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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희-하리수 논쟁:
트랜스젠더 차별 반대하고 섹슈얼리티 다양성 인정해야

“트랜스여성도 여성이다” 2017년 미국 3·8세계 여성의 날 행진 ⓒ출처 Alex Darocy

11월 11일, 연예인 지망생 한서희 씨(이하 호칭 생략)가 자신의 SNS에 “트랜스젠더가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혀 논란이 벌어졌다. 최근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한서희에게 일부 네티즌들이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지지하는 글도 써 달라고 부탁하자, 한서희가 이를 거부하며 이렇게 밝힌 것이다.

한서희의 발언은 사회에서 지독한 차별과 냉대를 받아 온 트랜스젠더들에게 큰 상처를 줬을 것이다. 한서희는 한 트랜스젠더 네티즌에게 “주민번호 2나 4로 시작해요?”, “자궁이 없고 염색체가 다른데 어떻게 여자죠?” 하며 지독히 편협한 태도를 보였다. 당연히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분노했다.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 씨는 즉시 한서희를 에둘러 비판하는 글을 SNS에 남겼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는 “한서희는 모든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무시해 버렸다”며 “주민번호(앞자리 숫자 관련), 성전환 수술에 대한 편협한 생각 등을 언급하는 등의 언행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하리수의 비판은 정당하다. 한서희는 트랜스여성들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인정받으며 살기 위해 분투하는 현실을 간단히 비웃으며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고통과 차별을 깡그리 무시했다. 자궁이 없고 XX 염색체가 아니면 손가락질 받고 차별받아도 된다는 말인가?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천대를 직시해야 한다

한국에서 성별 정정이 법적으로 인정된 지 11년째이지만, 성별 정정 기준은 여전히 매우 까다롭다. 대법원 예규는 명시적으로 생식 능력이 없을 것, 외과수술을 통해 생식기를 제거할 것, 자녀가 없을 것, 미성년자가 아닐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일부 법원이 성기수술 없이도 성별 정정을 인정했지만, 법원이 트랜스젠더에게 탈의한 전신 사진, 성기 사진을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정 결정이 날 때까지 1~2년의 긴 기간을 견뎌야 한다는 문제도 있다.

트랜스젠더의 성전환 비용은 건강보험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트랜스젠더들은 막대한 의료 비용을 버느라 허덕여야 한다.

까다로운 요건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적지 않은 트랜스젠더들이 법적인 성별 정정을 흔히 포기한다. 이런 상황에서 성별이 드러나는 주민등록번호는 트랜스젠더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주민등록번호와 성별 불일치는 고용 문제에서 커다란 장벽이다. 성별을 이유로 한 사용자들의 비아냥과 퇴직 압력도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2014년 국가인권위 조사에서 트랜스젠더의 64퍼센트가 직장에서 한 가지 이상의 차별이나 괴롭힘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주민등록번호 때문에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심지어 휴대전화 등의 가입과 변경, 보험 가입·상담, 투표 참가도 포기하는 등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차별을 없애고자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성별 정정 요건 완화, 성전환에 대한 의료 보장, 주민등록번호의 성별 기입 폐지 등을 요구해 왔다.

트랜스여성들은 성소수자 혐오와 여성 차별이 결합돼 고통이 가중되기도 한다. 하리수는 언젠가 화장품 광고를 찍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목젖이 합성돼 들어간 것을 나중에 발견하고 매우 충격을 받고 슬펐다고 밝힌 적 있다. 하리수가 트랜스젠더임을 흥미거리로 만들어 흥행을 노리려고 한 광고업체의 짓이었다.

체계적인 트랜스젠더 배제 때문에 트랜스젠더는 자살률이 매우 높고, 쉽게 혐오 범죄의 표적이 된다.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고통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트랜스젠더가 스스로 성별을 결정하고 표현할 권리를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


트랜스젠더가 성별 규범을 강화한다?

한서희는 또한 자신은 성소수자 혐오자가 아니고 단지 트랜스젠더만 포용하지 못할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트랜스여성]의 여성상이 애교 섞인 말투와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손짓과 행동이 여성스럽게 보여야 함 등 우리가 벗으려고 하는 코르셋들을 조이고 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의 권리 주장은 “여성 인권 신장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퇴보가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가 성별 규범을 강화해 여성 차별을 강화한다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견해를 드러낸다. 국제적으로 적잖은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논리로 트랜스젠더를 배척한다.

그러나 트랜스여성들이 주류적 여성상에 부합하려 애쓴다(한서희의 편견과 달리 모두가 그러지는 않지만)고 해서 이를 이유로 트랜스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라는 것은 페미니스트라면 거의 상식이다. 이런 원칙을 왜 트랜스여성에게는 적용하지 않는가.

그리고 만약 트랜스젠더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그들의 행동이 성별 고정관념에 충실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여성의 역할과 남성의 역할이 엄격히 구분된다는 성별 고정관념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강요되는 여성성/남성성 같은 성별 고정관념은 단지 사람들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학교 성교육에서부터 노동자들의 컴퍼니웨어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서 체계적으로 부추겨지는 것이다. 기존 질서가 지켜지기를 바라는 자들에 의해서 말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이 얼마나 될까(연예인 지망생인 한서희 자신을 포함해)? 트랜스젠더가 아닌 여성들 중에서도 주류적 여성상에 부합하려는 여성은 매우 많다.(대부분이 많든 적든 그런 관념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한서희의 주장은 주류적 여성상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들만이 여성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적 사고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정당화할 뿐이다.

