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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사태’ 다룬 영화 〈국가 부도의 날〉:
당시 지배계급의 추악한 대응을 폭로하다

ⓒDaum 영화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11월 28일 개봉한 지 나흘 만에 관객 수 100만 명을 넘어섰다. 1997년 경제 위기라는 간단하지 않은 주제를 다룬 영화인데도 젊은층의 관심이 대단한 듯하다.

영화를 이끌어 가는 것은 IMF 구제금융 사태를 불러온 경제 공황이다. 순식간에 나라 전체가 무너지는 듯한 상황이 잘 묘사된다.

그리고 이 비상 사태를 중심으로 핵심 갈등이 전개된다. 국가 부도를 막으려는 젊은 관료, 친기업 정책을 펼 기회로 삼으려는 고위 관료, 이참에 돈을 벌어 보려는 젊은 사업가, 억울하게 희생되는 서민들.

영화는 당시 지배계급의 우선순위가 결코 평범한 대중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지배계급은 위기를 이용해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이려 했음을 드러낸다.

관료들은 위기 상황임을 비공개로 하라고 명령하면서 유력 재벌에게 정보를 준다.

영화는 신자유주의 노동 정책이 IMF 위기를 거치며 본격화된 과정을 비교적 잘 묘사했다. 한시현(김혜수 분)이 IMF 측 협상팀에게 ‘노동시장 유연화’ 요구의 진의를 묻자 IMF 실무자는 이렇게 답한다. “간접고용, 비정규직”.

IMF만 그런 걸 바랐을까? 작중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이 대책 마련을 주장할 때마다 비웃고 훼방하던, 무능한 듯 한심한 듯 보이는 작중 재정부 차관 박대영(조우진 분)의 속마음은 부하 직원과의 화장실 대화에서 얼핏 드러난다. “이번 기회에 새 판을 짜야 한다”, “노조 하는 새끼들 싹 다 정리해야 [한다.]

박대영은 이후 금융계 거물이 되는 걸로 묘사된다. IMF 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었고 이명박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총괄하다가 산업은행 총재까지 지낸 강만수를 연상시킨다.

또한 영화는 지배자들이 경제 위기가 평범한 대중의 과소비, 무절제함 등이 원인이었던 양 호도하던 당시 상황을 실제 뉴스 영상과 재연을 통해 보여 준다.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물과 전기를 아껴 쓰라고 가르치고, ‘금 모으기 운동’도 시작된다. 회사들은 노동자들에게 명예퇴직 신청서와 비정규직 전환 동의서를 나눠 주고 사실상 하나를 선택하도록 한다.

영화는 20년 후 투기자본 감시 단체 활동가가 된 한시현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국은행 후배(한지민 분)와 함께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서며 “위기는 반복된다” “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는 국가와 기업의 실패로 국가 부도 사태가 났는데도 도리어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노동자·서민은 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몰려 더 군색하고 가난한 처지로 몰렸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인 듯하다.

이처럼 〈국가부도의 날〉의 장점은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국가와 지배계급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는 점에 있다. 다소 생소하거나 어려울 수 있는 경제 개념·용어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해서 사태를 이해하기 쉽다.

ⓒDaum 영화

아쉬움도 있다. 영화의 주요 전개는 1997년에 끝나는데, 그럼으로써 국가의 책임을 공식 정치권의 절반에게만 묻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당시 치러지던 대선 후보들에게도 이행 각서를 받으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안 나오지만, IMF 재협상을 주장하다 입장을 홱 바꿔 IMF 구제금융 이행각서에 서명한 당시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당선 직후에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민 대타협을 한다며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해 준다. 우파와 손잡고 경제 개혁을 한다며 맨 먼저 한 일은 노사정 합의 형식으로 정리해고와 파견근로 등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확대를 본격화한 것이다. 영화에서 한시현이 IMF 협상 실무자에게 “결국 (노동자들을) 해고하기 쉽게 만들라는 것 아니냐”고 항의한 바로 그 제도들 말이다.

이런 아쉬움은 작중 김영삼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잠시 등장해 무식하고 무능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과 대비된다.

진실은, 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게 된 국가 부도 상황은 이윤율 때문에 벌어진 자본주의적 공황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여야 모두 한국 자본주의를 구출하기 위해 이 공황의 대가를 노동계급에게 치르게 하자는 점에서 이견이 없었다. (그 점에서 노동자들의 저항과 요구가 갈등의 한 축으로 부각되지 않은 건 아쉽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를 이어 등장한 민주당 노무현 정부도 2006년에 기간제법 제정, 파견법 개악 등으로 문제를 악화시켰던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국가적 위기를 대하는 지배계급의 실상을 간접 경험하는 청년들은 이런 역사적 경험을 알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 제로, 최저임금 인상을 청년들에게 약속했지만(청년들에게만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다 뒤집어 버리는 것에 실망한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배신에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것이다.

아쉬움이 있지만, 경제 불안정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지금 1997년 경제 공황의 성격이나 국가(지배계급)의 태도를 돌아보며 진정한 대안을 토론하는 기회로 삼아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