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진보적 여성 운동은 거의 다 급진적 페미니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왔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기존 사회가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고 그 위계 체제가 여성 차별적이고 남성 본위라고 본다.

‘급진적’(래디컬)이라는 말은 근본적인 관점으로 사회를 보고 사회의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노동자 연대〉 신문 지지자들 같은 혁명적 반자본주의자들이 보기에 장하준은 정치적으로 사회민주주의자이지만 분명 그의 이론은 급진적이다.(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녹색당의 현실 정치는 좌파적 개혁주의이지만 그들의 더 일반적인 이데올로기는 매우 급진적이다(가령 사회 생산력의 증대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

또한 알바노조와 알바연대가 지지한 가이 스탠딩도 정치적으로는 영국 노동당 지지자이지만 그의 이론은 급진적이다(넓은 의미에서 자율주의의 일종).

마찬가지로, 래디컬 페미니즘이 기존 사회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위계적 체제로 조직돼 있다고 보는 것은 급진적이다.

물론 이런 근본적 관점으로 사회를 보면서도 자본주의를 개혁하겠다는 지도적·중견 활동가들이 여성 운동의 본류를 이끌고 있다.(오래 끄는 경기침체 상황에서는 공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단순한 자유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일면적 평가다.

2년 반 전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계기로 여성 운동 거의 전체가 후원하거나 조직한 각종 집회와 토론회 등이 열렸다. 그 행사들은 급진적 페미니즘을 고취시키고 홍보하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남성이어서 죄송합니다’ 하며 지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여성 운동의 간부들은 자유주의적 개혁파 정치인들과 정치적으로 가까이 지내 왔다. 가령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과 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여성의전화 지도자들의 정치는 민주당 개혁파 국회의원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페미니즘 사상은 여전히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젊은 지지자들보다는 덜 급진적일지라도 말이다.

요컨대 급진적 페미니즘의 정치는 개혁주의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급진적 개혁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물론 큰 줄거리에서 급진적이라는 것이지, 개별 이슈들에서는 그다지 급진적이지 않은 경우도 많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기존 사회의 진보적인 일대 변화를 바라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는 그들의 운동에 대한 지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비록 그들이 조직노동계급 운동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극도로 경계할지라도 그들이 기존 사회의 큰 변화를 염원한다는 사실을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불법촬영 근절을 촉구하는 ‘불편한 용기’ ⓒ이미진

방법

그러나 급진적 페미니즘은 사회 체제의 본질적 특징을 생산노동착취라는 면에서 규정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가부장제’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가부장제’라는 말은 요즈음에는 훨씬 덜 사용되고 그 대신에 ‘여성혐오’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아무튼 가부장제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체제’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자본주의를 임금노동의 착취를 중심으로 하는 생산관계와 생산력이라는 면에서 보지 않고, 남성이 지배하는 여성차별적·남성본위적 체제로 본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의 방법은 본질적으로 관념론적이고 비(非)역사적이다.

그래서 급진적 페미니즘은 특히 문화 쪽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급진적 페미니즘 사상을 설파하는 책들은 넘쳐나고 그 사상은 수많은 대중에게 알려졌어도 그 사상을 위해 대중 행동을 하는 일은 훨씬 적은 경향이 있다.(이 점에서 기존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 비해 ‘불편한 용기’ 측의 성취가 돋보인다.)

급진적 페미니즘의 문화주의와 달리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급진적이 되고 있는 새 세대 여성과 청년들에게 역사유물론과 그 자본주의 분석인 ‘정치경제(학) 비판’을 설명하고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성소수자 차별을 이와 연결시켜야 한다.

또한 노동계급 여성의 조건과 상황을 분석하고, 그들의 욕구와 운동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 달리, 노동조합이 남성 지배적이지 않고 여성들도 다양한 산업부문의 노동조합들에 가입하고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남성은 기득권자?

급진적 페미니즘의 결함 있는 관점을 반영하는 사례를 하나 들겠다. 이다혜라는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말도 페미니스트라는 말도 ‘패션’이나 ‘유행’이라고 부르기에는 생업의 안위를 걸고 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그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두 가지 사례를 드는데, 이런 것들이다.

(1) 아이린이라는 연예인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말한 것을 갖고 일부 팬들이 광분한 일.

(2) 수지라는 가수 겸 배우가 유튜버 양예원 씨의 성폭력 피해 수사 촉구 국민청원 글에 동의했다 해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수지 사형 청원이 시작된 일.

그러나 이런 일들은 대다수 남성들이 자행하는 일들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소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손쉬운 통제 대상을 여성이나 다른 천대받는 사람들에게서 찾는 소수 남성들의 찌질한 행동일 뿐이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전부 또는 대부분을 이런 찌질이들과 싸잡아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남성을 모두 보수 편견쟁이로 몰아세움으로써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중도 입장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의 남성들을 여성 비하적 찌질이들과 한통속으로 취급하는 것은 남성들에게 모욕감을 줄 수밖에 없다. 남녀 노동계급의 단결된 투쟁이 중심이 된 광범하고 좌파적인 대중 운동이 구축되지 못하면, 급진적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반발)가 결국에는 광범한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다혜 작가는 또한 페미니즘 강의나 토크 행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 하나를 소개했다. “남편, 남성 동료, 남자친구, 아들이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행동과 말을 바꾸게 할 수 있는 좋은 책은 뭐가 있을까요?” 이어 그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 답은 다소 회의적이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모범 답안이 있다면, 애초에 차별이 없었[을 것이다.]”

