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컨 핼러스가 1985년에 쓴 글이다.


종파주의라는 말은 너무도 느슨하게 사용되고 있으므로 차라리 그것이 뜻하지 않는 바가 무엇인지부터 해명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러저러한 투쟁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조직을 건설하려고 노력하면 종파주의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만약 자기 단체의 정치가 옳다고 믿거나 적어도 다른 단체의 정치보다는 더 올바르다고 믿는다면, 자연히 자신의 단체가 성장하기를 바랄 것이고 그 조직을 견고히 구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적으로 진지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행동이 경우에 따라서는 건방지고 둔감하게 시도될 때도 있을 것이다.(나는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 설사 그런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자주 있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종파주의라기보다는 어리석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종파주의는 오직 계급투쟁에 대한 잘못된 태도을 가리킨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장 큰 공헌은 사회주의가 노동계급 운동과의 융합을 지향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융합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해 주는 혁명적 이론,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에게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조직할 임무를 부여하는 혁명적 이론을 만들어 냈다.”

여기에서 ‘융합’은 혁명적 조직이 비혁명적 조직 속으로 용해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레닌은 혁명적 조직 건설에 완전히 헌신하면서, 이 중심적인 과제 앞에서 동요하는 사람들 — 그의 예전 협력자들 가운데 다수를 포함해 — 과 단호하게 결별했다. 여기서 핵심적인 말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무엇과 “융합”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대상은 바로 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인 것이다.

종파주의라는 개념은 《공산당 선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종파주의자라고 부른 사람들은 ‘이상향’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뜻했는데, 이상향은 이른바 일반 원리들에서 도출한 추상적인 안으로서, 종파주의자들은 그 안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설득과 본보기 — 자본주의라는 망망대해 속의 사회주의 협동조합이라는 고립된 섬 — 를 강조했다.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운동’, 즉 실제의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것과는 반대로 말이다.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종파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과 명예를 계급 운동과의 공통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계급 운동과 자신을 구별해 주는 특수 표지에서 찾으려 한다.”(강조는 마르크스 자신이 한 것이다.)

계급 운동이란 문자 그대로 계급의 운동을 뜻한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노동계급 기구 문제가 아니다. 주되게 그에 관한 문제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제의 계급투쟁 전개 과정 문제이자 계급의식 발전 과정 문제이다. 마르크스는 혁명가였다. 그에게 혁명은 어떤 “특수 표지”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였고, 이 사회주의적 투쟁은 “이러저러한 프롤레타리아들이 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전체가 지금 자신들의 목표로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관계 없이” 오직 계급투쟁에만 바탕을 둘 수 있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중심성을 형식상 받아들인다고 해서 반드시 종파주의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1880년대에 엥겔스는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일종의 ‘유일한 구원’의 교리”로 바꿔놓고 “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운동 일체와 거리를 두는 것”을 비웃었다. 엥겔스는 노동기사단이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노동계급을 조직하려는 괄목할 만한 시도라면서, 이 집단을 “밖에서 멸시할 것이 아니라 안에서 혁명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독일계 미국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마이동풍이었지만).

이 주장은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코민테른의 초기 연간에 꽤 많은 진정한 혁명가들, 주로 독일 등지의 혁명가들이 기존 노동조합 안에서 체계적으로 활동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의 주장은 그 노동조합들이 노골적으로 반동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관료화하고 보수화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대체로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또한 그 노동조합들이 수많은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지도부가 아무리 관료적이고 반동적이라 할지라도 그 조직들은 계급 조직으로서 계급투쟁에서 어떤 구실 — 나쁜 구실이지만 — 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고, 따라서 그 조직들을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금 노동계급을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 기회주의적·국수적 사회주의 지도자들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이 매우 기초적이고도 매우 자명한 사실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고위 지도부의 반동적·반혁명적 성격 때문에 독일의 ‘좌파’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에서 철수하고 그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형태의 부자연스런 노동단체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결론으로 비약한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런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실수로서,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게 가장 크게 기여하는 셈이다.

능동적이고 혁명적인 ‘좌파’들이 저지르는(대개는 그런 사람들이 그랬다) 이러한 오류와 그 밖의 다른 모든 형태의 종파주의 사이의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투쟁에 관여하지 —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 않으면서 이상론적 안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데 여념이 없다는 점이다. 여러 형태의 선전 종파들은 이렇게 첫눈에는 서로 매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모두 근원이 같다.

