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 미국 정부는 9년 만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트럼프는 시진핑의 대북 특사가 김정은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온 것(이 때문에 시진핑은 체면을 구겼다)을 지켜본 후 바로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발표했다. 미국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국가는 북한과 함께 이란·수단·시리아 4개국이다.

그동안 일각에서는 북·미 간 물밑 접촉으로 국면이 전환하지 않겠느냐는 희망 섞인 관측이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계기로 북핵 문제는 대화와 협상 쪽으로 물꼬를 트려는 갈림길에 서 있는 상황이다.”(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그러나 트럼프는 이런 기대를 여지없이 깨 버렸다. 테러지원국 재지정은 트럼프가 당분간 대북 대화 재개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11월 7일 광화문 트럼프 방한 반대 시위 ⓒ조승진

트럼프는 북한 김정은 정권을 두고 핵무기를 개발하고 국제 테러리즘을 지원하는 “살인 정권”이라고 맹비난했다. 물론 김정은 정권은 독재 정권이다. 하지만 그 정권에 국제 테러리즘 지원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터무니없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불량 국가’의 평상시 지도부인 트럼프 정부가 ‘테러지원국’ 운운할 자격이 있을까? 수천 명이 희생된 필리핀 두테르테의 ‘마약과의 전쟁’을 칭찬하는 트럼프가 말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북한이 이미 강도 높은 제재를 받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번 테러지원국 재지정 자체는 실효성이 적은 조처일 수 있다.

그러나 테러지원국 지정은 미국이 “최대한의 압박”에 걸맞은 더 강력한 조처들을 취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 준다. 앞서 미국 항공모함 3척이 동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군사 훈련을 한 것을 눈여겨봐야 하는 까닭이다.

재무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면서 트럼프가 예고한 대로 21일 미국 재무부는 추가 대북 제재를 단행했다. 새로 추가된 제재 리스트에는 북한 선박과 운송 회사들 외에 중국 기업인과 무역회사 4곳이 포함됐다.

미국 재무부의 추가 대북 제재에 중국 기업들을 주된 타깃으로 삼는 2차 제재(세컨더리 보이콧)가 포함된 데서 보듯이, 북핵 문제는 미·중 갈등과 긴밀히 얽혀 있다.

11월 초 트럼프·시진핑의 정상회담은 겉보기엔 화기애애해 보였지만, 정상회담 후 미국과 중국은 다시 충돌하기 시작했다. 10일 트럼프는 베트남 아펙(APEC) 정상회의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재천명하며 “만성적 교역 악폐를 참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주된 대상이 중국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편 시진핑은 시진핑대로 세계화를 옹호하며 세계화에서 후퇴하는 미국의 빈자리를 중국이 메우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중국은 아펙 정상회의에서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를 조속히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FTAAP의 구체적 실행 방향 합의는 미국의 반대로 불발됐다.

일본 아베 정권은 트럼프의 강경 대북 정책을 계기로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려고 한다. 북한 ‘위협’을 이유로 지상 공격용 순항 미사일 개발을 검토하는 것이 그러한 사례다. 그 순항 미사일은 틀림없이 중국에도 위협이 될 것이다.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비롯한 트럼프의 대북 압박 강화 조처들은 북한의 반발을 부르면서 동북아시아 불안정을 더 키울 것이다. 또한 미·중 갈등의 악화가 트럼프의 강경한 대북 정책과 맞물리며 이 상황을 더 꼬이게 만들 수 있다.

문재인 식 “균형외교”는 어디로 가는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11월 7일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높게 평가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무기 구입’이라는 ‘젖병’을 물려 놓고 ‘3NO’(사드 추가 배치와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 편입과 한·미·일 군사동맹을 추진하지 않음)에 대한 양해를 받은 것”이 성과라는 것이다. 즉, 문재인이 11월 초의 국제 외교 무대에서 “균형외교의 디딤돌”을 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문재인은 트럼프가 중국을 견제하려고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관한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일본과는 동맹이 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에는 사드 갈등을 풀기 위해 사드 추가 배치와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 편입과 한·미·일 군사동맹 추진은 없다(‘3NO’)고 밝혔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가 나름의 ‘균형외교’를 시도하는 것은 한국 자본주의가 그간 중국 경제의 성장에 의존해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 그럭저럭 버텨 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점증하는 가운데 문재인 정부가 확보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넓지 않다. ‘균형외교’가 외교 쟁점으로 떠오를 듯하자, 문재인 정부는 그것이 미국과 중국 사이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아, 이 기시감! 노무현도 “동북아 균형자”론을 폈다가 신속히 꼬리를 내렸다.)

미국은 한국의 ‘균형’ 시도를 인정할 생각이 없다. 아마 미국 지배자들은 한국이 균형을 시도할 깜냥이 있느냐며 내심 어이없어 할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맥매스터와 차기 주한 미국 대사로 유력한 빅터 차 등이 문재인의 ‘3NO’ 선언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분간 좌충우돌하겠지만, 문재인 정부도 과거 노무현 정부처럼 ‘마음은 균형외교이나 몸은 한·미·일 동맹’으로 기울 공산이 크다. 문재인 자신이 세계 시장을 누비는 한국 자본을 뒷받침하고 국익을 보호하는 데서 한미동맹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문재인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하에서 발전한 한·미·일 군사 협력 구조를 거의 건드리지 않고 있다. 일본은 동맹이 아니라고 했지만, 한일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을 폐기하지 않고 연장해 버렸다. 한·미·일 동맹을 위해 미국이 촉구해 성사됐던 12·28 한일 ‘위안부’ 합의도 폐기되지 않고 있다.

또한 문재인 정부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기여할 것”이라면서 미국의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지지했다. 이처럼, 트럼프의 강경 대북 정책에 호응할수록 문재인 정부의 외교 정책은 ‘균형’과는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 제대로 균형외교를 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대안이 못 된다. 남한 정부가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느냐 여부는 미·중이 제국주의적 상호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와 별개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보·좌파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평화 운동 건설을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혁명적 좌파는 여기에 더해 반자본주의적·반제국주의적 노동계급 운동을 구축하려 애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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