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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NL현대사: 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
자유주의 시각에서 본 자민통계의 역사

최근 몇 년 동안 1980년대 운동가들과 그 조직들을 주제로 한 학술 논문이 종종 나오고 있다. 1980년 광주항쟁도 이제 30년을 훌쩍 지났으니, 이 시기에 대한 학술적 평가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런데 몇몇 사회학 논문을 빼면 자민통계 운동의 역사를 다룬 연구물은 매우 적은 편이다.

《NL 현대사: 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 박찬수 지음, 인물과사상사, 15,000원, 328쪽

한국의 진보·좌파 진영에서 자민통계는 가장 큰 세력이었고 대중 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실 분단과 북한의 존재라는 현실 자체가 자민통계를 다수파의 지위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북한 친화적인 좌파의 등장과 확산은 일종의 패턴을 이루었다. 남한 사회에서 광범한 민주주의 투쟁의 여파는 급진적인 청년 지식인층을 꽤 형성했다. 이들의 의식이 점점 더 급진화해 모종의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음 수순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인 북한에 대한 평가와 연대 문제로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1960년대 4월 혁명은 급진적인 남북통일운동과 통일혁명당(통혁당)을 출현시켰고, 1970년대 반유신 운동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를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1980년 광주항쟁과 민주화 운동 속에서 자민통계가 등장하고 확산된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한겨레〉 연재 기사를 엮어낸 《NL현대사: 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는 자민통계 운동의 핵심에서 활동했던 주요 인사들의 얘기를 전한다. 김영환, 심재구, 김성만 등 초창기 일부 자민통계 인사들의 일화가 실려 있다. 자민통계의 핵심 이데올로그들이 뉴라이트로 전향한 배경에 북한에 대한 실망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문익환 목사가 죽음에 이르렀던 상황 등 다소 민감한 내용도 실려 있다. 자민통계 조직 문화에 대한 논의도 나온다. 특히 자민통계의 조직 문화와 운동 방식은 과거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 운영 과정에서도 문제를 자아냈다.

물론 자민통계 운동이 전체 운동에 기여한 점도 부분적으로 언급한다. 자민통계는 ‘대중노선’과 ‘품성론’으로 1980년대 중반에 운동의 확산에 기여했다. ‘전설’로 전해지는 경기동부그룹의 북한동포돕기운동을 보면 자민통계 활동가들의 자기희생과 헌신적 규율을 엿볼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은 저자 말마따나 운동권에 오래 몸담은 “누군가에게는 이미 알고 있고 술자리에서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의 의의를 “그렇게 술자리에서 떠들며 이야기한 것을 검증해서 팩트로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자민통계 운동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현역 자민통계 활동가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우익으로 타락한 변절자들이나 제도권 정당에 몸담아 이미 체제 안으로 흡수된 기성 정치인들, 또는 매우 온건해진 인사의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반영돼 있다. 자민통계 운동 안에는 현역에서 일하는 1980년대의 경험 많은 활동가들이 여전히 많은데도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본격적인 역사서라기보다는 특정 개인들의 후일담에 더 가깝다. 이는 자민통계 현역 활동가들이 〈한겨레〉 같은 자유주의 언론과의 인터뷰를 경계했기 때문일 수 있다. 저자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 시절에도 〈한겨레〉〈경향신문〉 등 자유주의 언론이 온건 PD 출신에 훨씬 우호적이었고 자민통계에 적대적 태도를 보인 게 사실이다. 더 혁명적인 좌파 경향에도 마찬가지로 적대적이었고, 이는 지금도 그렇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자민통계는 한국인의 민족주의 정서와 6월항쟁 시기의 ‘대중노선’ 그리고 ‘품성론’ 덕분에 급성장했으나, 북한 문제와 더불어 권위주의적이고 패쇄적인 조직 문화, 그리고 ‘변화한 시대’에 부응하지 못한 ‘반미’ ‘통일’ 운동 때문에 고립됐다.

북한을 “추종”하는 노선과 ‘가부장적’이고 ‘패쇄적인’ 조직 문화, 그리고 패권적인 활동 방식 때문에 대중성을 잃었다는 평가는 너무 흔한 나머지 더는 새로운 의미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로부터 이끌어내려는 교훈이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말을 빌자면, “1990년대 들어서 혁명의 시대는 가고 개량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전체 진보진영이 인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진보진영은 “그러질 못했다.” 저자는 조국의 이 주장을 책의 각기 다른 곳에서 두 번이나 인용할 정도로 중시한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지만, 조국의 말은 그람시적 맥락 즉, 혁명정당을 유지한 채 기동전에서 진지전 국면으로 전환하자는 게 아니다. 개량의 시대가 왔으니 우리 모두 개량주의자가 되자는 게 본 뜻이다.

