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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은 지속가능한 평화의 출발점이 될 것인가

3월 5~6일 평양을 다녀온 대북 특사단이 ‘4월 말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합의를 들고 돌아왔다. 2000년, 2007년에 이어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게 됐다.

이번에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판문점 평화의집)으로 내려올 예정이다. 해방과 분단 이래 북한 최고 권력자가 분단의 선을 넘어 남한 땅을 밟은 적은 없었다. 11년 만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 사실 자체와 함께 이 점이 낳을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명박근혜’ 우파 정권 9년 하에서 남북 대결과 긴장의 연속에 염증을 느꼈으므로 대다수 국민은 판문점에서 열릴 남북 정상회담을 환영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평화의 문을 여는 기회가 되길 바랄 것이다. 이런 바람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는 한 줌의 냉전 우익밖에 없을 것이다.

‘화염과 분노’라는 말까지 나온 지난해 상황을 생각하면 이번 합의는 꽤 극적인 변화다. 게다가 올해 2월 중순에만 해도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지만 마음이 급한 것 같다”며 ‘선 여건 조성’을 강조했다.

대북 특사단을 만난 김정은 ⓒ출처 청와대

냉전 종식 이후 30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남북관계가 냉탕에서 온탕으로 급격히 꺾이는 경우는 매우 많았다.

사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의 갈등으로 한반도 주변 정세가 계속 악화하는 가운데 열린다. 대북 특사단이 평양으로 출발한 3월 5일 미국 항공모함이 43년 만에 베트남에 기항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같은 날 중국은 8퍼센트가 넘는 국방비 증액 계획을 발표했다.

남북관계는 이런 불안정한 국제 정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모순된 상황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으로 한반도 주변 정세에 진정한 해빙은 오지 않을 공산이 크다.

도돌이표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조성될 ‘남북 해빙’ 분위기가 지속될지는 북핵 ‘문제’의 진전 여부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 그러나 북한이 태도를 바꿔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해서, 북핵 문제가 잘 풀린다는 보장은 없다. 대북 특사단의 방북 결과 발표만 봐도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이 특사단에게 한 말은 새로운 게 아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임을 지적했다고도 한다. 대화가 지속된다면 핵·미사일 실험 등을 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북한 체제 안전 보장과 비핵화는 북핵 협상 테이블 위에 오랫동안 올려져 있었다. 적어도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부터 그랬다. 특히,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체결 때 미국은 북한에 군사적 적대 행위를 하지 않고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겠다고 약속했고,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봉인했다.

체제 안전을 보장받으면 비핵화하겠다는 것은 북한의 오래된(‘유훈통치’이기도 함) 약속이자 요구였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무력 압박과 제재로 고립된 북한은 핵개발을 안전 보장 수단으로 여기면서도,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카드로 사용했다.

김정은 집권 후에도 북한은 비핵화 가능성을 닫아 두지 않았다. 2016년 7월 북한 당국은 정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내어,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임을 거론하며 대화 의지를 내비친 바 있다. 당시 미국과 남한은 이 제안을 무시했다.

이번에 김정은은 “한미연합훈련이 예년 수준으로 진행되는 것을 이해한다”고 했다. 미국에 대화하자고 손짓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북핵 문제 협상은 비핵화와 체제 안전 보장 사이에서 숱한 합의와 합의 파탄, 긴장 악화 끝에 도돌이표마냥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북핵 협상이 오랫동안 실패를 반복한 주된 책임은 미국에 있다. 미국에게 ‘북핵 문제’는 단순히 비확산 문제, 즉 북한 핵을 제거하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미국은 제국주의 세계 체제에서 자국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문제, 즉 다른 제국주의 강대국들과의 경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북핵 문제를 다뤄 왔다. 그래서 북한 ‘위협’론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동맹을 규합하고 패권을 다지는 데 이용됐다. 미국은 북한과 협상과 합의를 해도 합의 이행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새로 꼬투리를 잡아 합의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왔다. 고(故) 리영희 선생은 미국이 조약을 지킨 일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을 강조한 바 있다.

지금도 미국 트럼프 정부가 대북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 같지 않다. 〈워싱턴 포스트〉 등도 ‘아직 흥분하기에는 이르다’며 북·미 대화에 대한 낙관론을 경계했다.

물론 트럼프 정부는 ‘무역 전쟁’, 시리아 문제 등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그래서 북핵 문제에서는 잠시 시간을 벌려고 할지 모른다. 이런 점이 최근 트럼프 정부가 북·미 대화에 여지를 주는 이유인 것 같다.

그러나 설사 북·미 대화가 열린다 해도 중장기적 전망은 여의치 않다. 과거 6자회담에 참여했던 국가들의 관계는 지난 10년 새 매우 악화했다. 이제 미국은 중국, 러시아를 공공연히 경쟁자, 적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이런 점이 북핵 협상을 둘러싼 국제적 역학 관계에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잘 알려진 격언대로,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협상과 합의, 합의 이행 과정 하나하나 쉽게 넘어가는 게 없을 공산이 크다. 잠정적 합의가 나오더라도 미국은 필요하면 새 꼬투리를 잡아 합의를 어그러뜨릴 것이다.

제국주의 경쟁, 그리고 이것이 한반도에 주는 압력은 근본적으로 남북 두 정상들이 통제할 수 없는 성격의 문제다. 특히, 문재인은 남북 대화를 진전시키려 하면서도 한미동맹의 틀을 넘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평화운동의 과제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계기로, 노동자 운동과 평화 운동 내에서 남북 당국 간 대화를 지지하고 문재인 정부를 믿어 보자는 생각이 커질 것 같다.

그러나 앞서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경험이 준 교훈은 남북 두 정상의 만남만으로 한반도 평화가 자연스럽게 보장되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반도가 갈수록 미·중 경쟁의 한복판에 들어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한반도 평화 실현(또는 이를 위한 안정적 조건 마련조차)은 남북 대화로, 심지어 북·미 협상으로도 풀리기 어렵다. 그래서 정부 당국 간 대화에 환상을 품게 된다면, 기층 운동은 그저 구경꾼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저 협상 과정에 제시될 만한 의제(가령 쌍중단 같은)를 정부에 조언하고 응원하는 구실에 머물게 될 것이다.

진정한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정부 당국 간 대화를 지켜보고 이를 뒷받침하는 데 주력하는 게 아니라, 독립적으로 평화운동의 기초를 놓으려고 애써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자 운동이 미국의 패권 정책과 그에 대한 한국 정부의 협력 문제에 항의하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경제적 노동자 투쟁에 남북 대화 국면은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호조건이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근로기준법을 개악하고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가운데,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자제할 이유는 없다. 노동자들은 지금의 대화 국면을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고 투쟁을 전진시킬 기회로 삼아야 한다.

물론 이런 운동이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하는 데엔 남북 해빙 국면이 장애물 구실을 할 수도 있다. 노동계 상층 지도자들이 민중주의적(좌파적 포퓰리즘) 어젠다를 추구하느라 어느 수위 이하로 억제하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급과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혁명적 좌파가 제 구실을 한다면 상황은 이와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