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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연재 47:
반혁명의 씨앗을 뿌린 러시아 내전

러시아 내전은 지배계급이 혁명을 깨부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1920년 내전이 끝날 때까지 14개국 군대가 러시아를 침략했다. 이들은 코르닐로프와 차르 시대 군 장성들이 이끈 백군과 함께 반혁명 전쟁을 벌였다.

트로츠키는 유능한 지도자로서 적군을 이끌었고 병사들은 발군의 역량을 발휘해 전투에 임했고 내전에서 승리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무기 공장의 노동자들로 이뤄진 적위대

트로츠키 전기를 쓴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는 트로츠키가 전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설명했다. “트로츠키는 내전을 혁명의 불가피한 한 요소로, 궁극적으로 정치 권력 문제를 제기하는 계급투쟁의 연장으로 봤다.”

1918년 적군 총사령관을 맡았을 당시 트로츠키 앞에 놓인 과제는 어마어마했다.

차르 시대 900만에 이르렀던 군대는 혁명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를 합쳐 대략 3만 명 정도 되는 적위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비정규군이었으며 치열한 전투에 투입될 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적군은 완전히 새로 건설돼야 했다. 게다가 이미 러시아에서 전쟁은 시작된 상황이었다.

1918년 8월에 영국군이 아르항겔스크[러시아 서부의 항구도시]에 상륙했으며 뒤이어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톡에 입항했다.

침략군과 백군은 적군이 조직할 시간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혁명 직후에 징병제를 실시할 수는 없었다. 볼셰비키가 지지를 받았던 것은 평화를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혁명에 헌신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원병을 모집해 군의 중핵을 구축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건설해야 했다.

이와 더불어 군 내부 민주주의는 혁명적 병사들이 싸움에 나서도록 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였다. 노동자와 공산당원 수십만 명이 군대에 자원했다.

트로츠키는 장갑열차로 10만 킬로미터가 넘도록 이동하며 전선을 돌아다녔다.

보통 전투력이 가장 좋은 부대는 노동계급 병사의 비중이 가장 높은 부대였다. 혁명을 성공시켰던 노동자들은 그 혁명을 지키기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다.

혁명을 성공시킨 기본 동역학이 전쟁에도 똑같이 작용했다. 노동자들은 농민을 이끌었으며 공산당원들은 노동자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은 반혁명 세력을 패퇴시켰다. 반혁명 세력은 자기들끼리 분열한데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중적 지지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내전을 치르면서 혁명을 일으킨 계급과 당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공산당원들은 전선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달려갔다. 트로츠키는 “지역의 당 조직은 자신들의 몫 2배, 3배 이상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썼다.

그 결과 약 20만 명이나 되는 공산당원들이 내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경제 전체는 전쟁을 중심으로 가동됐고 전쟁이 끝날 때쯤에는 완전히 피폐해졌다. 많은 산업 부문에서는 생산의 대부분을 군대가 빨아들였다.

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유지하려던 갖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토니 클리프가 썼듯이 “적군 내에서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완전히 관료적이며 선출 조차 하지 않는 원리가 들어섰다. 이는 국가의 다른 부문보다 더 심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중앙집중적 의사결정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그 결과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침식되고 훗날 스탈린 반혁명의 중추가 될 관료주의가 등장했다.

자신이 이뤄낸 혁명을 지키고자 수많은 이들이 영웅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전쟁이 강요한 몇몇 양상이 발전하면서 혁명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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