영국에는 이러한 사례들이 아주 풍부하다. 우리는 그들을, 고 토미 잭슨이 영국 사회노동당SLP에 대해 쓴 시구를 빌려, “순수한 소수정예” 종파주의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소수의 선택된 순수한 사람들
나머지는 모두 지옥에 떨어질 사람들이라네
지옥에는 당신들의 자리가 충분해
우리는 천국이 비좁아지는 것을 원치 않아

SLP는 종파주의의 최악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대단히 높은 수준의 공식적 (‘마르크스주의’) 훈련과 선전을 당원의 조건으로서 지나치게 강조했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로서 그들은 별도의 ‘적색노조’를 추구했고, 당원들이 취업하려고 어쩔 수 없이 노조에 가입해야 할 때(즉, 노조원만을 고용하는 클로즈드숍 제도 하에서)조차 노조 직책 갖는 것을 금지하는 규약을 갖고 있었다.

‘고급’ 당원에 대한 집착과 ‘저급 노동자들’에 의한 ‘희석’ 우려는 일부(전부는 아니다) 트로츠키주의 단체들과 그 후예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왜 종파적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문제의 핵심인 계급투쟁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그러면 두 전선[기회주의와 종파주의에 모두 맞서는 — 옮긴이]에 서게 된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기회주의자들한테 종파주의라는 비난을 받는다면, 흔히 그 비난은 찬사나 다름 없다.” 이것은 충분히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파주의 경향이 실제로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일부 추종자들 사이에서 종파주의가 나타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무릇 노동계급 정당과 그 분파는 모두 초기 단계에서 순전히 선전에만 치중하는 시기를 거치게 된다. … 마르크스주의 서클로 존재하는 동안 그들은 노동자 운동에 대해 추상적으로 접근하는 습성을 몸에 익히기 마련이다. 이때 체질화한 행동반경을 시간이 지나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종파주의자로 고착되는 것이다. 종파주의자들은 세계를 자기가 선생으로 있는 커다란 학교로 여긴다. … 아무리 말끝마다 마르크스주의를 들먹인다 할지라도 종파주의자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늘 그것에 비추어 생각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 종파주의자들은 기성의 공식에만 매달린다. … 그러나 자기의 공식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으므로 종파주의자들은 공식을 더 정확하게 만드는 데 끊임없이 시달려야 한다. 이것은 바로 토론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행해진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한테 토론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토론은 계급투쟁을 위한 기능적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종파주의자한테는 토론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나 토론에 열중할수록 그는 점점 더 현실의 과업으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말하자면, 갈증을 풀기 위해 소금물을 계속 들이키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소금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은 더 심해질 뿐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종파주의는 몇 년 전보다도 이제 훨씬 줄어들었다. 이것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파로 분류할 수 있었던 많은 서클들이 노동당에 흡수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얘기는 모두 혁명가들이 노동당에 개입해야 하고 심지어 이 일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노동당에 입당해야 한다는 결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밀리턴트[1991년 옛 소련 몰락 때까지 노동당 내에서 좌파로 활동하던 정설파 트로츠키주의 단체로, 이후 분열해 그 일부가 현 스코틀랜드사회당을 결성함 — 옮긴이]가 주장하듯이, 노동당 외부에 머무르는 것은 종파적 태도인가?

물론 이 문제는 기성의 공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종파주의의 본질은 계속 이러저러한 구실을 들먹이며 현실의 계급투쟁을 회피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주로 또는 부분적으로 노동당 내에서 또는 노동당을 통해서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는가? 분명 직접적으로 노동당 내에서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노동당 내부의 투쟁에서 약간의 반향이 있는 한, 우리는 필요할 경우에는 그 좌파를 비판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또 우익과의 투쟁에서는 노동당 전체를 비판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노동당에 영향을 미치려 애써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자진 해산하고 노동당에 입당해야 한다는 — 또는 그 자체 조직을 비밀리에 유지하면서 그런 척해야 한다는 —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런 행동은 세 가지 이유에서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 투쟁의 주된은 작업장과 대학이다. 혁명적 조직은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자체의 언론매체를 가지고 독자적인 존재로서 그런 곳들에 가장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업종별 또는 산업별로 조직되는 노동조합과 정치적 견해를 기초로 하는 노동당 — 노동당의 정치적 견해는 우리가 배격하는 개혁주의이다 — 사이에는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노조 지도자들이 아무리 개혁주의적이고 심지어 반동적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따라서 레닌은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 노조 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사회민주당원들이었는데도 자신의 지지자들이 사회민주당에 합세해야 한다고는 꿈에도 주장할 생각이 없었다.

둘째, 작업장 투쟁이 아주 침체된 퇴조기에조차 노동조합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것은 종파적 태도이다. 투쟁이 가장 침체된 시점에서도 노동조합은 계급투쟁과 미약하나마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노동당의 지구당들은 그 상대도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노동당 내 좌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관점에서 봐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주장하면서 독자적 조직으로 활동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 당직 배분이라든가 공천 등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스마트폰 앱으로 〈노동자 연대〉를 만나 보세요! 안드로이드 앱 다운로드 아이폰 앱 다운로드

📮 매일 아침 이메일로 〈노동자 연대〉를 구독하세요! 아이폰 앱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