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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퇴진 촛불 2년: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의 자부심이 되다

2016년 10월 2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로 가득했다. 박근혜 퇴진을 공식적으로 내건 1차 촛불 집회에 3만 명이 모였다. 이 대회를 주최한 민중총궐기투쟁본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였다.

장장 다섯 달 동안 벌어진 박근혜 정권 퇴진 시위에 연인원 1700만 명이 참가했고 가장 클 때는 230만 명에 달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몇 번이고 서울 도심에서 열렸고 반정부 시위대가 청와대 코앞까지 행진했다.

‘최순실 게이트’의 실상이 본격적으로 폭로된 지 일주일 만에 수만 명이 거리로 나섰고, 처음부터 퇴진을 요구했다. 이는 이 운동이 박근혜 일당의 정치적 부패에 항의하는 민주주의 투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경제적 불평등, 세월호 참사, 노동개악, 한일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등 우파 정권 9년에 걸쳐 쌓여 온 광범한 불만과 분노가 있었음을 뜻한다.

서슬 퍼렇던 박근혜는 이 위대한 운동으로 대통령직에서 쫓겨나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됐고, 이 정권의 “부역자”들과 이재용 등 재벌 총수들이 법정에 서야 했다. 이 투쟁의 강력한 여파는 이명박에 대한 구속과 수사로까지 이어졌다.

무소불위로 여겨지던 권력자들이 촛불에 떠밀려 고개를 숙이고 곤욕을 치르는 모습에 운동 참가자들은 그간 억눌린 울분을 토해 냈고, 싸우면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런 정서는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 계속된 노동자 투쟁과 새롭게 등장한 여성운동의 부상에서도 드러나는 듯하다.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박근혜 정권 4년을 끝낸 것은 아래로부터의 투쟁이었다 ⓒ이미진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다

박근혜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사명으로 삼고, 지배자들의 전폭적 지지 속에 집권했지만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장기 불황 속 지배자들의 고통전가 시도가 이어지면서 박근혜를 향한 불만도 깊어졌다. 이런 물밑 정서는 2016년 총선에서 집권당의 패배로 드러났다. 정권 재창출이 어려울 수 있다는 불안감과 한진해운 퇴출로 말미암은 지배계급 내 일부의 불만 등이 겹치면서 지배자들 내부에서 분열이 가속됐다. 이 과정에서 부패와 비리의 구체적 양상과 실체가 본격적으로 폭로되기 시작했다. 우병우와 문고리 3인방에 대한 폭로가 시작됐고, 〈조선일보〉까지 가세했다.

박근혜 정권을 금 가게 한 돌파구는 우파 정부의 공격에 저항한 노동자 투쟁이 냈다. 이것은 분명 박근혜 당선 직후 일부 사람들이 사기 저하를 겪던 것과는 달라진 점이었다. 2013년 말 비록 패배했지만 철도 파업이 박근혜에 맞설 수 있음을 입증했다. 2015년 박근혜의 ‘노동개혁’에 맞선 저항은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박근혜의 개악 시도를 일부 저지하거나 지연시키는 효과를 냈다. 2016년 쟁의행위로 인한 근로손실일수가 그 전해보다 4배나 늘어나(190만 9788일) 1998년 경제 위기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조선업 구조조정 반대 투쟁, 공공부문 성과연봉제 반대 파업, 갑을오토텍 공장 점거 파업, 기아차와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등이 거듭해서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2016년 총선 결과에 반영된 것이다.

퇴진 운동은 이렇듯 노동자 투쟁이 쌓아 온 밑거름 위에서 터져 나왔다. (저항의 또 다른 축은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이었다.) 퇴진 운동의 사회적 구성에서 노동계급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퇴진 운동 규모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도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가 결정적 구실을 했다. 파업 중이던 철도 노동자들을 비롯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연단에 오를 때마다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치열한 논쟁

일부 자유주의 언론들은 퇴진 운동이 논쟁 없이 자연스러운 합의 속에서 물 흘러가듯 벌어진 양 평가했다. 그러나 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날마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최영준 전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공동상황실장은 이렇게 돌아본다.

“[운동 동참 세력의] 다양성은 운동의 강력함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이 어디로 나아갈지, 그에 따른 구체적 전술은 무엇이어야 할지 등을 둘러싼 논쟁이 불가피한 이유이기도 했다.”

특히 주류 야당과의 관계는 운동 내 가장 뜨거운 쟁점이었다.

“노동자연대 등 좌파는 퇴진행동이 주류 야당과 독립적으로 운동을 건설해야 함을 강조했다. 퇴진행동 안에서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졌다.”(좌파적 시각에서 본 박근혜 퇴진 운동의 주요 쟁점과 교훈, 《마르크스21》 26호)

자본주의 국가 질서 속에서의 변화를 꾀하는 NGO들과 온건 개혁주의자들은 나중에서야 운동에 뛰어들고는 어떻게든 운동이 국회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헌정 절차로 수렴되게 하려고 애썼다.(NGO 지도자들은 초기에 박원순이 정치적 수혜를 입기를 바랐지만 박원순은 운동 초기에 어정쩡한 입장을 유지해 기회를 잃었다.) 국회의 탄핵소추 가결 후에는 집회도 멈추려 했다. 그러나 올해 기무사 문건이 폭로된 것에서 보듯이, 만일 촛불 집회를 중단했다면 일부 우익들이 (오판해) 행동에 나섰을지도 모른다.

