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성추행·성폭력이 폭로돼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을 촉발한 헐리우드 거물 하비 와인스틴이 지난 달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당시 본지에 실은 번역 기사를 재게재한다.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세이디 로빈슨이 사회에 만연한 성적 학대와 성폭력을 어떻게 끝장낼 수 있을지 살펴 본다.


2017년 10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이 오랫동안 여성들을 성추행·강간해 왔다는 것이 폭로되면서 사회 중심부에 만연한 여성 차별이 밝히 드러났다.

많은 사람이 와인스틴의 행실을 알았지만, 그의 만행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됐다.

많은 여성들은 와인스틴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그가 자신의 인생을 파괴할까 봐 문제를 공론화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와인스틴이 저지른 것과 같은 폭력과 성적 괴롭힘은 전 세계 여성과 어린 여성들이 너무도 빈번하게 겪는 것이기도 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폭로 이후 수많은 여성이 SNS에 ‘#미투’[“나도 당했다”] 해시태그를 써서 자신이 당한 경험을 밝혔다.

이는 웹사이트 “에브리데이 섹시즘”[“일상 속 성차별”]에 날마다 수십 건씩 올라오는 성차별, 성적 괴롭힘,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글에서 드러난 바와 똑같다.

한편, 영국 의회의 조사는 어리거나 젊은 여성 다수가 대학이나 학교에서 성적 괴롭힘을 겪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디언〉 칼럼니스트 수잰 무어는 이렇게 썼다. “성적 괴롭힘은 한 번 겪고 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여성의 삶에 드리운 배경막과 같다.”

안타깝게도 이는 남성 일반이 문제라는 시각과 통할 수 있다. 같은 글에서 무어는 이렇게 개탄했다. “우리는 온갖 공모, 남성의 온갖 특권, 여전히 귀를 틀어막은 온갖 남성들을 본다.”


여성차별이 구조화된 사회

그렇다면 남성들이 문제의 원인일까? 아니라면, 무엇이 원인인가?

여성들이 당하는 학대의 수준은 실로 분노를 자아낸다. 그러나 다수의 남성은 여성을 강간·추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여러 남성들도 여성들이 겪는 성적 학대에 분노를 표하며 ‘#미투’ 글을 썼다. 자신이 겪은 학대를 상세히 적은 남성들도 있다.

물론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끔찍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런 남성들은 결코 용인해선 안 되며, 행동을 바꾸도록 몰아세워야 한다.

그러나 성적 괴롭힘이 벌어지는 것은 우리가 사는 환경 때문이지, 생물학적 본성 탓이 아니다.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 사회에 구조화돼 있다.

여전히 여성은 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임금을 적게 받는다. “유리 천장”이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기도 한다.

여성은 가난할 가능성이 더 높다. 여성은 여전히 가사와 양육 부담을 여전히 남성보다 더 많이 짊어진다.

강간과 가정폭력 피해자의 압도 다수는 여성이며, 성적 괴롭힘 또한 너무나 만연하다.

이런 구조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성차별적 의식이 이용된다.

여성의 삶이 남성의 삶보다 덜 중요하다는 시각은 사회 지배층에서 내려온다.

어떤 판사들은 강간죄 재판에서, 피해 여성도 잘못이라거나 가혹한 형이 가해자 남성의 인생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가해자를 솜방망이 처벌한다.

경찰은 한결같이 여성 대상 범죄를 진중하게 다루지 않는다. 여성의 낙태권을 제약하거나 가정 학대 피해자를 보호하는 조처를 방해하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국회의원들도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또, 우리는 폭력적 사회에 사는데, 최악의 폭력 역시 이 사회의 지배자들이 자행한다. 정부는 부자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가차 없이 밀어붙인다.

그들은 무장한 경찰력을 동원해 질서를 강요한다. 그들의 정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여기에 더해 여성은 성적 ‘물건’으로 취급받는다. 이것은 단지 개인의 태도 탓이 아니다. 우리는 여성이 성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는 물건처럼 나오는 이미지가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 산다.

물건을 팔려고 여성의 몸을 이용하는 온갖 광고를 떠올려 보라. 여성이 자기 외모에 과하게 집착하도록 부추기는 패션·미용·성형수술 산업도 떠올려 보라.

여성은 영화·신문·대중음악·TV 퀴즈쇼·드라마에서 대상화되고 정형화된다.

우리는 이런 성적 대상화가 “해방”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오히려 자본주의는 성을 소외시키고 왜곡해 왔다.

여성은 마치 사고팔거나 훔칠 수 있는 상품으로 여겨진다. 이 모든 것이 여성을 상대로 폭력이 자행되는 기반이다.

“여성이 무엇을 입든 어디를 가든 YES는 YES이고, NO는 NO다” 2011년 영국에서 열린 성폭력 반대 시위 ⓒ출처 Duncan Brown(플리커)

여성차별은 남성의 본성인가?

