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중국 혁명에서 노동계급은 아무런 능동적 구실을 하지 않았다

10월 1일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했다. 거대한 열병식이 조직됐고, 어린이들은 뜻도 모르고 외운 애국가를 불렀으며, 윤이 나게 닦인 군사 장비가 전시됐다. 중국을 다스리는 억만장자들은 새 수제 정장과 드레스를 빼입고 우쭐거렸다.

이 국경절부터 며칠 동안 중국 지배자들은 중국이 이룬 엄청난 경제 변혁에 관해 열변을 토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동자들에게 아직 할 일이 많다고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수많은 노동자들은 해마다 국경절을 전후한 주말에 출근해서 국경절에 쉬는 만큼 일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기념행사를 보고 애국적인 노래와 연설을 들을 것이다. 불꽃놀이를 쳐다보며 경탄할 것이고, 민족 단결을 외치는 공연에 빠져 시름도 일부 잊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더 밝은 미래가 오리라, 자신이 만든 소비재를 일부를 구매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희망할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 출근할 채비를 하면 어마어마한 불평등과 가난, 생태계 파괴, 부패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여성은 왜 자기가 아직도 이등 시민인지 자문할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는 중국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농촌 지주, 군벌, 부패하고 악랄한 국민당 정부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국민당은 곧 대만으로 달아났다. 물론 중국의 옛 질서와 함께 제국주의 지배도 끝장났다.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지만, 민족해방과 경제성장으로 가는 길을 열였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자마자 벌어진 중국 혁명은 서방 진영을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에서 공화당은 “중국을 잃어버렸다”며 트루먼 민주당 정부를 거세게 비난했고, 여기에 고무된 공화당 소속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는 몇 년 동안 반공 마녀사냥 광풍을 이끌었다. 여기서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다운 오만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중국 혁명의 뿌리는 매카시가 공산주의자들이 온상이라고 주장한 미국 국무부가 아니라, 중국 사회와 제국주의 침략에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뿌리

혁명이 일어나려면 의식적인 사회적 행위자들의 전략적 결정, 조직, 계획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혁명의 뿌리는 심층의 사회구조에 있기 때문에, 혁명은 프랑스의 위대한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이 말한 “장기적인 안목”(longue durée)으로 보고 이해해야 한다.

1820년에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었던 중국은 서구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굴욕을 겪었다. 조차지가 서구 열강에게 양도됐다. 서구 열강은 상하이나 홍콩 같은 해안 도시와 점령지를 발판으로 군사력을 이용해 중국 경제에 대한 진입로를 확보하려 했다. 서방의 인종차별주의가 굴욕감을 더 키웠다. 상하이의 유명한 서양인 전용 공원에는 “개와 중국인 출입 금지”라고 적힌 표지판이 있었다.

복종을 감내하는 음울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는 중국 황제와 제국주의 둘 다에 맞선 반란이 주기적으로 일어나 구원을 약속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은 8개국 열강의 군대에 짓밟혀 패배했지만, 1911년 우창 봉기는 청나라 왕조를 끌어내리고 중화민국 시대를 열었다[1911년 신해혁명]. 중국의 새 지배자들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들이 승리하면 중국이 독립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굴욕은 1920년대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전 세계 식민지와 후진국에게 희망의 등대이자 혁명의 본보기가 됐다. 이를 배경으로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했다. 중국공산당은 이내 커다란 시험대에 올랐다가 실패한다.

1925~1927년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혁명적 운동이 특히 중국 동남부에서 전개됐다. 노동자와 농민 수천만 명이 동참한 이 운동은, 처음에 1925년 5월 상하이에서 영국이 시위대를 학살한 것에 대응해 서방·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자는 민족주의적 요구를 둘러싸고 결집했다. 외국 기업들에 맞서 파업이 벌어졌고, 영국 치하의 홍콩에서는 총파업이 1년간 지속됐다.

이 투쟁의 민족주의적 초점 덕분에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이 성장해 정권을 위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의 민족 단결 요구는 금세 계급 적대의 제물이 됐다. 농촌에서는 농민이 자신을 직접 억압하는 지주와 고리대금업자에게 초점을 맞췄다. 도시에서는 노동조합원 수가 급증했고, 노동계급이 점점 독자적 이해관계에 눈을 떴다. 파업은 이제 중국 자본가에게 대항해서도 조직됐고, 이는 민족주의의 핵심적 모순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새로 설립된 노동자 민병대가 1926년에 몇몇 도시에서 거리를 장악하자, 민족 단결은 자취를 감추고 노동자 혁명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국민당이 피지배계급을 동원해 자기 목적을 추구하던 상황이 역전됐다.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 대해 국민당이 취한 야만적인 대응은 국민당이 중국 자본가와 지주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지방에서 국민당은 농민에 맞선 지주의 흉폭한 반격을 지원했다. 1927년 4월 국민당은 상하이 노동자들에게 총부리를 돌려 노동자 5만 명을 학살하고 노동자 조직들을 파괴했다. 다른 곳에서도 수많은 노동자가 살해됐다. 학살 주범은 국민당이지만 노동계급이 무방비 상태로 습격을 당한 것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전략 탓이었다.