운동 내 온건한 지도자들은 어떤 실천적 입증도 없이 마치 자신들이 다수 여론을 대표한다는 듯이 행동했다. “광장의 민심”, “광장 민주주의” 운운하며 한상균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 석방 발언을 연단에 올리는 것을 제약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광장의 민심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조사에서 62퍼센트가 즉각 퇴진을 지지한 반면에 탄핵 절차로 가야한다는 응답은 14퍼센트였다(서울대사회발전연구소). 그래서 이 운동을 발의하고 투쟁적 여론을 대변한 좌파진영이 운동 초기 주동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촛불의 정치적 수혜를 입은 문재인은 한참 지난 뒤에야 박근혜 퇴진을 지지했다. 박근혜 2선 후퇴와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하다가 첫 시위가 벌어진 지 보름이나 지나서야 박근혜 퇴진을 언급한 것이다. 12월 3일 230만 명 시위가 있고 나서야 민주당은 탄핵을 반드시 가결시키겠다고 했는데, 그조차 철도 파업 종료를 전제로 그랬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이 탄핵 가결 이후 노동운동이 강화돼 만에 하나라도 정세를 주도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음을 드러낸 일이다.(그러나 노동자들의 저항이 강해 세 번이나 시도하고서야 파업 종료를 관철할 수 있었다.)

이 시점까지 아래로부터의 퇴진 운동에 주도권을 빼앗겼던 민주당은 탄핵안 통과라는 의회 절차로 옮겨 가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쥐게 됐다.

개혁주의자들은 민주당이 수용할 만한 수준으로 운동의 요구를 낮춰 국회 개혁 입법 과제 정도로 제한하려 했고, 좌파를 견제했다. 탄핵안 가결 이후 노동자연대는 행동강령을 내놓고 적폐 청산 투쟁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개혁주의자들은 적폐 청산을 국회 개혁 입법 연대나 대선 야권 연대를 위한 고리 정도로만 여겼다.

박근혜 퇴진 운동의 밑거름이 된 노동자 운동 박근혜 퇴진 운동의 규모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키는 데에서 선도자 구실을 한 2016년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 ⓒ조승진

아쉬움

퇴진 촛불은 분명 통쾌하게 승리했지만, 계급 투쟁으로 심화할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지는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다.

운동 초기에 좌파들과 노동자 운동의 구실은 빛났다. 이것은 퇴진 운동과 종종 비교되는 2008년 촛불 운동과의 결정적 차이였다. 2008년 촛불 운동은 우파 정부의 집권에 대한 진보·좌파 진영 내 광범한 낙담 속에서 예상치 못하게 터져 나온 것이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조직 노동자들이 계급을 앞세우지 말고 광장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질적 노동자 파업을 조직하지 않았다. 이는 촛불 운동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운동은 100만 시위를 조직하고 100일 넘게 싸웠지만 결정적 승리를 거머쥐지 못한 채 이명박 정부의 반격을 맞이했다. 이 여파 속에 노동자 운동도 상당 기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반면에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에서 자신감을 얻은 노동자들은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지속적으로 투쟁에 나서고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 마트 노동자, 조선 노동자 등은 불만을 드러내고 싸움으로써 문재인의 말뿐인 개혁의 실체를 훤히 드러냈다.

퇴진 운동 초기에 발휘된 노동운동의 주도력은 끝까지 유지되지 못했다.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갈수록 노동계급 고유의 힘을 발휘하려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퇴진 운동에 한껏 고무되는 상황을 이용해 노동계급 자신의 요구를 내걸고 투쟁했더라면 큰 지지 속에 성과를 거두고, 퇴진 운동도 강화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11월 30일 파업은 정치적 상징성은 분명했으나 실질적이지 못했고, 이후에는 아예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민주노총 중집은 ‘탄핵 부결시 파업’이라는 추수적 계획만 내놓았을 뿐이다.

운동이 더한층 도약하려면 혁명적 정치와 조직의 구실이 중요했다. 노동자연대가 민중총궐기투쟁본부에 퇴진 집회를 최초 발의한 일이나 철도 파업 종료를 두 차례 부결시키는 데 기여한 일은 그런 사례다. 그러나 개혁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의 견제를 뛰어넘기에는 아직 세력이 역부족이었다.

문재인은 최근 프랑스에 가서도 “촛불 정부” 운운했지만 경기 침체 속에서 우향우하며 친기업 정책을 펴고 있다. 한편으로 문재인은 사회적 대화를 이용해 투쟁을 억제하고, 노동운동에 온건화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경사노위 참가안을 다루려던 민주노총 정책대의원대회가 참가자 부족으로 무산된 것은 “노동자들이 정부에 화났음을 반영한다.”

여전한 변화 염원을 실현하는 데서 가장 확실한 수단은 문재인 정부와의 협력이 아니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아울러 그 점을 이해하고 실질화하려는 혁명적 좌파가 굳건히 성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