남편, 남성 동료, 남자친구, 아들더러 기득권자라고? 참으로 급진적이기는 하다!

그러나 누군가가 차별을 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기득권을 가졌다고 보는 건 비약이다.

내향성

급진적 페미니즘은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지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육아, 보육, 연애, 섹스 등에 자본주의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의 소외 효과와 경제 위기 상황으로 소위 프라이버시의 모든 측면들과 양상들이 크고 작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개인적인 것 정치적이다” 하고 주격 조사를 바꿔, 개인적인 것에 강조를 두어 말해 보라. 그러면 그것은 여성 차별의 문제들을 개별 남성들의 책임으로 보라는 촉구인 것이다.

실제로 급진적 페미니즘은 특히 1968년 반란이 패배한 1975년 이후 급속히 이런 경향을 드러냈다. 열 일 제쳐두고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에 배타적이다시피 한 강조가 놓이게 된 건 자연스런 결과였다. 물론 우리는 여성에 대한 폭력에 한결같이 반대한다. 특히, 가정 폭력 문제가 심각하다.

하지만 급진적 페미니즘이 동일임금 문제나 보육 문제, 그 밖의 다른 여성 노동자 조건 문제들에 실천상 그다지 열심이지 않은 것은 중간계급 지향성과 개인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7월 30일 대구가톨릭대학병원 파업 집회 ⓒ조승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사상은 또한 라이프스타일 바꾸기 운동으로 나타났다. 요즘의 “탈코르셋” 운동은 1968년 운동 패배 후 급진적 페미니즘의 일부가 실천한 라이프스타일 바꾸기 운동의 축소판이다. 라이프스타일 바꾸기 운동은 여성들이 사회의 변화에 관심을 덜 갖게 만들었다. 대신에 자기성찰이라는 미명 하에 자기와 무관한 일에 관심을 최대한 줄이고 자아 또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에 훨씬 큰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점점 더 내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이 돼 갔다.

분리적 페미니즘

앞서 이다혜 작가가 “남편, 남성 동료, 남자친구, 아들”을 기득권자로 지칭한 사례를 들었다. 일반으로 말해, 어떤 페미니스트가 남편, 남성 동료, 남자친구, 아들이 기득권을 가졌다고 봐도 이들을 적대하지 않는다면 그는 단순한 급진적 페미니스트일 뿐이다. 그러나 그가 남성을 적대한다면 그는 분리적 페미니스트이다.(남성을 기득권자로 보는데도 어떻게 분리적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지만, 현실의 압력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는 물론 다른 분야의 급진주의자도 덜 일관되게 만든다.)

급진적 페미니즘을 급진적 방향으로 가장 극단까지 밀고 나간 것이 바로 분리적 페미니즘이다. ‘분리주의’라는 말은 남성과의 그 어떤 접촉도 극력 기피한다는 뜻이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분리적 페미니즘을 동일시해선 안 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는 둘이 서로 구별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융합돼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2014년 영국 대학생 페미니스트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자신이 “급진적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답변한 사람은 응답자의 18.5퍼센트였고, “분리적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답변한 사람은 1.2퍼센트밖에 안 되었다. 이 현상은 이제 둘을 동일시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남성과 제한적·형식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특히, 남성들이 페미니즘 지지자(가령 강준만 같은 ‘프로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열위(劣位)를 감수하는 한은 말이다.

하지만 분리주의자들은 그조차 싫다며 맹렬하게 거부한다. 가령 ‘비웨이브’와 ‘불편한 용기’의 조직자들은 남성 참가를 단호하게 배격한다. 반면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 조직자들이나 11월 28일치 〈경향신문〉에 보도된 ‘모닥불’은 남성의 참가를 허용한다.(그렇다고 해서 모낙폐 조직자들의 정치가 진정으로 개방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도 운동의 집행 수준에서는 페미니스트들만이 참여하도록 하고,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배제해 왔다.)

앞서 남성을 기득권자로 보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남성이 기득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남성이 여성 차별로 득을 본다고 주장한다. 이를 두고 특권 이론이라고 한다. 페미니스트 하이디 하트만은 선구적으로 1970년대 말에 특권 이론을 주창했다. 그 주장인즉슨, 남성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지배자들과 공모해 여성을 일부 직종에서 배제해 왔다는 것이다. 하트만은 1981년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불행한 결혼’이라는 논문으로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여성해방이론의 쟁점》, 태암, 1990년, 15~64쪽).

급진주의든 그 일종인 분리주의든 그 전제는 생물학적 성차 때문에 남녀의 차이가 결코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저명한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대변자의 한 명이지만 사실 이는 상식이 돼 있다.