그런 점에서 자민통계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려고 노력해 왔음을 인정해 주는 게 공정할 것이다. 물론 그 방식은 보통 대중성이 없는 게 아니라 대중성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방식이었지만 말이다. 자민통계의 통일운동은 북한 체제의 위기가 공공연해진 이후 범민련 논쟁으로 분열하면서 상당수가 좀 더 온건한 통일운동체를 지지했다.(이 점은 저자도 다루고 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정주영 같은 재벌, 더 나아가 남한 정부도 ‘통일운동의 일주체’로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비록 자민통계 진영 전체의 입장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는 합법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모색도 일찌감치 있었다.

사실 북한은 이미 1989년 ‘한민전 신년메시지’를 통해 남한에서 합법 혁신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고, 서총련도 이 주제를 기관지에 소개한 바 있다. 1992년 전대협 내에서도 이런 논의들이 존재했다. 물론 이때 합법 혁신정당은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기보다는 광범한 계급연합을 추구하는 포퓰리즘적 정당이었다.

1990년대 초 이른바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은 자민통계 진영이 당시 민중당(올해 자민통계가 통합·창당한 민중당과 다르다)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민통계 일부는 1990년대 중반에 이미 특정 지역에서 선거 정치를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울산, 경기 성남 등에서는 구청장 당선 등 성과도 거뒀다. 이들 중 일부가 민주노동당 창당 초기부터 참여했다. 민주노동당이 성장해 노동자 운동 안에서도 유력한 개혁주의 정당이 되면서 나머지 자민통계도 대거 참가했다. 이후 자민통계는 제도권 의회 정치를 본격적으로 추구했고 그에 걸맞는 조직 구조와 관행들을 발전시켰다.

이 책의 주장대로 운동 내에서 자민통계 경향이 종종 패권주의적 행태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파벌 싸움과 패권주의 프레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진정한 정치적 맥락을 가려 버리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2008년 일심회 사건을 빌미로 한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저자는 이 사태의 원인을 주로 자민통계 그룹들의 패권주의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 사태의 본질은 국가 탄압과 여론의 마녀사냥에 진보정당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당시 자민통계가 아닌 좌파의 상당수(노동자연대나 일부 PD 좌파 계열 활동가 등)도 일심회 제명을 포함한 이른바 ‘심상정 혁신안’에 반대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조차 자민통 vs. 비자민통의 대립 구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그랬기 때문에 심상정 혁신안이 부결된 것이다.

당내 주류 온건 PD계열 활동가들은 이 사태를 계기로 당을 좀 더 체제 친화적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일부 PD계열 지도자(가령 조승수 전 의원)는 우익 언론과도 인터뷰하면서 종북 마녀사냥을 부추겼다. 일부는 ‘주사파’들이 보안당국에 자수할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사태를 종합적으로 들여다 보면, 이 사태의 본질은 자민통계의 패권주의로 말미암은 “‘심상정 혁신안’의 참담한 부결”이 아니었다. 정치사상·결사·표현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적 가치조차 지키지 못한 주류 온건 PD파의 후퇴이자 패배였다.

북한 문제

북한 문제가 자민통계의 정치적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저자의 평가는 옳다. 북한은 특히 냉전 해체 이후 안팎으로 심화된 위기에 처했고, 그에 비례해 정권이 극도로 경직됐다. 많은 사람들에게 북한은 남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지지 않게 됐다.

그런데 저자는 북한의 ‘봉건성’을 언급한 일부 인사들에 대해 이렇다 할 의견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북한 봉건 왕조론’ 같은 부정확한 견해에 동의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북한 봉건 왕조론’은 특정 사회의 성격을 분석하는 데서 그 사회의 물질적 기초를 빼놓고 ‘정치적 상부구조’만 본다. 따라서 일면적이다.(물론 정치적 상부구조만 놓고 보더라도 북한은 봉건제도 왕조 사회도 아니다.) ‘북한 봉건 왕조론’은 남과 북이 모두 계급 사회이며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생산과 축적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린다. 이는 암암리에 남한 체제가 본질에서 우월하다는 생각을 퍼뜨리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온건 진보나 자유주의 진영이 가하는 북한 비판은 자민통계로 하여금 북한을 멀리 하고 대신에 남한 기성 체제를 인정하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는 급진성과 변혁성을 거세하라는 요구라는 점에서 온건 개혁주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단지 자민통계만 겨냥한 비판은 아닌 것이다.

