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읽기 전에 “아일랜드 사회주의자 특별 기고: 아일랜드에서 낙태권 옹호 투쟁이 성장하고 있다”를 읽으시오.

근 1백50년 동안 가톨릭 교회는 아일랜드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는 가장 보수적인 가톨릭 교회였고 그 지배는 잔혹했다. 교회가 운영하는 ‘엄마와 아기의 집’에서는 이른바 “(출생이) 떳떳지 못한” 아이들이 엄마들에게서 강제로 분리돼 미국으로 팔려가거나 방치돼 죽곤 했고, ‘막달레나 세탁소’에서는 “타락한” 여성들이 수십 년씩 노예 생활을 강요당했으며, “산업학교”[빈민법에 의해 가난한 아이들을 가두는 수용시설]에서는 빈민·노동계급 자녀들이 구타와 학대에 시달렸다.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는 18세기부터 1996년까지 미혼모 여성들을 강제로 수용해서 세탁일을 시켰다. 여성과 아동의 처우는 끔찍했고 한 곳에서는 1백55구의 시신이 암매장된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상황이 언제나 이랬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태고”부터 이어진 전통도 아니고, 아일랜드인의 유전자 탓도 아니다. 아일랜드인 대다수가 예로부터 가톨릭 신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가톨릭 교회가 이처럼 강고한 지배력을 구축한 것은 1840년대의 대기근으로 1백만 명 이상이 아사하고 그 밖에 수백만 명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아일랜드 인구가 거의 반 토막(1841년 8백만 명 → 1861년 4백50만 명) 나고부터다.

기근은 아일랜드의 가족 구조를 바꿔 놓았다. 결혼 연령이 전반적으로 높아져 중년 이상의 남성이 자신보다 젊은 여성(그러나 과거에 비해 초혼 연령이 상승한)과 결혼하는 관행이 확립됐다.

교회는 이처럼 결혼을 늦게 하는 상황에서도 혼전순결이 지켜지도록 성생활을 단속했다.

가톨릭 교회의 장악력은, 1916~22년 아일랜드 혁명을 패배시킨 반혁명의 결과로 더욱 강해졌다. 아일랜드 혁명은 1917년 러시아 혁명, 1918~23년 독일 혁명, 그리고 1919~20년 이탈리아의 “붉은 2년”을 포함한 국제적 혁명 물결의 일부였다. 1916년 사회주의자 제임스 코널리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패트릭 피어스가 이끈 부활절 봉기로 시작해 대중 파업과 노동자들의 점거와 지역 소비에트 수립, 그리고 10만 명을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에 입대시킨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이 투쟁으로 남부의 26개 카운티로 구성된 “자유국”은 영국으로부터 부분적 독립을 얻는다.

이후 영국-아일랜드 협정[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 요구로부터 후퇴한 내용의 1921년 협정으로, 영국이 북아일랜드를 통치할 근거가 됨]에 반대한 IRA 분파가, 영국의 지원을 받은 [IRA 내 협정 찬성파인] 마이클 콜린스의 반혁명에 패배하고 결국 아일랜드 분할이 관철돼 [1923년] 두 개의 반동적 정부가 수립된다. 북쪽에는 영국령에 속하고 보수적 병합파(영국에의 병합을 지지)의 지배를 받는 개신교 정부가 들어서고(북아일랜드), 남쪽에는 보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가톨릭 국가(아일랜드공화국)가 생긴다.

아일랜드공화국에서 부르주아지와 가톨릭 교회가 맺은 동맹은 구체적으로 두 인물의 동맹 관계로 나타났다. 바로 에이먼 데 발레라 총리(이후 대통령)와 존 찰스 맥퀘이드 추기경으로 이 둘은 1930~40년대에 아일랜드를 통치하고 종교색 짙은 헌법을 작성했다.

가톨릭 교회는 아일랜드 시민사회의 거의 모든 측면을 쥐락펴락 했는데, 특히 교육과 병원 운영을 틀어쥐었다. 교회의 이데올로기와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관계 일반(특히 여성의 성생활)을 부정하고 혐오하며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 핵심에는 낙태에 대한 완고한 반대가 있다. 교회의 끈질긴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실로, 피임은 1978년에 와서야 제한적이나마 합법화됐고, 이혼은 1995년까지 불법이었다!

북아일랜드의 병합파와 개신교파는 “로마[교황]의 지배” 즉, 통일은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지만 한 가지 사안에서만큼은 언제나 “로마”와 완벽히 의견이 일치했는데, 바로 섹스와 낙태에 대한 보수적 태도에서 그랬다.

