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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게재 톈안먼 항쟁 30주년: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학생들의 운동이었는가?

중국 정부의 방역 조처에 반발하는 학생 시위들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텐안먼 항쟁 33주년이 다가오자, 중국 정부가 톈안먼 항쟁을 기리는 행동들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하고 있다. 2019년 톈안먼 항쟁 30주년을 맞아 발표한 글이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재게재한다.

올해로 중국 톈안먼 항쟁이 벌어진 지 30년이 됐다.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중국은 이런저런 변화를 겪었고 미국과 경쟁할 정도로 부상했지만, ‘톈안먼’이라는 혼령은 구천과 이승을 넘나들며 누구에게는 트라우마로, 누구에게는 위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물론 톈안먼 항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체로 그릇돼 있다. 과연 당시 중국 인민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향해 싸웠을까? 광장의 단식투쟁이 상징하듯 학생들만의 운동이었을까? 이 물음들에 대한 답변이 오늘날 투쟁에 나선 중국 노동자·학생을 위한 찬가가 되길 바란다.

톈안먼이 기억되는 법: 지우거나 제멋대로거나

먼저, 중국 지배자들에게 톈안먼 항쟁은 미치도록 지우고 싶은 기억이다. 중국 정부는 이 투쟁을 공식적으로 “불법 폭동”, “반혁명”이라고 규정한다. 항쟁이 무참히 진압된 ‘6월 4일’이나 ‘톈안먼’이란 단어는 SNS에서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중국의 유명 작가 위화는 네티즌들이 검열을 피하고자 ‘5월 35일’이란 새말을 만들었다고 전했을까? 이 자체로 톈안먼 항쟁이 후세대에게 엄청난 영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을 힐끗 알아챌 수 있다.

서구 지배자들은 어떨까? 이들은 자국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은 맹비난하면서도, 톈안먼 항쟁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 “민주화 운동”이었다며 칭송한다. 그동안 곳곳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그것을 톈안먼 항쟁과 연결하기 일쑤였는데, 최근에는 수단에서 독재자를 타도한 사건에 꿰맞추기도 했다. ‘탱크맨’ 이미지를 재생산하며 그저 영웅적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지배자들의 역사관에 모두 반대하며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들춰내야 한다. 그래야만 톈안먼 항쟁의 진정한 성격을 밝힐 수 있고, 그 위대함과 교훈을 고스란히 배울 수 있다. 게다가 ‘서구식 민주주의’를 원했다는 관점은 우파뿐 아니라 당시 스탈린주의 좌파, (류샤오보 같은) 자유주의 지식인도 공유하는 것이다. 이 모든 건 중국이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 사회라는 가정이나 규정에 근거한다.

항쟁의 배경: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항쟁의 구체적 전개를 알아보기에 앞서 그것을 불러일으킨 여러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나서 1978년 덩샤오핑이라는 새로운 지도자가 떠오른다. 그를 비롯한 ‘현대화론자’들은 “시장 사회주의”를 부르짖으며 중국 정치·경제를 탈바꿈하려고 했다. ‘개혁·개방’은 수출 지향적 산업화를 추진하고 무엇보다 중국 경제에 시장 관계를 도입하는 정책이었다. 1979년의 “흑묘백묘론”[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어록’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마오쩌둥의 기존 전략을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사실 강력한 산업국가를 건설하려는 건 마오쩌둥이든 덩샤오핑이든 매한가지였다. 덩샤오핑은 ‘폐쇄적’ 국가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시장을 도입한’ 국가자본주의로 바꾸고자 했을 뿐이다.