그러나 성차 결정론의 주장대로 여성에게 타고난 모성이 있다면, 도대체 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하는가? (물론 급진적 페미니스트들 가운데는 모성 관념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령 한때 급진적 페미니스트였던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만들어진 모성》, 동녘, 2009. 이 책의 원서는 1980년에 쓰여졌다.)

《젠더, 만들어진 성》(휴먼사이언스, 2014)의 지은이 코델리아 파인은 성차 결정론이 사이비 과학이고 그것도 여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이비 과학임을 보여 준다. 특히, 남녀 행동의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만약 성별 차이가 생물학적 성차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성평등을 위한 투쟁은 ‘해 봤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차 결정론을 믿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성평등에 거스르는 사상을 바탕으로 성평등 운동을 하는 모순을 품고 있는 것이다.

방금 언급한 코델리아 파인 외에도 스티븐 로즈와 리처드 르원틴 등이 성역할과 성별 차이에 대한 생물학적 결정론을 논박한 바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들의 업적을 활용해야 한다.

맺음말

분리적 페미니스트의 대표 사례는 ‘불편한 용기’ 조직자들이다. 그들은 “운동권”을 “꿘충”이라며 배제하는데, 특히 기존 여성단체 간부들을 겨냥한 방침이다. 만일 그들이 독자적으로 동맹을 규합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지 않고 그저 기존 여성단체들의 주도권 아래서 불법촬영 근절운동을 건설했다면, ‘불편한 용기’ 시위만큼 커다랗고 효과적인 운동을 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식의 지도를 받으며 조직됐다면, 급진성과 투쟁성, 활력이 떨어져 맥없고 청원 식인 훨씬 소규모 집회로 열렸을 것이다.

‘불편한 용기’ 조직자들의 ‘운동권’ 배제는 그들이 우파여서가 아니라 정치를 배제하는 아나키즘 때문이다. ‘불편한 용기’의 카페 공지사항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워마드, 운동권 및 그 어떤 단체와도 무관한 익명의 여성 개인의 모임입니다.” 또, 이렇게 말한 것도 눈에 띈다. “운동권 단체 분들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여성들을 농락하지 말아 주세요.”

요컨대 각자의 삶을 살며 흩어져 있는 개인(여성)들이 단일한 목표(불법촬영 근절)를 위해 잠시 결집한 것일 뿐, 정치와는 관계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바쿠닌 파를 비판하며 아나키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치를 피하라고 설교하는 사람 치고 부르주아 정치에 다시 빠지지 않는 사례가 없다는 걸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엥겔스도 마르크스의 아나키즘 비판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정치를 삼가는 건 사실 정치를 자유주의적 정치인이나 개혁주의적 정치인에게 맡기는 셈이다.”

실제로 ‘불편한 용기’는 그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정현백 전 여가부 장관 같은 개혁주의 정치인에게 우호적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운동 내의 분리적 경향은 말할 것도 없고 더 일반적으로 급진적 경향 자체가 결국 개혁주의 또는 자유주의 정치의 대안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제 여성 운동이 분열돼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운동들로 존재하기 시작했는데, 다원주의가 유력하면 사람들은 상대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기존의 커다란 실세에 기대는 경향이 커지게 된다. 그 실세는 혁명기가 아닌 평상시에는 자유주의 정당이나 개혁주의 정당일 것이다.

둘째, 여성 운동의 분열에 반대해, 여성이 모두 공통점이 있다고 계속 강조해 여성 연대가 그럴듯해 보인다고 해도, 실제로는 신기루일 뿐이다. 물론 여성은 모두 차별받는다. 그러나 차별받는 방식과 정도는 계급에 따라 크게 다르다. 지배계급이나 상층 중간계급 여성들은 차별을 크게 완화시키거나 달리 해소하거나 전가시킬 수 있다. 낙태 문제나 육아 문제를 생각해 보라. 이런 계급적 차이 때문에 여성 운동 내의 정치적 모순들을 화해시킬 수 없다.

문재인 -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함

셋째, 여성 차별의 원인을 생각해 보면, 분리주의나 급진주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차별의 원인은 가부장제나 여성혐오가 아니다. 노동력 재생산이 원인이다. 노동력 재생산 때문에 가족도 존속하는 것이다. 노동력 재생산은 자본주의 생산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여성 차별을 끝낼 수 없다.

여성 운동이 이 핵심적 문제를 계속 회피하려 한다면 여성 해방의 전망 자체를 회피하는 셈이다. 현재 여성 운동이 내다보는 전망은 체계적 천대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천대의 ‘완화’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타도와 전복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친여성적’ 개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노동력 재생산의 필요성 때문에 여성을 (기존 가족제도 안팎에서)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일들에 종속시킨다. 그래서 오래 끄는 경제 불황 속에서는 여성 차별의 일반적 완화도 언감생심이 된다. 친여성적 개혁도 미흡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 운동은 훨씬 급진적, 그러나 유물론적이 돼야 한다. 문재인 정부와 긴밀하게 연계돼 있는 거의 자유주의적인 지도자들로는 해방을 향한 전망은 어림도 없다. 20세기 초 국제 여성의 날이 결정되던 때 수준의 투쟁성(반자본주의적 급진성)과 물질성(유물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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