지배자들은 남녀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본성” 때문이라는 사상을 퍼뜨린다.

그리고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든 여성의 빈곤이든) 모든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린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사회를 탓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그 사회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어서 그 사회의 책임을 최대한 숨기려 한다.

그러나 여성차별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성차별이 자연스러웠다면 태곳적부터 모든 곳에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학자들은 그런 차별이 존재한 적 없는 여러 사회를 연구해 왔다.

예컨대 인류학자 엘리너 리콕은 여성차별이 없는 여러 사회에 관한 증거를 발견했다.

캐나다 지역에서 수렵·채집하며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 나스카피족도 그중 하나다.

리콕은 나스카피 사회에 “원숙하고 나이 많은 여성과 남성들이 두루 함께하는 의사결정 구조”가 있음을 발견했다. 남성은 여성보다 높은 권위를 갖거나 우월한 지위에 있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리콕은 가족·사회계급·국가가 등장하면서 여성차별이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생산력이 발전해 잉여 생산물이 생산되자, 한 집단이 지배계급이 돼 잉여를 통제했다. 지배계급은 “적자”에게 잉여를 물려주려 했고, 그러려면 여성의 성을 더욱 통제해야 했다.

이와 함께 [무거운 농기계 도입, 가축 활용 등] 생산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나 여성 노동보다 남성 노동이 더 우선시됐고, 여성의 핵심 구실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됐다.

가족은 체제 유지에 대단히 중요하다. 다음 세대 노동력을 낳고 기르고, 지금 세대 노동력을 유지하는 구실을 무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성차별이 가족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많은 정치인들이 가족을 규범이자 추구해야 할 가치로 제시한다.

그러나 오히려 여성·아동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대부분 가정에서 벌어진다.


여성 해방과 혁명

계급 출현 이전의 사회에서 여성은 열등한 지위에 있지 않았다. 이런 사회들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에 기초를 두었다. 이처럼 여성차별이 언제나 존재한 것은 아니다. 혁명적 상황에서는 여성차별이 줄어들기도 했다.

1917년 혁명 이전 러시아에서 여성은 남성의 재산으로 간주됐고, 농민 남성이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은 합법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은 2월 혁명을 촉발했다. 혁명이 전개되면서 여성의 지위는 완전히 바뀌었다. 이혼과 낙태가 합법화됐다.

여성은 완전한 투표권을 쟁취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 외에는 어디서도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던 시절에 말이다. 혁명 정부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작업장에서의 동등한 권리, 출산 휴가 급여를 도입했다.

공동 보육원, 공동 식당, 공동 세탁소 덕에 가사와 양육은 개별 여성이 짊어지는 부담이 아니라 사회의 공동 책임으로 바뀌었다.

1919~1920년 페트로그라드 주민 약 90퍼센트가 공동 식당을 이용했다.

최근 사례로는, 2011년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나 여성과 남성이 함께 거리 시위를 벌여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를 몰아낸 사례가 있다.

이집트에서도 여성은 혁명으로 이어진 파업과 혁명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군부가 반격에 나서자 여성을 방어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집트 혁명가 마히누르 엘마스리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는 점차 여성을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보기 시작했다.”

러시아 혁명과 이집트 혁명 모두에서 잔인한 반혁명이 벌어져 여성들이 쟁취한 성과를 후퇴시켰다.

러시아에서는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고 합법적 낙태를 폐지했다.

그럼에도 여성의 삶이 이처럼 급격하게 변했다는 사실은 여성차별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개별 남성들의 사고방식이나 생물학적 본성 탓도 아님을 보여 준다.

여성차별이 남성 탓이라는 시각을 받아들이면, 자본주의 체제에 면죄부를 주게 된다. 이런 시각은 이 사회의 지배자들이 아니라 다른 노동계급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도록 부추긴다.

이런 시각은 남성이 여성차별로 득을 본다는 시각과 상통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의 낙태권을 박탈한다고 해서 남성의 처지가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임금이 낮게 유지된다고 해서 남성의 임금이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경험은 분명 서로 다르지만, 여성의 저임금과 노동계급의 분열로 득을 보는 건 사용자들뿐이다.

노동계급 남성이 체제에서 득을 본다고 여기면, 남성들의 처지도 가혹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영국에서 20~49세 남성이 사망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자살이다.

자본주의는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도외시하는 체제이며, 여성차별은 그런 체제를 떠받치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

즉, 노동계급 남성들과 여성들은 자본주의와 여성 차별 모두를 끝장내기 위해 단결할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다.

여성차별은 계급 사회에서 발생했고, 계급 사회는 인류 역사의 10퍼센트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존재했다. 여성차별은 사라질 수 있다. 여성차별을 낳는 이 체제를 끝장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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