이쯤에서 마오쩌둥의 중국이 “사회주의”였는지에 간단히 답해야겠다. 1949년에 성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출발부터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즉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1925~1927년 노동자 혁명 패배 후 노동계급과 단절된 채 농촌 중심의 게릴라 전략을 택한다. 결국 홍군이라 불린 정규군을 이끌고 성공시킨 혁명은 제국주의·군벌 세력을 일소한 ‘민족 해방 혁명’이었다. 공산당 집권 후에도 마오쩌둥은 세계 자본주의와의 경쟁(냉전)에 대응하는 데 몰두했다. 투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중공업에 집중됐고, 이를 위해 노동자를 쥐어짜고 농민을 수탈했다. 파멸을 낳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은 그 절정이었다. 따라서 옛 동유럽이나 소련처럼 중국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즉 관료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착취와 억압을 일삼은 자본주의로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당시 국제 정세의 변화도 중요한데,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패하자 소련과 중국 사이의 긴장은 더욱 커졌다. 그 전쟁에서 미국을 우회적으로 지원한 중국은 결국 1979년 미국과 수교를 맺어 세계 속에 자신을 더 깊숙이 밀어 넣는다. 대만·홍콩·싱가포르 같은 아시아의 용들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모습도 중국의 처지에서는 눈엣가시였다.

이런 상황에서 흘러간 개혁·개방 10년은 중국에 더욱 커다란 모순을 불러왔다. 인플레이션이 악화해 실질임금이 떨어졌고, 불안정·빈곤·부패가 갈수록 증대했다. 이를 만회하고자 혹독한 긴축정책이 시행되기도 했지만 끝내 1989년 초 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중국 지배계급은 자국의 방향을 놓고 분열했고, 일정한 자유화 조치와 함께 이런 위기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치고 들어갈 틈새를 냈다. 1949년에 국민당이 몰락한 결정적 이유 가운데 하나도 치솟는 물가였다.

게다가 톈안먼 항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닷없는 투쟁이 결코 아니었다. 웨이징성을 필두로 1978~1983년에 ‘민주의 벽’ 운동이 일어난다. 민주주의와 검열 폐지 등을 요구한 대자보 운동은 곧 대중 집회로 발전했고, 폴란드 솔리다르노시치[연대노조]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은 상하이에서 비공인 노조를 설립하려 하기도 했다. 1986년에는 학생운동이 폭발해 사실상 공산당에 반대하는 싸움으로 나아갔다.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정치 개혁의 상징적 지도자인 후야오방 공산당 총서기가 자리에서 쫓겨났다.

소수민족들의 투쟁도 빼놓을 수 없다. 1950~1951년에 홍군이 입성해 식민지처럼 돼 버린 지역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벌어졌는데, 그 중심은 티베트였다. 1989년 3월 라싸에서는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민중 항쟁]를 모방한 투쟁이 벌어졌고, 계엄령까지 내려지며 톈안먼 항쟁의 전초전이자 축소판이 됐다.

항쟁의 전개: 반란에서 진압까지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총서기가 갑작스레 사망한다. 그에게 꽤나 기대를 걸었던 학생들은 4월 22일 톈안먼 광장 내 인민대회당 앞에서 공식 추도회를 연다. 무려 20만 명이 참여한 이 집회에서는 적기가 휘날리고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졌다. ‘민주 선거, 언론·집회의 자유, 부패·족벌 종식, 독재 타도’ 같은 정치적 요구를 내건 학생들에게 노동자들도 지지를 보냈고, 이 장례식은 톈안먼 항쟁의 신호탄이 된다.

4월 26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한 사설이 실렸다. “반드시 선명한 기치로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제목의 이른바 4·26 사설은 학생들의 투쟁을 “공산당을 전복하려는 조직적 음모”로 규정했다. 학생들이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을 특히 우려했다. 이에 분노한 베이징 대학생들은 무기한 수업 거부에 돌입한다. 4월 27일에는 학생과 노동자 15만 명이 모여 집회를 열고 베이징 시내를 거의 장악했다. 노동자들은 작업 중단도 마다하지 않았고, 곧 수동적 동조자에서 적극적 가담자로 변모한다.