논쟁이 계속되자 한서희는 “페미니스트의 길은 자기가 어떤 길을 더 추구하냐에 따라서 다 다르다”며 “본인과 다름을 틀림으로 단정짓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한서희야말로 트랜스젠더에 대해 다름을 틀림으로 단정짓지 않는가.

결국 한서희의 편협한 태도는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매우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성적 다양성을 생물학으로 환원하는 결정론에서 비롯한다. 인간의 섹슈얼리티는 생물학적 성과 얼마간 관련 있지만 그것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성 역할, 규범 등은 역사적으로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 왔다. 자신의 성별을 바꾸고자 하는 욕구는 인류 역사상 내내 존재했고, 이것이 어떤 시기와 지역에는 전혀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성 차별의 원인은 생물학적 본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한서희의 트랜스젠더 배제적 주장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의 생물학적 본성 탓으로 보는 근본적 페미니즘 이론의 결함과도 관련 있다. 이에 따르면, 남성으로 태어난 존재들이 성별을 바꾸려는 시도가 자연스럽지 않고, 외양이 어떻게 바뀌든 남성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로 환원하는 것은, 실은 자궁 여부와 염색체 등을 근거로 여성의 역할에 관해 얘기하는 주장과 닮았다. 이런 식의 설명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 시기 동안(99퍼센트나 되는 기간)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다.

계급 사회 이전, 식량 찾아다니기 사회에선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초기 인류 사회에서도 성별 분업이 있었지만 이것이 체계적인 차별을 뜻하지는 않았고, 그런 분업은 상당히 유동적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부족 내 발언권도 평등했다. 이는 엘리너 리콕, 리처드 리 같은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실증적으로 뒷받침되는 부분이다.

원시 무계급 사회에선 태어난 성별과 다른 성별로 살고 싶은 사람들도 부족에서 인정받았다. 100여 개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 “여자 옷을 입고 여자로 산 남자들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또한 전체 부족의 대략 3분의 1에는 남자 옷을 입고 남자로 산 여성이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성별 전환만이 아니라 오늘날 성별 이분법을 뛰어넘는 다양한 젠더도 인정됐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혹은 “반은 여성이고 반은 남성인” 같은 다양한 젠더를 인정하는 용어(“two-spirit”)를 가지고 있었다. 130곳이 넘는 부족이 이런 용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양한 젠더의 개인들은 부족에서 상담자, 선생님, 치료사로 존경받았다.


비난의 화살을 계급사회와 그 지배자들에게 돌려야 한다

트랜스젠더 활동가이자 레즈비언,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레슬리 페인버그는 계급사회가 등장해 여성 차별이 발전하면서 더 엄격한 성 역할과 성별 범주의 협소화가 강화됐고 트랜스젠더에 대한 비난도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정착 생활과 농업이 발전하면서 무거운 쟁기를 다룰 수 있는 남성들이 생산을 주되게 담당하게 됐고, 사회의 잉여 생산물과 국가에 대한 통제는 남성이 맡게 됐다. 또한 일부 남성들이 잉여 생산물을 전유하는 지배계급이 되면서, 자신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상속할 수 있는 적자를 밝혀 내는 일이 중요해졌다. 남성이 우위를 점하는 배타적인 가족이 발전했고, 이 속에서 여성의 성적 자유는 옥죄어졌다.

이처럼 사회가 계급으로 나뉘면서 배타적인 가족제도가 발전했고 이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성 역할과 성별 규정이 훨씬 엄격하게 규정되면서 다양한 성적 표현과 행위들도 백안시되고 억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하거나, 여성이 남성의 역할을 하는 것을 역겹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1530년,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한 한 스페인 정복자는 원주민 중 “가장 용감하게 싸운 자는 여성스러운 남성이었다. 그 이유로 나는 그를 화형시켰다”고 황실에 보고했다.


여성해방과 트랜스젠더 해방은 연결돼 있다

여성 차별과 트랜스젠더 차별은 서로 상관없기는커녕, 계급 사회라는 차별의 원천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의 권리와 트랜스젠더의 권리는 상호배타적인 게 아니라 한 쪽의 권리가 침해되면 다른 쪽의 권리도 결국 침해받게 된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부와 특권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신체적 차이나 성적 지향, 출신국 등 중요치 않은 차이들을 이용해 피지배자들을 분열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성 차별과 트랜스젠더 차별은 서로 연결돼 있다. 가족제도는 여전히 지배계급에 중요한 기구다. 가족은 노동력 재생산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 가정 내 여성의 무보수 노동은 지배계급에 막대한 비용을 아껴 준다. 이를 위해 지배계급은 고정된 성 역할이 마치 남성과 여성의 본성인 것처럼 설파한다. 사람들은 이분법적 성별 규범이라는 틀에 욱여넣어지고, 여기서 고통받는 것은 트랜스젠더뿐 아니라 대다수 평범한 대중이다.

즉, 우리의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와 그 수혜자들인 지배자들이다. 따라서 비난의 화살은 체제와 지배계급에 돌려야지, 트랜스젠더들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한서희 식의 생물학적 결정론이야말로 사람들의 다양한 자기 표현을 억누르고 성별 고정관념에 도전할 가능성들을 좁혀서, 여성의 평등과 해방에 해롭다. 여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성별 고정관념에 반대하며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무조건 옹호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자유로운 섹슈얼리티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여성해방은 트랜스젠더 해방과 결코 분리할 수 없다.

※ 이 글의 후반부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트랜스젠더 활동가인 로라 마일즈(Laura Miles)의 선구적 연구 ‘Transgender oppression and resistance’, International Socialism 141호(2014)에 많이 빚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