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시민단체들이 신청한 ‘위안부’ 관련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보류됐다. 참으로 분노스런 일이다.

유네스코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보편적인 존중을 조장”하기 위해 교육·문화·과학의 상호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목표임을 표방하는 유엔 전문기구다. 그럼에도 대표적 전쟁 범죄인 ‘위안부’ 문제를 외면한 것은 유네스코가 자신의 설립 취지를 스스로 부인한 꼴이다. 반면에 2015년 유네스코는 일제 시절 강제 징용으로 악명 높은 하시마 섬을 비롯한 일본 근대산업시설들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주지하다시피,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좌절된 데는 일본의 압력이 컸다. 일본은 자국의 치부를 감추려고 유네스코에 등재하지 말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유네스코 분담금을 많이 내는 국가인데(전체 분담금의 10퍼센트), 일본은 그 점을 이용해 유네스코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이번에 해당 기록과 관련이 있는 당사자들 사이에 견해가 다를 때는 기록유산 등재를 보류한다는 새 기준을 적용했다. 일본의 동의를 구해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가 유네스코 기록물 등재가 좌절된 데도 영향을 줬다. 당시 합의로 박근혜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두고 상호 간 비판을 자제하기로” 약속해 줬다. 이후 정부는 ‘위안부’ 기록물 등재 일에서 발을 빼 버렸다. 반면 일본은 이 합의를 근거로 “위안부 문제는 이미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일”이라고 떠들 수 있었다.

한국 지배자들의 친제국주의적 선택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또 상처를 준 것이다.


유네스코와 제국주의

‘위안부’ 관련 기록물을 둘러싼 소동은 유엔이나 유네스코 같은 국제기구들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입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유네스코 등은 미국, 일본, 영국 등 강대국들의 분담금에 주로 의존하기도 한다. 오늘날 이런 국제기구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되거나 상호 충돌하는 곳이다.

표. 2017년 유네스코 주요 회원국 분담금 비율
순위 국가명 분담률(퍼센트)
1 미국 22
2 일본 9.7
3 중국  7.9
4 독일 6.4
5 프랑스 4.9
6 영국 4.5
7 브라질 3.8
8 이탈리아 3.7
9 러시아 3.1
10 캐나다 2.9

처음에 유네스코는 “본질적으로 서방의 자금에 의존하는 서방 측 기관”으로 1945년에 설립됐다. 그리고 “냉전 동안 미국 공직자들은 유네스코를 공산주의의 선전이 판치는 시기에 언론의 자유를 지킬 옹호자로 여겼다.”(〈타임〉 10월 12일자 기사)

그러다가 유네스코에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이 대거 가입하면서, 미국 정책 결정자들은 자국의 입김이 유네스코 안에서 축소될 것을 우려했다. 이 신생 독립국들이 미국보다 소련에 더 우호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1984년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던 미국이 탈퇴하면서 유네스코를 흔든 까닭이다. 미국은 2002년에야 재가입했다.

지금도 미국은 걸핏하면 유네스코에 노골적으로 개입한다. 2011년 오바마 정부는 유네스코가 팔레스타인을 정회원 국가로 받아들이자, 유네스코 분담금 납부를 전면 중단했다. 지급 중단된 분담금 규모가 유네스코 총예산의 4분의 1에 이르렀다.

이듬해 미국은 영국, 프랑스 등과 손잡고 유네스코에 시리아를 제명할 것을 압박했다.

유네스코가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 구시가지를 팔레스타인의 유산으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자, 올 10월 미국과 이스라엘은 아예 유네스코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유네스코 신임 사무총장은 “회원국 간 갈등을 일으킬 만한 문제는 되도록 피해야 한다”며 한발 물러서야 했다.

유네스코에서는 특히 문화유산 등재를 놓고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곤 한다. 문화유산에 대한 ‘해석’을 어느 쪽에 유리하게 하느냐가 오늘날의 이익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이 유네스코 탈퇴를 선언하자, 중국이 유네스코 분담금을 미국이 내던 만큼 늘리겠다고 나선 까닭이다.

지금도 일본은 자국의 더 많은 근대산업유산들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면서 강제 징용 등의 과거는 지우려고 애쓴다. 반면 중국은 난징대학살 기록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면서 일본을 견제하려고 한다. 동아시아 강대국들 사이에서 ‘과거사’가 갈등의 한 지점인 것이다.