5월 4일, 1919년 5·4 운동[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운동] 70주년을 맞아 기념 시위가 벌어진다. ‘베이징대학생자치연합회’(고자련)라는 학생운동 연합 조직이 주도한 이 시위에 학생 6만 명과 노동자·시민 30만 명이 참가했고, 이때부터 운동은 톈안먼 광장을 넘어 중국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베이징대학의 일부 학생들은 폴란드 연대노조를 따라 ‘단결학생회’라는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5월 13일, 광장에서 학생들의 단식투쟁이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시위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성장하고 완전히 전국적인 운동이 된다. ‘덩샤오핑 주석, 리펑 총리 퇴진’ 요구가 등장했고, 톈안먼 주위에 최대 200만 명이 집결했다. 이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였고, 매번 수십만 명의 공장노동자들도 참여했다. 심지어 〈인민일보〉의 양심적 기자들도 동참한다. 철도 노동자들은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차표를 내주기도 했다. 이제 시위는 공공연한 반란의 성격을 띠었으며, 임시 자치도시가 돼 버린 광장 주변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질서 유지 업무를 조직했다. (잠시나마) 연대·자립 의식이 싹텄다.

5월 19일쯤에는 ‘베이징노동자자치연합회’(공자련)가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4월 17일 설립된 건국 최초의 독립 노조인 공자련은 중국의 친정부 노조 ‘중화전국총공회’에 맞선 조직이었다. 드디어 노동자들이 조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항쟁 과정에서 총파업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비록 국익론(경제 손실?)을 펼친 학생 지도부의 반대로 총파업은 무산되지만, 이는 노동자의 경제적 힘을 이용해 지배자들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파업 위원회들이 만들어졌다면 평의회(소비에트)의 맹아가 될 수도 있었다. 아쉽게도 이런 기회는 날아갔지만, 노동자들이 의식적으로 조직화하고 관료 지배에 도전한 건 계엄령 발동의 분수령이 됐다. “폴란드의 공포”이자 “가장 위험한 정치적 반대자”(모리스 마이스너)였기 때문이다.

5월 20일, 마침내 계엄령이 발동된다. 이것도 베이징에서 건국 최초였다. 즉각 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수도철강회사 노동자 7만 명은 연대파업을 벌였고, 베이징 인구의 절반인 500만 명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지하철 노동자들은 병력 수송을 막으려고 전기를 차단하기까지 했다. ‘인간 바리케이드’에서는 시위대가 사병들을 설득해 돌려보내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사병들과 매우 우호적으로 지내게 돼 바리케이드의 진가가 발휘됐지만, 완전한 이반이나 탈영을 유도하지는 못했다.

시위는 잠시 교착상태에 놓였다. 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쉴 새 없이 논쟁이 벌어졌다. 동시에 지배자들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진압을 할지 말지 갈팡질팡하면서도 사병들을 철수시키고 그 자리에 노련한 직업군인들을 앉혔다. 이때 ‘민주의 여신상’(사진)이라는 유명한 조각상이 마오쩌둥 초상화 바로 앞에 세워진다. 서구 지배자들은 이게 〈자유의 여신상〉을 본뜬 것이라며 항쟁의 자유민주주의적 성격을 부각하지만, 당시 제작을 맡은 학생들은 오히려 소련의 〈노동자와 집단농장 여성〉이란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6월 4일, 기어코 덩샤오핑은 대학살을 작정하고 무력 진압에 나섰다. 학생 지도부는 무기 탈취를 끝까지 거부한다. 류샤오보 등 지식인들은 학생과 군인 사이를 중재하는 데 열을 올린다. 이 틈을 탄 군대는 장갑차와 탱크로 밀고 들어와 바리케이드를 파괴하고 무차별 사격을 개시했다. 사망자는 수천에서 1만 명에 이르렀다. 권위를 회복할 방법이 달리 없던 중국 지배자들이 자기 인민들에게 내전을 선언해 버린 꼴이었지만, 벽돌과 화염병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진압 이후에도 체포는 계속돼 수만 명이 붙잡히고 그중 상당수가 처형된다. 끔찍한 살육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 서구 지배자들은 전체주의적 독재국가의 인권 탄압이라며 맹공을 퍼붓지만, 이것이 위선일 뿐이라는 사례는 수도 없다.

대중운동: 그곳에 노동자도 있었다

이미 살펴봤듯이 톈안먼 항쟁은 학생들만의 운동이 전혀 아니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시작된 1968년 반란에 관한 오해와 비슷하다. 중국에서도 학생뿐 아니라 다양한 집단이 참여한 대중운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물론 학생은 시위 촉발의 주체였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구실을 했다.