중국공산당

혁명적 상황 덕분에 중국공산당은 당원 수가 1925년 1000명에서 1927년 초 3만 명으로 늘어났다. 중국공산당은 특히 도시에서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고, 노동운동에 점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 영향력에는 모스크바와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촉진하고자 1919년 볼셰비키가 창건한 조직)에서 나타난 새로운 변화가 아로새겨졌다.

1925년 광저우 노동자 파업

소련의 고문들이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국민당의 당 조직 건설과 군사훈련을 돕기 시작한 1924년에 이미 코민테른은 스탈린주의화하고 있었다. 스탈린주의가 국제 노동운동에 끼친 가장 큰 재앙은 바로 독일(나중에는 스페인)에서 파시즘 발흥을 막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실패의 초석이 바로 중국에서부터 마련되고 있었다.

스탈린주의는 새로운 러시아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했다. 이들은 1917년 이후 내전과 외국이 개입한 전쟁으로 노동계급이 거의 섬멸된 상황을 배경으로 부상했다. 국가와 국유재산에 대한 지배를 기초로 한 그들의 권력은 1928년 볼셰비키 내 좌익반대파를 패배시키고 중앙집권적 계획을 수립하면서 더 공고해졌다. 새로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지배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을 지원하기보다는 소련의 국익, 따라서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는 데에 이해관계가 있었다. 코민테른 역시 스탈린주의화했고 세계 공산당들은 소련 지배계급의 도구가 됐다.

소련에게 주된 위협은 서방 제국주의였다. 스탈린은 서방 제국주의를 약화시키되 소련의 통제를 벗어난 혁명적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민당을 지원하고 국민당의 급진성을 보증해 주려 했다. 1926년 3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국민당을 “노동자·농민·지식인과 도시 민주주의[부르주아지를 지칭하는 듯하다]의 혁명적 연합”으로 규정하고 “동조 정당”[준회원]으로 인정했다.

그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게 국민당과 동맹을 맺으라고 고집했다. 국민당과의 동맹은 결국 중국공산당의 독립성을 제약했고, 중국공산당이 노동운동에 자제를 설교하도록 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동맹자’가 1927년 4월 노동자들을 공격했을 때 노동운동은 스스로 방어할 대비가 돼 있지 않았다. 1925~1927년에 중국공산당은 사실상 국민당 좌파로서 처신했다. 오직 지도자 한두 명만이 동맹을 끝내라고 촉구했다. 마오쩌둥은 그러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국민당과의 동맹을 끝까지 지지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있었다.

연속혁명

레온 트로츠키가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 발전시킨 연속혁명론은 러시아 같은 후진국이나 반半식민지의 자본가계급이 반동을 격퇴하고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기에는 너무 취약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러시아에서 차르 체제 타도는 대중의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산업이 발전하고 노동자 운동이 밀집한 지역이 존재한다 해도, 농업이 우세한 사회에서는 변화를 추동할 분노가 대부분 농민에게서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농민은 지리적으로 흩어져 있고 부농과 빈농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단결해서 혁명을 밀어붙일 수 없다. 혁명을 밀어붙이려면 노동계급의 집중된 힘과 조직이 필요하다.

이는 자본주의의 존립에 문제가 된다. 노동계급이 결집하자마자 노동계급 고유의 이해관계가 전면으로 부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주장했듯이 노동계급만이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할 유일한 세력이라면, 그 혁명은 금세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즉 혁명이 ‘연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트로츠키의 이런 분석이 정확했다는 점을 보여 줬다. 비극적이게도 1925~1927년 중국에서 벌어진 일은 트로츠키의 이론을 부정적으로 입증했다.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은 트로츠키와 정반대로 주장했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독자적 이해관계를 옹호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행동을 엄격하게 제한했으며, 국민당이 제국주의에 제대로 맞서 싸울 것이라는 환상을 부추겼다. 급진적 사회변혁 강령만이 대중을 끌어들이고 “외부에 의한 군사적 패배로부터 혁명을 지켜 낼” 수 있었지만, 공산당은 운동이 방향을 잃고 국민당에게 학살당하게 내버려 뒀다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1931년 중국 동북부[만주]를 침략한 일본은 거의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다.

