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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사회주의자가 말한다:
송환법 반대 운동의 배경과 과제

홍콩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람치렁이 ‘범죄인 인도 법’(송환법) 개정안 반대 운동이 부분적 성공을 거뒀지만, 여전히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전한다. 이 운동이 직면한 쟁점과 과제도 짚어 본다.

역대 최대 규모 시위를 벌인 홍콩 시민들은 이제 행정장관 캐리 람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윤선

6월 16일 홍콩 시민 200만여 명이 ‘범죄인 인도 법’(송환법) 개정안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항쟁에 밀린 홍콩 행정장관 캐리 람은 송환법 처리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정치 위기가 미·중 무역전쟁과 2020년 대만 대선에 출마할 친중 후보에 끼칠 악영향을 중국 정부가 우려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승인 하에서 연기를 결정한 캐리 람은 일련의 사건 때문에 사회가 분열했다고 홍콩 시민들에게 사과했다.

홍콩 인구는 약 75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니 홍콩 인구 전체의 약 4분의 1이 16일 시위에 참가한 셈이다.

16일 송환법 반대 시위는 1989년 홍콩에서 열린 톈안먼 학살 규탄 시위보다 두 배나 컸다.

대중운동은 부분적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캐리 람은 개정안 완전 철회를 거부한다. 이는 개정안을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추진할 가능성이 실질적이라는 뜻이다. 그 목표는 중국 정부가 반중 인사를 중국 본토로 소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6월 내내 홍콩 시민들은 잇따라 시위를 벌였다.

6월 9일 첫 번째 시위에서 약 100만 명이 거리를 행진했다. 이어서 12일에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약 4만 명이 모여, 입법회[의회]를 봉쇄하고 마비시켜 법안 2차 심의를 저지했다.

사회적 양극화

홍콩 경찰은 6월 12일 시위에 폭력으로 대응했다. 경찰은 최루가스와 최루액을 퍼붓고 고무탄과 시위 진압용 산탄을 아무런 경고 없이 쐈다. 홍콩 경무국장과 캐리 람은 송환법 개정안 반대 시위대가 “폭도”이므로 경찰의 폭력 사용은 정당하다고 발표했다.

6월 15일 홍콩 시민 량링제(35세)가 입법회 인근 대형 쇼핑몰 지붕에서 뛰어내려 자결했다. 량은 쇼핑몰에 “송환법 반대” 현수막을 게시했고, 죽음으로 정부에 항의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바로 다음 날 량의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한 200만 명이 거리 시위를 벌였다.

량의 부모는 언론에 이렇게 말했다. “냉혹하게 부를 좇는 홍콩 정부는 청년에게 부자의 하인이 되라고 강요하고 청년을 대출의 노예로 만듭니다. 노동계급과 평범한 사람들은 정부 정책에 아무런 결정권이 없습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에도 홍콩 노동자·청년의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반면 중국의 집권 공산당과 홍콩 자본가들이 결탁해 홍콩은 자유방임 자본주의 체제를 이어갔고, 진정한 노동·사회 개혁 일체를 거부했다.

그래서 사회적 양극화가 악화일로를 걸었다.

지난 20년 동안 홍콩에서 실질 임금은 거의 인상되지 않았다. 인구 전체의 약 5분의 1인 약 137만 명이 빈곤층이다. 홍콩의 불평등 수준은 미국과 싱가포르를 능가한다.

불만은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났다. 첫째, 오랫동안 반정부 운동을 이끌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온건 민주파”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했다. 둘째, 한편에서는 중도 좌파 정당들이, 다른 한편에서는 홍콩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외국인 혐오 성향의 우익 극단주의자들이 성장했다.

우익 극단주의자들은 2014년 우산 운동[아래 ‘홍콩의 저항 전통’ 부분 참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경찰을 상대로 “용맹하게 싸우자”는 [일부] 시위 참가자들과 우익 활동가들은, 우산 운동 조직자들과 광장 점거에서 작전상 후퇴를 주장한 사람들에 대한 비방 운동을 벌였다.

우익은 그런 사람들을 “쭤자오”, 즉 “멍청한 배신자들”이라고 비방했다.