여러 집단 중에서 특히 ‘노동계급’의 대규모 가담과 각성이 지배자들을 벌벌 떨게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 실제 통계를 보더라도, 대학살 때 광장 외곽에 거주하며 거리를 지키던 노동자들이 훨씬 많이 죽었다. 투옥되고 사형당한 사람들도 대부분 노동자였다고 한다.

한국의 5·18 항쟁이 단지 광주만의 운동이 아니었듯이, 톈안먼 항쟁이 베이징에만 국한된 운동이 아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시위는 진작 중국 전역의 투쟁으로 발전했고, 지배자들은 이 점에서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진정한 성격: 독재국가와 시장에 맞선 반란

이제 톈안먼 항쟁의 진정한 성격을 규정해야겠다. 물론 당시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일부에 불과했고, 그들의 머릿속은 되레 모순과 혼란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지향을 “애국적 사회주의”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종합적으로 보면 개혁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모양새였다. 지도부의 이데올로기만으로 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무엇보다 참여자의 사회적 구성과 구체적 요구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또, 서구 지배자들은 얄밉게도 1978년에 덩샤오핑이 부상하자마자 그를 “위대한 자유화의 창도자”로 불렀다. 그런 덩샤오핑에 대항해 ‘정권 타도’ 요구까지 나온 투쟁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향한 싸움이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들은 항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의 망명지 제공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왜 자기들의 체제를 이루려고 싸운 학생들을 받아 주지 못한단 말인가!

요컨대, 톈안먼 항쟁은 부패하고 불평등을 강요하는 중국 지배계급에 맞서 진정한 해방의 잠재력이 등장한 사건이었다.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 1980년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 1987년 한국 민주화 항쟁에서 영감을 얻은 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그 후 동유럽이 혁명으로 몰락하고 소련이 붕괴하는 데까지 이르는 세계적 반란의 일부이기도 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민주적 권리가 없는 스탈린주의 독재국가와 싸웠고, 개혁·개방 10년 동안 빚어진 자본주의 시장의 모순과 싸웠다. 더욱이 “사회주의”라던 중국의 실체를 드러내 전 세계에 충격을 줬으며, 그중 일부에게는 진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이?

톈안먼 항쟁이 물리적으로 패배함에 따라 중국 지배자들은 1990년대에 개혁·개방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중국은 훨씬 더 불평등한 사회가 됐다. 당연히 모순과 불만, 그에 따른 계급투쟁도 지속되고 있다. 농민공 등 노동계급의 규모가 더 커졌음은 물론이다. 이런 상황은 제2, 제3 톈안먼 항쟁의 불씨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중국 지배계급의 ‘트라우마’는 바로 여기서 비롯하는 것이다.

우리는 톈안먼 항쟁의 위대함과 더불어 아쉬운 점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운동이 기로에 섰을 때 엄청난 무장력으로 조직된 국가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가가 그중 하나다. 국가에 맞서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즉 훈련된 노동계급의 조직이 있어야 한다. 당시 공자련 같은 단체는 막 조직되기 시작한 단계였다. 오늘날 중국 노동자들과 학생들도 온갖 위협을 무릅쓰며 투쟁에 나서고 있다. 이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다시금 정치화할 기회가 생긴다면, 톈안먼의 불씨는 이런 사람들 속에서 되살아날 것이고 이들은 지난날의 한계를 극복하려 힘쓸 것이다.

끝으로, 지난해 여름 광둥성 선전시 자스커지 노동자들의 독립 노조 건설 투쟁을 떠올려 보자. 1989년 이후로 금지된 독립 노조를 만들겠다며 싸움에 나선 노동자들과 그들에게 지지를 보낸 학생들은 지금도 무지막지한 탄압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도 광둥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톈안먼이라는 ‘위대한 기억’이 30년 후 이들을 통해 조금이나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투쟁을 전적으로 응원하며 전진의 길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추천 도서

《천안문으로 가는 길》
찰리 호어 지음, 김희정 옮김, 책갈피, 264쪽, 10,000원
《톈안먼(天安門) 항쟁》
찰리 호어 지음, 80쪽, 노동자연대,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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