1949년을 향한 대장정

1927년의 패배는 1949년 혁명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1926년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국민당 지도자이자 장차 상하이에서 노동자들을 학살할 장제스에게 코민테른 명예 회원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트로츠키뿐이었다. 1927년의 패배 이후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결별했지만, 충성 대상을 우한의 ‘국민당 좌파’ 정부로 바꿨을 뿐이었다. 트로츠키가 며칠 앞질러 예측한 대로 1927년 5월 말 우한 정부도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마오쩌둥주의는 패배의 산물이었다. 상하이와 그 밖의 지역에서 자행된 도살은 중국공산당의 노동계급 기반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살아남은 당원들을 다시 결집시켰지만, 그 후 공산당은 농민에 기반을 두고 도시 지식인이 지도하는 당으로 변해 버렸다.

초기에 생존자들은 국민당 세력이 비교적 약한 일부 농촌에 적색 기지를 세우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1930년대 초 국민당이 반격에 나섰다. 1934년 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전략적·지리적 후퇴만이 살 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대장정’으로 알려진, 참으로 대담한 모험이 시작됐다. 1934년 10월 10만 명가량이 출발했는데, 1년 후 국민당이 장악한 남부에서 멀리 떨어진 산시성 북부[옌안]에 도착했을 때는 8000명만이 남았다. 그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지주와 군벌을 처리하는 대단한 전술적 솜씨와 농민의 지지를 얻어 내는 능력을 보여 줬다. 마오쩌둥의 지도력이 확고해진 중국공산당은 산시성을 근거지로 삼아 병력을 복구하고 농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렸다.

산시성은 중국공산당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거점이기도 했다. 덕분에 공산당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존중을 얻었지만, 중국공산당의 관점은 여전히 철저히 스탈린주의적이었다. 1935~1936년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항일 연합 전선’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공산당은 ‘노동자·농민 민주주의 독재’와 지주 재산 몰수 공약을 포기했다. 계급의 적과 동맹을 맺자는 제안은 유럽 공산당들의 인민전선 전략을 본뜬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인민전선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자제시켰지만, 항일 활동 덕분에 대규모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1940년에는 당원 수가 100만 명에 육박했다. 반면 국민당은 파벌 다툼에 빠졌고, 트로츠키가 예측했듯이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데에서는 한없이 무능했다. 영토 보전에 실패한 국민당이 국익을 대표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공산당의 홍군은 중국의 10퍼센트 이상을 장악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도 영향력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내전이 다시 벌어졌지만 1927년과 달리 형세가 뒤집혔다. 공산당은 이제 무장해 있었다. 국민당은 중국 영토의 9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중국인 다수는커녕 자기 군대에게도 충성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1949년 10월 마오쩌둥은 권력을 잡았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망쳤다.     

노동계급과 혁명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마오쩌둥이 이끈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다. 그가 1949년 10월 직전에 밝혔듯이 중국공산당의 목표는 자본주의를 고쳐 쓰는 것이지 뒤집어엎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홍군이 도시들을 해방할 때, 고위 장교들은 노동자들에게 직장에서 뛰쳐나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물론 중국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 없었다 해도 1949년 10월에 벌어진 일은 혁명이었다.

국민당이 지배하던 옛 질서가 무너지면서 제국주의 손아귀에서 중국이 당하던 굴욕도 끝났다. 그 결과 부국강병의 꿈을 실현할 기회가 찾아왔지만, 중국의 민간 자본은 너무 취약한 나머지 필요한 자본축적과 투자를 수행할 수 없었다. 소련처럼 중국에서도 국가기구가 하나의 경제적 세력을 이루었다. 고위 공산당 관료, 산업 경영자, 군 장성 등으로 이뤄진 새로운 지배계급이 부상했다.

1949년 이후 나타난 주요한 변화와 국가정책의 우여곡절은 중국 통치자들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성원으로 봐야만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당연히 노동계급은 국가정책의 대상, 경제 생산의 원천이자, 거수기였을 뿐 자치나 정치권력의 근원이 아니었다. 때때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경쟁하는 지배계급 분파에 의해 동원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배계급 내 다툼에서 승부가 결정되거나, 대중행동이 위에서 설정한 엄격한 한계를 돌파하려 하자마자 그들은 해산당했다. 1960년대 중반의 이른바 “위대한 노동계급 문화혁명”이 중요한 사례다.

‘공산주의’라는 칭호의 이면을 보지 못하거나 국유화 뒤에 숨은 착취적인 사회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자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1949년 중국은 스탈린 치하 소련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고, 오늘날까지도 근본적으로 국가자본주의다.

중국 내에는 미래를 위한 희망도 있다. 홍콩에서든, 후난성에서든, [영국의 공업 도시] 핼리팩스에서든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잉여가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70년 역사가 증명하듯이, 노동자들은 자기가 당하는 착취를 그저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으며, 억압에 침묵하지도 않는다. 1976년과 1989년의 톈안먼 광장, 1970년대 말 중국 전역으로 퍼진 ‘민주의 벽’ 운동, 2007~2015년의 파업 물결, 오늘날 홍콩 투쟁 등에서 중국 노동계급은 자신들이야말로 중국 혁명을 완성할 힘을 지닌 유일한 세력임을 보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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