‘북한 봉건 왕조론’은 최악의 경우 트럼프의 폭탄으로 북한을 ‘민주화’해도 좋다는 우익들의 주장에 진보·좌파가 일관되게 반대하기 어렵게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1996년 연세대 사태’를 보면서 내린 평가는 여러 가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저자는 민주주의 투쟁 대신 “‘반미’와 ‘통일’을 전면에 내세운 NL의 퇴조는 이미 예견된 일”이라고 한다. (‘반미’라는 용어의 적절성과는 별개로) 제국주의 문제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아니면 제국주의는 존재하지만 민주주의 투쟁보다 부차적이라는 뜻일까? 그도 아니면 제국주의는 존재하지만 대중이 거기에 반대하길 기피한다는 뜻일까?

물론 저자는 광주항쟁 당시 미국에 대한 배신감으로 반미 감정이 확산됐다는 점을 소략하게나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자민통계의 역사를 다루는 데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미국과 제국주의의 현실 문제를 소홀하게 다루는 것은 옳지 않다. 공정한 평가를 하기도 힘들다. 그렇다 보니 자민통계 운동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의 의의와 의도가 무엇인지 오리무중에 빠질 때가 많다.

사실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를 보면,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1930년대 이후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체계적인 계급 협력 정책인 인민전선 전략을 추진하면서 이미 독특한 형태의 개혁주의 정당으로 변신해 왔다. 1970년대 이후에는 소련에 대한 맹목적 충성 관계를 버리면서 유러코뮤니즘으로 전환했고, 사회민주주의와 다를 바 없는 정치세력이 됐다. 소련 진영이 무너진 1990년대 초반 이후에는 더 약세인 정치세력이 되거나 붕괴했다. 그나마 ‘과거의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그리스 공산당 등은 너무 종파적이다.(그렇지 않고 소련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에 버틸 수 있을까?) 한국의 자민통계가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북한 체제가 아직은 외형적으로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민통계를 겨냥한 북한 비판들도 〈노동자 연대〉의 비판 같은 혁명적 좌파의 비판인지, 반대로 체제 친화적으로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인지를 따져 봐야 한다.

부차적 쟁점이긴 하지만, 학생운동의 쇠퇴를 서클 청산에서 찾는 부분도 나온다. 초창기 자민통계는 폐쇄적인 서클주의 청산을 명분으로 당시 주요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서클들을 해산하는 운동을 벌인 바 있다. 자민통계는 서클을 해체하고 이를 이른바 ‘혁명적 대중조직’으로 대체하려 했다. 운동의 전문성과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서클 청산에 비판적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영환이 주도한 서클 청산 운동에 대해서는 몇몇 자민통계 활동가들도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이른바 학생운동의 재생산 구조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서클들의 느슨한 연합으로 군부독재에 맞서는 것은 명백히 비효율적이었다. 학생운동이 전대협-한총련 등 전국 수준의 조직과 운동으로 발전한 것에는 분명 시대적 배경과 필요가 있었다. 또 서클 해체의 효과를 과장할 필요도 없다. 사실 학생운동이 확산하면서 오히려 기존 서클과 같은 기능을 (때로는 더 대중적으로) 하는 학회, 동아리, 세미나팀, ‘활동가 조직’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의 쇠퇴’를 주되게 조직 형태 문제로 접근하는 논의도 협소하다. 사실 전(前)계급적 존재로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계층인 학생들의 행동 양태는 매우 유동적이다. 대규모 학생들이 중앙집권적인 전국적 조직을 통해 항시적 동원 준비 상태로 조직돼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례적이다.

또 ‘학생운동의 쇠퇴’는 어떤 점에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과거 노동계급 운동 등 기층 민중 운동이 일천했을 때 학생운동이 이들의 정치적 대변자 구실을 자처한 적이 있다. 그러나 기층 민중 운동이 자신의 조직을 발전시키고, 정치 정당을 건설하면서 학생운동이 했던 전통적 구실도 축소된 게 사실이다. 당시와는 달라진 한국 자본주의의 경제 상황이 대학생들의 자신감에 미친 영향,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른 정치 환경의 변화와 운동의 분화 등도 종합적으로 고려할 요소다.

또한 자유주의를 표방한 정권들조차 한총련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학생운동의 위축을 획책했다는 사실을 누락한 채 ‘학생운동의 쇠퇴’를 말하는 것도 균형 잡힌 역사 서술이 아닐 것이다. 국가 탄압 문제를 당연한 전제라 여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은 의아하게도 학생운동(어쩌면 전체 계급운동)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던 1997년 김영삼 정부의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과 탄압,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전반적으로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구 좌파’로서 자민통계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이런 정치적 관점의 문제들을 주의하며 운동의 과거를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용도로 읽는다면 도움이 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