우산 운동과의 차이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홍콩 정부는 우익 주요 인사들에 대한 정치 탄압을 강화했고, 우익 단체 내에서도 격렬한 다툼이 있었다. 그래서 우익의 정치적 영향력은 상당히 약해졌다.

홍콩 정부가 물러섰지만 송환법 반대 운동이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6월 21일에는 홍콩 시민 약 1만 명이 경찰청 청사를 포위했다. 시위대는 6월 12일 시위 참가자들을 “폭도”로 규정한 것을 철회하고 경찰 폭력을 사과하라고 경무국장에게 요구했다.

이런 여러 시위들은 어떤 점에서 보면 2014년 우산 운동의 중요한 약점을 극복했다. 사람들은 운동에 대한 광범한 사회적 지지를 유지해야 함을 깨달았다.

6월 17일 경찰에 항의하는 시위 참가자 ⓒ이윤선

“용맹하게 싸우자”는 전략은 이제는 인기가 없다. 시위 참가자들은 “영리하게 싸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도부도 조직도 없이 인터넷에 동원을 의존하는 사회 운동이라는 운동 형태를 과장되게 예찬하는 일부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정치 파업을 일으키려고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 [건설]이라는 목표를 꾸준히 추구하는 활동가들도 존재한다.

비록 6월 17일 총파업과 동맹휴업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정치 파업은 그 잠재력과 가치를 더 논의하고 시행해 볼 만한 것으로 공개 토론회에서 제기되고 있다.

국제 사회의 지지를 호소하고 주요 국가들이 홍콩과 중국 정부를 “압박”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위자들은 6월 28~29일 일본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 시간에 맞춰 시위를 계획했다.

심지어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홍콩을 “해방시켜” 시민들이 자유를 얻게 해 달라고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이런 행보는 미국과 유럽연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현실에서 이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송환법 반대 운동을 초강대국 정치에 이용해 먹을 수 있게 한다.

그러면 초강대국 열강의 밀실 야합을 위해 운동이 희생을 치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런 행보는 중국 정부의 비방을 수월하게 해서 중국 정부가 본토 시민과 홍콩 시민을 이간질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미국, 유럽, 심지어 중국 본토의 계급 운동과 사회운동의 지지를 얻는 것이 진정한 국제 연대를 얻는 것이다.

예컨대 2013년 항만 노동자 파업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 노동조합에게 자국 정부와 홍콩계 기업을 압박해 달라고 국제적 지지를 호소했고 그런 지지를 얻었다.

그런 국제적 지지가 있어야 시민적 자유를 제대로 지키고 대중운동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존할 수 있다.


홍콩 “일국양제”란 무엇인가?

세이디 로빈슨

1997년 영국은 “일국양제”(한 나라 두 체제) 원칙을 조건으로 홍콩을 중국에게 반환했다. 이 협정은 2047년에 만료된다.

일국양제 원칙이란 홍콩이 독자적인 사법 체계와 화폐를 두고, 표현의 자유 같은 권리를 홍콩에서 보장한다는 것이다.

홍콩의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다. 중국은 홍콩의 외교와 국방 정책을 지배하며 홍콩 정부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홍콩 정부의 수반은 행정장관이다. 행정장관은 친중 성향의 위원회가 추천하고 중국 정부가 임명한다. 현 행정장관은 캐리 람이다.

중국은 ‘2017년에는 행정장관을 직선제로 뽑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2014년에 중국은 이 약속을 저버렸다. 이는 거대한 민주주의 시위[우산 운동]를 촉발했다.

홍콩은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큰 상품 수출국이고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주식시장이 있다.

홍콩은 1950~1960년대에 급격하게 성장한 “아시아의 호랑이” 중 하나였다.

1948~1952년 동안 홍콩 인구는 네 배로 불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 혁명을 피해 홍콩으로 건너온 사람들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홍콩 노동자를 착취하러 온 부유한 자본가가 많았다.

1960년대 초 홍콩은 값싼 섬유·전자·플라스틱 제품의 주요 생산국이었다. 그러나 1961년 홍콩 인구의 절반 이상은 “극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1970년대에는 중국 혁명을 피해서 온 인구의 유입이 줄고 경제가 크게 팽창했다. 노동력이 부족해졌다. 고용주들은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광둥 지방으로 생산지를 옮겼다.

