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의 단어 뜻대로 ‘비참하고 끔찍한 사고’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다. 보름 전에는 사망자 29명과 부상자 수십 명을 낳은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가 발생했고, 한 달 전에는 인천 영흥도에서 낚싯배가 침몰해 15명이 사망했다. 2017년 3월 말 남대서양에서 침몰한 스텔라데이지 호 실종자 가족들의 싸움도 계속되고 있다.

흔히 수많은 참사들이 개인의 과실이나 대비할 수 없는 우연 또는 천재지변의 탓으로 돌려진다. 그러나 각 참사의 구체적 조건은 다 다를지라도 그 이면에는 분명히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기업은 비용을 줄이려고 안전 규제를 어긴다. 국가 관료들은 뇌물을 받고 불법을 눈감아 준다. 안전에 대한 국가의 공공 투자도 슬금슬금 줄어든다. 결국 참사가 터진다. 정부는 참사 피해자나 그의 가족에게 보상금으로 쥐어 주고 사태를 덮기에 바쁘다. 처벌은 말단 직원에게 쏠린다. 고위 책임자일수록 현장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덜 진다. 언론의 관심이 사그라진다. 그 이후로도 항의하는 피해자 가족은 손가락질 받는다. 머지않아 비슷한 참사는 또 발생한다. …

이처럼 반복되는 참사에는 그것을 관통하는 구조적 원인이 있다.

‘사회적 참사’

2017년 11월 24일 국회를 통과한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 2기 특조위법’으로도 알려짐)은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사회적 참사’로 규정한다. “두 참사의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 국가의 안전 관리가 부실했다는 정부 당국의 책임 소지가 있었고, 사고 이후에도 당국의 대응이 부적절”했다는 것이다.

이 규정처럼, 우리는 정부의 책임이 크게 작용하는 사고를 드물지 않게 접한다.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안전 규제를 완화하고 공공 투자를 삭감해 온 이명박·박근혜 정부 책임이 크다. 특히 선박 안전 관련 규제는 2009년 해상운송사업법 시행규칙 개정을 시작으로 눈에 띄게 풀렸다.

박근혜 정부는 참사 이전과 다름 없이 친기업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 참사의 진상규명을 가로 막는 등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세월호를 지워버리려 했다.

문재인 정부는 ‘세월호 적폐’를 청산하겠다며 등장했다. 하지만 그 적폐의 핵심인 규제 완화·공공 투자 삭감 문제는 그대로다.

문재인 정부는 전국 5곳 권역 특수구조대 설치를 안 하고 있는데, 인천에 특수구조대가 있었다면 영흥도 낚싯배 사고의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제천 화재 사고 이후 소방 인력 부족 문제가 크게 제기됐다. 제천은 충북도 안에서도 특히 구조대원과 구급대원의 수가 부족하다. 사고가 동시다발로 나면 사실상 대처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하지만 2018년 정부의 공무원 증원 예산에서 가장 많이 배정된 것은 소방·구조 인력이 아니라 경찰이었다.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비용 줄이기와 부족한 안전 투자가 낳은 참사 ⓒ제공 제천소방서

과거 민주당 정부는 달랐을까? ‘안방의 세월호’라 불린 가습기 살균제가 정부 허가를 받고 출시된 시기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였다. 1999년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사고,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등 민주당 정부 시절에도 대형 참사는 끊이지 않았다.

왜 그럴까? 민주당도 (이 나라 지배계급의 제2선호 정당이긴 해도) 새누리-자유한국당과 마찬가지로 자본가계급에 기반한 친자본주의 정당이기 때문이다.

 무한 이윤 경쟁

많은 사람들이 대형 참사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주목한다. 실제로 지난 3~40년간 전 세계 국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민영화, 규제 완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므로 이 지적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뭔가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 위기에 대응해 더 노골적으로 노동자를 쥐어 짜려는, 자본주의의 최근 모습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의 비인간성과 탐욕스러움 이면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환경이 있다고 봤다. 자본주의의 근본 동학은 경쟁적인 자본 축적이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을 쥐어짜고 저항에 맞설 때는 단결해도, 서로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하려고 피 튀기게 서로 경쟁한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는 이들을 “서로 싸우는 형제들”이라고 표현했다.

자본가들이 벌이는 이윤 경쟁은 끝없이 계속된다. 이윤을 벌어들이면 더 많은 이윤을 벌어들이기 위한 다음 투자에 즉각 나서야 한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더 많은 이윤을 차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효율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수익성도 경쟁하는 것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비용 절감 경쟁도 벌인다. 이런 경쟁에서 패배하는 자본가는 도태되고 파산한다. 이 세계는 경쟁자보다 더 탐욕스럽고, 더 이기적이고, 더 잔인할수록 승자가 되기 쉬운 세계인 것이다.

그런 이윤 경쟁 속에서 평범한 다수의 안전과 생명을 위한 투자(자원 배분)는 너무도 쉽게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나게 된다. 따라서 노동과정에서든, 공공시설 이용에서든, 주거 환경에서든 안전은 계급의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생활 공간은 위험한 ‘서민들의’ 공간으로부터 대개 떨어져 있다.)

자본주의 국가

국가가 이런 자본주의를 규제하거나 그 속성을 억제할 수 있을까? 단기적으로는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으로 국가는 자본주의 경제에 근본적인 제약을 가하지 못 한다. 자본가들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수입의 핵심을 제공한다. 자본가 계급의 착취와 자본 축적이 성공하지 못하면 국가의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국가 관료들 자신이 자본가들과 인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가(국가관료나 선출된 정치인들이) 자본가들 일부와 갈등할 때가 있긴 하지만, 자본 축적의 필요를 거스는 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최근 세계적 경제 침체가 길어지면서 오히려 각 국가들은 자본가 계급의 이해득실에 매우 빨리 반응하고 있다.

영국판 ‘세월호 참사’ 그렌펠타워 화재 ⓒ출처 Natalie_Oxford

따라서 대형 참사를 우파 정권이나 신자유주의 정책의 문제로만 협소하게 봐선 안 된다. 대형 참사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우선순위(‘생명보다 돈’) 문제다.

선진국도 앞서 말한 자본주의의 근본 원리를 공유한다. 그래서 그곳에서도 비용 절감 논리가 끊임없이 대형 참사를 낳는다. 2017년 6월에 발생한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 사고, 철도 민영화가 낳은 1998년 독일 에쉐대역 사고,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덮친 카트리나 허리케인 참사,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 참사,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참사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정부라고 해서 이런 사건들에 대한 대응이 한국과 크게 달랐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매우 비슷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제대로 돌아가는 경제 체제라고 교육받는다. 하지만 그 ‘제대로 된’ 체제에서 평범한 노동계급은 ‘오늘은 아닐 거야’, ‘나는 아닐 거야’하면서 참사의 ‘지뢰밭’ 위를 걸어 다닌다.

교과서와 미디어의 가르침과는 달리, 반복되는 참사를 끝장내려면 미쳐 버린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해야 한다. ‘돈보다 생명’인 사회를 바라는 사람들이 반자본주의적 관점으로도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