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계급, 정체성
〈노동자 연대〉 구독

정체성은 우리의 본질에 내재하며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를 규정하는가? 나는 내가 누구와 함께라고 믿는가? 이 물음들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물음도 있다. 나는 무엇이 아닌가? 나는 내가 누구와 함께가 아니라고 믿는가? 이런 관념들이 인종
우리는 정체성 덕분에 삶을 약간 통제한다는 면
이처럼 정체성 개념이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이용된다는 점은 정체성 개념이 결코 진공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사회 자체가 인종차별적이므로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기껏해야 부차적이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의 어떤 면을 무시하거나 부차화하겠다고 마음먹어도, 어떤 사람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인종차별적 편견이 만들어낸 범주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된다.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에서 그런 범주가 가하는 제약은 우리의 뇌리에 워낙 깊게 뿌리 박혀 있어서 마치 항구적 삶의 조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종 관념, 특히 인종 서열 최상층에 백인이 있다는 관념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다. 《백인
이처럼 스스로 선택한 것이든 남이 부과한 것이든, 인종 구분은
강점
단순히 함께 모이는 것만으로도 차별은 개인적 어려움에서 집단적 경험으로 바뀐다. 개인은 차별을 경험하고 무력감을 느끼기 쉽지만 집단은 행동에 나설 잠재력이 크다. 이런 집단 행동은 연대의 기반이 된다. 여성
그러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운동에는 몇 가지 중대한 약점이 있다.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에서 그런 사례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운동에 깔린 핵심 가정은 인종차별을 당하는 모든 사람, 최소한 인종차별을 당하는 특정 인종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이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우 유사한 형태의 차별을 겪더라도 그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상이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인종차별은 체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본보기여서 그에 대한 분노가 정치적 행동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인종차별 경험을 계기로 처음으로 정치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고, 급진적 세계관을 경청할 것이다. 그러나 인종차별로 어떤 사람들은 더 비관적인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차별이 인간 본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여겨 차별을 끝낼 방법이 사실상 없다고 절망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피해자인 자신을 탓하는 보수적 편견에 빠져서,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잘 처신하면 인종차별이 틀렸음을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 내무장관 사지드 자비드는 아시아계 영국인이라 분명 인종차별을 겪을 텐데 그는 차별을 당할수록 더 우경화하는 것 같다. 마치 자신도 인종차별적일 수 있음을 온 힘을 다해 보여 주려는 듯이 말이다. 이주민 배척을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정치인이 인종차별 반대 운동의 일부라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상이한 관점에서 온갖 전략적 차이가 발생한다. 어떤 흑인이나 아시아인들은 대립을 지양하고 경제적
정체성과 공통된 차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조직 방식은 정치적 차이를 가릴 수 있지만 오히려 더 두드러지게 할 때도 많다. 인종을 바탕으로 조직하는 운동에서는
정체성 정치는 차별을 개인적 피해로 여기게 해서,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조직할 때에도 알게 모르게 집단적 조직의 효과를 떨어뜨린다. 개인적 피해를 가늠하려면 사회적 지위나 세계에 대한 경험을
개인의 피해를 기준으로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면 투쟁은 체제 편입을 추구하게 되고,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는 독특한 방식을 하나하나 성토하게 되면서 초점이 미시적 차별로 간다. 그러다 보면 문제의 중심은 점점
영국 인종차별 반대 투쟁의 역사를 보면 해방에 대한 집단적 요구와 개인적 요구 사이의 긴장을 이해할 수 있다. 1970~1980년대에
1981년 브릭스톤 봉기가 일어나 영국 도시 곳곳에서 항쟁이 벌어지자 영국 정부는 흑인 중간계급의 성장을 지원해서 정부와 흑인 노동계급 사이에 완충 지대를 만들려 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저항자들 사이에 분열의 씨앗을 뿌렸다. 정부는 흑인 정치 지도자와 기업가들을 회유하기 시작했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갖가지
표현
한때 단결했던 사람들이 점차 서로를 경쟁자로 봤다. 그리고 많은 지도자가 공동체의 유일한 진정한 대변자를 자처했다. 한편, 야심 있고 영리한 자들은 지방의원이 되거나 정부가 돈을 대는 기구의 고위직에 앉았고, 소수 엘리트는 더 높은 자리에도 앉았다. 보수당은 일부 정체성 정치 신봉자들이 체제 분쇄가 아니라 체제 편입을 원한다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는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에서 더 급진적인 관점을 찾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차별이 개인
인종차별은 빈부를 떠나 사회 전체를 분열시키지만, 더 중요하게는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사용자와 부자들에 득이 된다. 경제학자 마이클 라이시는 1970년대 미국의 소득 분포를 분석해 흑백 간 소득 격차가 클수록 백인 간 불평등도 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수많은 연구들도 인종차별이 흑인 노동자에게 당연히 훨씬 큰 고통을 주지만 백인 노동자의 이익 또한 해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종차별의 기원과 기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에는 여러 함의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에 백인 노동계급을 끌어들일 수 있고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종차별적 편견은 단지 소득 불평등을 낳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모든 측면으로 침투한다. 교육 제도는 흑인 아이들을 거듭 좌절시키고, 사법 제도는 체계적으로 흑인들을 죄인으로 몰고 처벌한다. 뿐만 아니라 흑인에 대한 고정 관념은 사회 각계 각층에 끈질기게 남아 있으며, 시민권은 언제든 빼앗을 수 있는 특전으로 취급된다. 이런 그칠 줄 모르는 공격의 목적은 분열을 심화시키고
인종차별이 분열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려면 사회의 최고 권력자들, 즉 지배계급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인종차별적 관념도 그 나름으로 대중의 의식 속에 퍼져서 자체적인 생명력을 지녀야 한다. 노동자들을 인종차별에 물들게 하려면 그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그럴싸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 비참한 상태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인종차별이 지탱하는 체제를 끝장내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을 주목한 것은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를 전복할 물질적 이해관계와 잠재력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전복이 필연적이라고 보지 않았다. 분열된 노동계급은 이 과업을 수행할 수 없다고 마르크스는 봤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자가 아일랜드 노동자를 차별하는 것이
투쟁은 캠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