를 축소하려 하자, 영국노총이 최대 8만 명 규모의 대중 시위를 이끌어 저지한 경험이 있다. 이 시위는 낙태권 공격을 막아냈을 뿐 아니라 낙태권에 대한 지속적이고 대중적인 지지가 확립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때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들이 낙태권 공격에 반대하는 공식 입장을 채택하고 운동에 앞장서도록 촉구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지난해 폴란드의 낙태권 운동이 성공한 데서도 노동조합의 공식적 지지와 참가 독려가 중요했다. 많은 여성 단체들과 함께 좌파 정당 라젬(“함께”)과 노동조합과 사회주의자들이 동참했다. 전국노동조합동맹과 교사노조가 낙태권 시위 지지를 표방하고 조합원들의 시위 참가를 독려했다.

최근 아일랜드에서 낙태죄 폐지 운동을 이끈 ‘제8조 폐지 연합’은 65개 단체로 구성돼 있는데, 여성단체들과 시민·건강권 지지자들, 노동조합들과 좌파 단체들이 포함돼 있다.

현재 한국에서 낙태는 매우 뜨거운 쟁점이 돼 있다. 한때 주류 여성 단체들이 ‘처벌 반대’를 중심으로 수세적으로 대응해 왔던 것에 비춰 보면, 최근 낙태죄 폐지를 선명히 요구하는 움직임이 강화된 것은 일보 진전이다.

그런데 여성들이 겪는 피해를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낙태 합법화를 분명하게 요구하고, 낙태를 노동계급 대중의 문제로 보며 노동계급의 조직적 동참을 추구하는 전망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문재인은 후보 시절 낙태죄 폐지 요구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답변했다. 정치인들에게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은 자신의 임기 내에는 할 생각이 없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낙태죄를 폐지하고 나아가 낙태를 합법화하는 데서는 문재인 정부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행동과 무엇보다 노동조합의 동참이 매우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데서 사회주의자들이 주요한 구실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글은 필자가 맑시즘2017에서 한 발표를 축약·정리한 것이다. 이 발표문은 정진희·최미진이 쓴 《낙태, 여성이 선택할 권리》(노동자연대)를 많이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