오늘날 서방 국가들은 과거 식민 지배에 관해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하라는 요구를 오랫동안 묵살해 왔다. 그런 점에서도, ‘위안부’ 관련 기록물 같은 제국주의 침략 과거 문제가 “탁월한 보편적 가치”라는 기준에 맞게 공정하게 검토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처음부터 어려웠다.


‘위안부’ 문제 해결은 왜 이리 안 될까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증언 등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 범죄임이 명백히 밝혀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그 해결은 지지부진하고, 관련 기록물조차 국제기구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지경이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 동아시아 제국주의의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1945년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국제질서를 구축하고 안정시키려고 일본 자본주의를 회생시켜 줬다. 이를 위해 미국은 “천황”의 지위를 유지시켜 주고 전범들을 정부 안으로 받아들이는 등 일본 국가의 핵심을 보존해 줬다.

냉전이 본격화하자, 미국 제국주의는 일본을 미국이 극동에 내리는 “닻”으로 삼으려고 경제 재건과 재무장을 서둘렀다. 그리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체결해, 일본이 전쟁과 식민 지배 책임을 거의 지지 않을 수 있게 해 줬다. 미국이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익과 자본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일본 국가의 범죄를 덮어 줬던 것이다.

미국의 지원으로 재기하게 된 일본 지배자들은 미국의 세계 전략에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침략 과거를 지우려고 애썼다.

오늘날에도 미국은 ‘위안부’ 문제를 한·미·일 삼각 동맹 구축·강화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로 여긴다. 미국이 이따금 일본 우익에게 자중하라고 촉구하면서도 대체로 ‘위안부’ 문제를 덮고 한·일 협력을 강화하라고 압박하는 데 집중해 온 까닭이다. 2015년 한국과 일본의 ‘위안부’ 합의도 사실상 미국의 관장 하에 이뤄진 것이었다.

한국 역대 정부들은 모두 일본의 과거사 왜곡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일본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한국 자본주의가 일본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경제를 성장시켜 온 경험이 있는 데다가 미국과의 군사 동맹 때문에 한국과 일본은 안보 문제에서도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역대 한국 정부들은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하며 과거사 문제를 진지하게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내 여론이 들끓으면 그제서야 일본에 뒤늦게 항의하는 행태가 반복됐다.


문재인 정부와 ‘위안부’ 문제

문재인 정부는 전임 정부와 마찬가지로 ‘위안부’ 문제 해결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물론 최근 국회에서 매년 8월 14일을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지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이 통과되는 등 ‘위안부’ 피해자 지원 면에서 일부 개선되는 게 있다.

그러나 12·28 한일 ‘위안부’ 합의는 아직도 폐기되지 않았다. ‘위안부’ 합의 과정을 검증하는 외교부 태스크포스(TF) 팀을 구성했지만, 그 뒤로 진전된 게 전혀 없다. ‘위안부’ 합의에 따라 만들어진 화해·치유재단도 존속돼 있다.

이 와중에 한·미·일 정상회담, 한·일 정상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9월 문재인은 아베를 만나 북핵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나 강제 징용 문제 등에서 발목을 잡히지 않도록” 잘 관리하기로 했다. 문재인 정부에게도 일본 침략 과거사 문제는 내심 골칫거리로만 여겨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길윤형 《한겨레21》 편집장은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절대 12·28 합의의 파기나 재협상까지는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합의는 한·미·일 3각 동맹의 전제”이기 때문이다(《아베는 누구인가》, 길윤형 지음, 돌베개, 2017).

문재인 정부는 국내 여론을 의식해 줄타기하겠지만, 결국 제국주의 동맹을 우선하는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외에 “별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길윤형) 하며 현 상황에 순응할 필요는 없다.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정부의 친제국주의 정책에 맞서는 운동 건설이라는 더 확실한 대안이 있다. 그런 저항이 성장하는 가운데 ‘위안부’ 문제 같은 일본 과거사 청산은 진정 가능해질 것이다.

강력 추천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과 증언을 담은 연작 다큐멘터리다. 1995년(1편), 1996년(2편), 1999년(3편)이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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