1971년 “피임 열차”를 타는 ‘아일랜드 여성 해방 운동’ 활동가들 당시 아일랜드는 피임도 불법이었기 때문에 콘돔, 살정제 등을 합법적으로 구입하려면 북아일랜드까지 가야 했다 ⓒ출처 <아이리시 타임스>

아일랜드의 변화

아일랜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적으로 낙후하고 가난했으며 교회의 지배가 계속됐다. 그러나 1990년대 이래 경제 발전과 꾸준한 투쟁에 힘입어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켈트의 호랑이”라 불릴 정도의 경제 호황 덕에 아일랜드는 탈바꿈했다. 가톨릭 지배의 근간을 이루던 농경 사회구조를 허무는 거대한 규모의 도시화가 일어났다. 또 대대적인 이주민 유입으로 다문화 사회가 됐고, 무엇보다 여성들이 대규모로 일터에 진출했다.

여성 노동인구는 1996년 48만 8천 명이었는데 1971년과 비교해 21만 3천 명 많아진 것이다. [아일랜드공화국 전체 인구는 약 4백만 명이다.] 같은 기간 남성 노동인구가 겨우 2만 3천 명 증가한 데 비하면 놀라운 수치다. 1996년 여성 노동자의 절반 가량은 기혼 여성이었다. 기혼 여성 24만 1천4백 명이 가정 밖에서 유급노동을 했는데, 이는 1971년 대비 6백 퍼센트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숨 막히는 구습과 차별을 거부하는 새로운 세대의 여성과 남성이 등장했다.

물론 변화가 저절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거리에서 벌어진 대중 투쟁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낙태권을 부정하는 8차 개헌이 통과된 지 9년 뒤인 1992년 초, 이른바 “X 사건”이 떠올랐다. 2월 19일, 당시 법무장관은 14세 소녀(“미스 X”)가 영국으로 건너가 낙태 시술을 받지 못하도록 출국을 금지하는 가처분 명령을 받아낸다. X는 강간으로 임신하게 된 경우였고, 자살까지 생각한다고 알려졌다.

정부의 대응에 전국이 분노로 들끓었다. 수많은 젊은 여성과 남성이 연일 밤낮으로 거리에 나와 “영국에 가도록 X를 내버려 두라”고 외쳤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는 1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참가하는 반쯤 자발적인 행진이 몇 차례 벌어졌는데, 인구 비율로 따지면 런던에서 10만 명 이상이 모인 것과 같다. 코르크, 워터포드, 골웨이 등 중소도시에서도 비슷한 비율의 시위대가 거리를 메웠다. 나라가 발칵 뒤집혔고, 겁에 질린 정부와 고등법원이 결국 물러섰다.

이 승리는 크나큰 돌파구를 열었고, 새로운 분위기 속에 가톨릭 교회의 뿌리깊은 위선들이 하나 둘 폭로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주교인 에이먼 케이시에게 혼외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파트너를 통해 드러났고, 정절을 설교하기로 유명한 또 다른 신부는 그의 ‘가정부’와 두 아들을 낳았음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차별적인 구체제에서 신부나 수녀에게 신체적·성적 학대를 당했던 피해자들이 증언할 용기를 얻었다. 피해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한 주가 멀다하고 신부들의 체포 소식이 언론을 장식했다. 1993~97년 아일랜드 각지에서 신부들이 강간이나 성적 학대 혐의로 잇따라 법정에 섰고 피해자 중에는 8세 어린이도 있었다. 더욱이 교회 당국은 범죄 사실을 인지하고도 피해 아동을 보호하거나 가해자를 처벌하기는커녕 대개 교회를 보호하고 범죄자들이 처벌을 면하도록 힘썼음이 드러났다. 교회의 도덕적 권위는 재기불능으로 실추됐다.

성에 대한 태도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는 2015년 출생한 아이 10명 중 4명이 혼외 출생자이며 이 가운데 59퍼센트가 (혼전) 동거 커플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특히 2015년 동성 결혼에 관한 국민투표에서는 동성결혼에 대한 압도적 지지(찬성 62.07퍼센트, 반대 37.93퍼센트)로 나타났고, 수도세 인상 반대 투쟁으로 급진화한 더블린의 노동계급 거주지에서는 찬성률이 80퍼센트를 넘었다.

그러나 아직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아일랜드를 지배해 온 양대 정당인 피네 게일과 피아나 페일은 자신들을 “현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당으로 포장한다. [피네 게일의] 신임 총리 리오 바라드카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고 자긍심 행진에 동참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두 정당 모두, 변화의 기미가 없는 보수적 영농인과 재계 인사들을 주요 기반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교회는 여전히 막강한 제도적 영향력뿐 아니라(아직 대부분의 학교와 다수의 병원을 운영한다) 무시못할 지지자 동원 역량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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