중국이 세계 시장에 개방되면서 홍콩은 중국을 위한 무역과 금융 중심지가 됐다. 중국 부호들은 홍콩에서 돈을 세탁하고 중국에 “재투자”해서 세금을 회피했다.

홍콩은 여러 분야에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국에게 중요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홍콩을 “일당독재 국가와 자유로운 국제 통상을 잇는 위태로운 가교”로 묘사했다.

그 가교를 통해 막대한 자본과 상품이 드나들었다.

“홍콩은 여러 국제 기업들에게 중국 시장으로 진출하는 관문”이었다.


홍콩의 저항 전통

세이디 로빈슨

홍콩을 휩쓴 이번 저항은 2014년 이래로 가장 큰 저항이다. 2014년에는 학생이 이끄는 수많은 시위대가 두 달 동안 도시 곳곳을 마비시켰다.

당시 시위대와 농성자들은 정부 수반을 선출할 권리를 비롯한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했다. 이 운동은 “우산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이 이름은 시위대가 경찰의 최루탄과 최루액을 막으려고 우산을 쓴 것에서 유래했다.

운동은 양보를 얻어내지 못했고 많은 지도자가 구속됐다. 그러나 그 전에 다른 저항들은 승리를 쟁취한 바 있다.

2012년에는 청소년이 다수인 시위대 수십만 명이 열흘 동안 정부 청사를 에워쌌다. 이 시위는 중국 정부 입맞에 맞는 “도덕 교육과 국민 교육”을 하라는 홍콩 정부의 명령에 반대했다. 이 교육 과정은 결국 철회됐다.

2003년에는 50만 명에 가까운 시위대가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새로운 보안법에 항의했다. 당시 행정장관인 둥젠화는 법안을 철회하고 사임했다.

영국의 식민 통치 하에서도 반란과 시위와 파업이 있었다.

1989년에는 당시 홍콩 인구의 6분의 1인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중국 톈안먼 광장에서 투쟁하는 학생들을 지지하는 시위를 태풍이 부는 악천후 속에서도 벌였다.

1956년에는 경찰이 친(親)대만 시위대에게 발포해 59명을 살해한 것에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1966년, 1967년에는 중국 문화 혁명에 고무된 반란이 일어났다.

1967년 반란 때문에 정부는 통치 방식을 전환해야 했다. 그 후 공공 지출이 늘어나고 삶의 질과 임금이 높아졌다.


영국 제국주의의 추악한 유산

세이디 로빈슨

영국은 150년 동안 홍콩을 독재적으로 통치했다. 거의 모든 대중 시위가 불법이었고 평범한 사람들은 빈곤하게 살았다.

영국이 임명한 총독이 홍콩을 다스렸다. 총독은 행정부와 입법회를 선임했다. 영국은 이런 식으로 1990년대까지 홍콩을 통치하다가 1997년에 중국에게 “반환”했다.

영국의 홍콩 통치 방식은 부와 패권을 둘러싼 제국주의 다툼에서 나왔다. 영국은 18세기 동안 꾸준히 중국과의 교역을 늘렸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중국에게서 차와 비단을 사서 영국에 팔았다. 수익성은 좋았지만 중국 지배자들이 교역량을 제한했다.

영국의 묘안은 바로 마약이었다. 영국은 새롭게 점령한 인도의 광활한 토지에서 양귀비를 재배해 아편을 채취했다. 중국을 상대로 한 아편 무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8세기 초 중국으로 유입된 아편은 256톤에 이르며 1838년에 이는 열 곱절로 늘어난다. 중국 관료들이 아편 무역을 금지하려 들자 영국은 전쟁을 일으켰다.

1893년에 시작한 제1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홍콩을 손에 넣었다. 1898년 영국은 오늘날 홍콩 땅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새로운 영토”를 장악했다. 영국은 다른 서구 열강과 나눠먹지 않으려고 중국에게서 이 지역을 99년짜리 조차지[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서 빌려서 통치하는 땅]의 형식으로 뜯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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