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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평양공동선언과 한반도 평화

평양 방문을 하루 앞둔 9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얻고자 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 국제 정세가 어떻게 되든 흔들리지 않는 그야말로 불가역적이고 항구적인 평화입니다.”

이 말은 4월 남북 정상회담과 6월 북·미 정상회담 이후 후속 협상의 진전이 더딘 주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드러냈다. 바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이 심화하는 국제 정세 때문이다.

협상의 돌파구를 내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 남·북 간 무력 충돌 가능성 해소, 비핵화를 위한 북·미 대화 촉진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북·미 사이 중재자 구실을 하겠다고 다시 한 번 밝힌 것이다.

물론 우파들은 애초부터 3차 남북 정상회담이 탐탁지 않았다. 우파의 몽니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럼에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합의한 9월 평양 공동선언(이하 평양선언)이 대통령이 앞서 밝힌 회담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따져 볼 일이다.

제국주의 간 경쟁이 낳는 불안정을 남북 두 정상의 합의문으로 완전히 해소할 수 있을까?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상응 조처

가장 큰 관심사는 아무래도 북·미 간 협상을 진전시킬 충분한 돌파구를 마련하느냐 여부이다.

이번 선언에서 북한은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영구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상응조치”에 따라 영변 핵시설의 영구 폐기 같은 추가 조처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평양선언에서 확인되듯이, 남북 정상회담은 결국 북·미 간 협상의 진전을 위해 “접점”을 찾으려는 과정이었다. 남북 정상이 무엇을 확인하고 약속하든, 결국 미국이 동의하느냐가 관건이다.

이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 시도는 성공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고 말했지만, 트럼프 정부의 전체적인 노선은 여전히 북한에 선 비핵화 조처를 압박하는 데 있다.

남북 정상회담 전날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유엔 안보리를 소집해 러시아 측이 대북 제재를 조직적으로 위반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러시아 측이 반발하면서 미국 측과 회의장에서 논쟁을 벌였다. 이 일은 미국이 평양으로 떠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보내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평양선언에 적시된 대로, 미국이 충분한 상응 조처를 내놓아야 북한도 추가적인 비핵화 조처를 이행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유력 언론들은 트럼프를 제외한 미국 정부 내 고위 참모들 사이에서 대북 협상 회의론이 커져 간다고 지적한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는 최근 미국 국무장관 폼페이오와 대화를 나눈 한 전직 관리를 인터뷰해, 폼페이오가 대북 대화가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은 100분의 1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일각에서는 미국 정가의 이런 분위기를 우려해 남·북한이 트럼프의 원군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대외정책의 일관성이 가장 떨어지는 대통령이다. 바로 1년 전에 그는 참모들의 우려를 무시하고 “화염과 분노”로 치달았던 바 있다.

이는 11월 미국 중간선거 이후 트럼프의 대북 협상 의지도 언제든 뒤집힐 수 있음을 뜻한다. 남·북한이 합심해 매력적인 제안을 내놓느냐는 이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할 근본적 해법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서해평화수역

가장 중요한 북·미 간 접점 찾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은 평양선언의 나머지 합의 사항에도 영향을 미친다.

남·북한은 군사분야 이행합의서에 서명했지만, 합의 내용은 대부분 역대 남북 간 회담에서 언급되거나 합의된 것들이다. ‘남북군사공동위원회’ 설치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로 약속된 것이다. ‘서해평화수역’ 조성은 2007년 노무현-김정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것이다. 결국 합의 자체보다 이행과 유지가 더 어려움을 방증한다.

남북 간 무력 충돌 가능성 해소도 남북 당국 간 합의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컨대 그동안 서해상에서 벌어진 남북 무력 충돌은 주로 제국주의 간(특히, 미·중 간) 갈등이 낳은 한반도 주변 정세의 악화를 배경으로 일어났다.

이런 경험을 잘 기억해야 한다. 제국주의 간 경쟁과 갈등 상황에 따라 남북 간 군사 합의가 무색해지는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표) 1999년 이후 서해상에서 벌어진 남북 간 주요 교전 사태

교전(또는 사건)

배경

1999년 제1연평해전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공습 이후 ‘다음 차례는 북한’이라는 불안감.

금창리 의혹 제기 등 미국의 대북 압박 지속.

2002년 제2연평해전

미국 조지 부시 2세 정부, 북한을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

‘핵태세검토보고서’에도 북한을 핵무기 선제공격 대상으로 적시.

2009년 대청해전

2008년 미국의 새 의혹 제기로 6자회담 결렬.

미국, 북한 장거리 로켓 발사를 이유로 추가 대북 제재 주도.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

11월 연평도 상호 포격 사태

미국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중국 견제 강화).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서해에 항공모함 진입시킴. 한미·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오키나와 주일미군 기지 이전 문제도 유리하게 해결함.

남·북한은 군사분야 이행합의서에서 다시 한번 “단계적 군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닷새 전인 9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은 3000톤급 잠수함 진수식에서 “힘을 통한 평화”를 역설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런 첨단무기 도입이 대북 위협용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북한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문재인 정부는 말과 실천이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남북 두 정상은 평양선언에서 경협 관련 약속도 했다. 철도와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을 열고,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정상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사업 정상화 약속 앞에는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라는 문구가 있다. 그 “조건”이 북·미 간 협상의 진전 여부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 만하다. 문재인 정부가 여전히 미국 주도의 국제 대북 제재를 의식하고 있고 거기에 저항할 생각이 없음을 보여 준다.

무역전쟁

지금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협상들은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등으로 주변 정세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열리고 있다. 무역전쟁은 단지 트럼프 개인의 돌출적 선택이 아니다. 미국 기성 정치권에서도 중국의 경제 성장과 그로 말미암은 미국 패권의 상대적 약화를 더는 좌시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대결 분위기가 점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과 미국 내의 정치 위기(트럼프를 겨냥한 특검 사태로 대표되는)가 맞물리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협상 테이블에도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진보계 지도자 상당수는 민족 공조가 더욱더 중요해졌다고 주장한다. 민주노총 위원장은 삼성 이재용까지 포함된 이번 방북단에 들어가 평양에 갔다. 판문점 선언 이행이 ‘모든 계층과 계급이 힘을 합쳐’ 이행할 과제라고 봤기 때문이다.(한국의 개혁주의는 이처럼 진보 포퓰리즘, 즉 민중주의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러나 과거 경험을 돌아보면 민족 공조로는 제국주의가 낳는 불안정을 해결하기 어렵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계급을 가로지르는 연대 구축을 시도하는 것은 외려 노동계급의 사회 변화 잠재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사드, ‘위안부’ 문제, 한일군사협력 문제 등에서 보았듯이,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와 제국주의) 문제에서도 결코 믿을 수 없는 정치 세력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제국주의 세계 체제와 얽혀 있는 남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우리’가 트럼프의 원군이 되자고 주장함으로써, 트럼프가 세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틈바구니에서 ‘우리’ 한반도만이라도 안전지대로 빠져나가자는 민족 이기주의적 발상을 드러낸다. 그러나 지독하게 반동적인 트럼프가 활개치는 것을 좌시하는 것은 결국 부메랑이 돼 한반도로 돌아올 것이다. 트럼프 같은 노골적인 제국주의자들이 만드는 위험한 세계에서 한반도만 홀로 항구적으로 안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불가역적 평화”는 없다. 불가역적이고 항구적인 평화를 쟁취하려면, 노동계급의 연대와 투쟁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노동계급이 장차 뒷받침할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