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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항쟁 20주년 ─ 위대한 반자본주의 항쟁

1999년 시애틀 WTO 정상회담 반대 시위 이 시위는 몇몇 개별적인 불의가 아닌 체제 자체를 겨냥한 저항 물결의 신호탄이 됐다 ⓒ출처 Seattle Municipal Archives

20년 전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에 맞서 일어난 시위, 도로 봉쇄, 소요는 정치·경제 체제를 지배하는 자들에 맞선 새로운 저항의 탄생을 상징했다.

미국 시애틀에서 벌어진 이 항쟁은 세계를 지배하는 엘리트를 향한 매서운 분노를 보여 줬고, “반(反)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유행시켰다.

열 달 후 기업주들의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썼다. “시위대가 이 시대 가장 시급한 정치적·도덕적·경제적 문제로 제3세계 빈곤을 꼽은 것은 옳다.

“세계화 물결이 아무리 강력해도 이를 뒤집을 수 있다는 지적 또한 옳다. 둘 모두 사실이기에 시위대, 더 결정적으로는 시위 지지 여론의 흐름은 대단히 위험하다.”

활동가들은 여러 달 전부터 시위를 준비했다. WTO는 이윤 논리에 입각한 경제적 세계화가 낳은 모든 폐해의 상징으로 채택됐다.

WTO의 무역 정책은 환경 파괴를 부추겼다. 주요 WTO 회원국들은 가난한 나라에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강요했다. WTO는 다국적기업이 지배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개방했다.

시애틀 항쟁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신으로 군림한 자들에 맞선 한판 승부였다.

주요 시위가 시작되기 며칠 전에 열린 공개 토론회 “세계화, WTO, 대안”에는 2500명이 넘는 참가자가 왔다. 혹시 환불된 입장권이 있나 해서 아침 6시 30분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이 150명이었고, 암표상이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입장권을 팔았다.

토론회에서 사람들은 10시간 넘게 쉬지 않고 연사 40명의 연설을 경청했다. 자본주의를 맹렬히 비난하고 WTO의 우선순위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자고 호소하는 연사에게 가장 큰 갈채가 쏟아졌다.

거리

예정된 WTO 회의 날짜를 하루 앞두고 활동가 수천 명이 환경 파괴에 항의하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일부는 바다거북 의상을 입었다. WTO가 바다거북의 멸종보호종 지정을 폐지하라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초저녁에는 5000명이 WTO 개막 행사 장소로 행진해 “제3세계 부채 탕감을 위한 인간 사슬”을 만들어서 행사장을 포위했다. 사람들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외쳤다. “우리 나라 잘못이다. 부채를 탕감하라.”

WTO 회의 개최 예정일인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수많은 사람이 회의를 막으려고 회의장 주변 주요 교차로를 점거했다. 사람들이 서로 팔짱을 끼거나 도로 시설물에 몸을 묶어서 모든 도로를 봉쇄했다.

WTO의 부티 나는 엘리트들이 호텔에서 모습을 드러냈만 회의장에 갈 방법이 없었다. 오전 세션이 취소됐다. 시애틀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봉쇄를 지원하러 행진해 오면서 시위가 불어났다.

학교와 대학에서 동맹 휴업을 한 학생들도 집회에 합류했다. 경찰이 노발대발하며 시위대를 최루가스와 고무탄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봉쇄는 계속됐다.

경찰의 공격이 거세질 때쯤, 도시 외곽에서 집회를 연 노동조합원 약 2만 5000명이 행진해 시위 현장에 도착했다. 애초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거리의 ‘급진 분자’들과 거리를 둘 계획이었지만, 처음에 조합원 한두 명이 시위에 합류하더니 곧 조합원들이 떼를 지어 시위에 합류했다.

그 유명한 “팀스터[미국 운수노조]와 거북이의 단결”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경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시위대를 급습해 섬광탄을 쏘고 수십 명을 체포했지만, 시위대가 승리했다. WTO 회의는 상당한 차질을 빚었다. [회의는 결국 취소됐다.]

다음 날 더 많은 경찰과 주(州)방위군 수백 명이 배치돼 도시 내에 “시위 금지 구역”을 두었다. 이들은 노동조합원들과 다른 시위대의 행진을 공격하고 포위하고, 수백 명을 버스에 실어 연행했다.

지속

하지만 시위는 낮은 수준으로 이틀간 더 이어져 당국이 통제력을 잃었음을 보여 줬다. 신자유주의라는 거인을 쓰러트릴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큰 승리였다.

승리는 시위에 참가한 이들도 변화시켰다. 16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애틀까지 와 시위에 참가한 앰버 패티슨은 이렇게 말했다. ‘바다거북을 죽이는 것에 항의하러 여기에 왔다. 하지만 전 세계를 뒤집어 엎으리라는 결심을 품고 돌아간다.’

〈소셜리스트 워커〉 당시 편집자 크리스 하먼은 이후 다음과 같이 썼다. “때때로 어떤 사건은 직접 관여한 사람 수와 전혀 관계 없이 그 상징성 때문에 중요하다. 시애틀 시위 자체는 특별히 크지 않았다.

“하지만 시애틀 항쟁은 매우 중요한 징후였다. 거의 정확히 10년 전의 베를린 장벽 붕괴는 사회주의의 종말로 그려졌고, 자본주의는 이후 인류 역사 내내 지배력을 도전받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시애틀 항쟁은 새로운 도전의 분출이었다.”

그리고 시애틀 항쟁은 정치적 일반화를 반영했다. 이제 표적은 특정한 몇몇 불의가 아니라 체제였다.

시애틀 항쟁 이후 여러 신자유주의 회의를 겨냥한 시위가 되풀이됐다. 절정은 2001년 7월 이탈리아 제노바 G8 정상회담 저지 시위였다. 시위 진압 경찰이 젊은 시위 참가자 카를로 줄리아니를 살해한 이후 30만 명 넘는 사람이 시위에 참가했다.

2001년 1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시작된 연례 세계사회포럼은 조직화, 토론, 이론화의 초점이 됐다.

시애틀 항쟁 조직에 참여한 아나키스트 크리스 딕슨은 당시 철강 노동자들과 환경 단체 ‘어스 퍼스트!’의 공동 활동에 대해 최근에 이렇게 썼다. “철강 노동자들은 카이저알루미늄에 맞서 장기간 투쟁하고 있었고 1999년 초에는 일터 출입까지도 가로막혔다.

“카이저는 막삼사(社) 소유였고 악명 높은 CEO 찰스 허위츠가 경영자였는데, 그는 캘리포니아 북부의 오래된 삼나무숲을 벌목하는 퍼시픽럼버사(社) 소유자이기도 했다. [사측은 미조직 벌목 노동자들을 카이저알루미늄에 파업파괴자로 쓰려 했다.]

“‘어스 퍼스트!’는 1980년대부터 숲을 보호하는 직접 행동을 벌여 왔다. 직장에서 쫓겨난 철강 노동자들과 숲 지킴이들은 허위츠가 공동의 적임을 확인하고는 함께 저항하기 시작했다. 함께 피켓라인을 지키고 함께 나무를 지켰다.”

시애틀 항쟁의 뿌리는 깊었다. 1980년대 말 러시아와 동유럽 정권들이 붕괴한 이후 신자유주의적 경제·사회 충격 요법이 세계 대부분 지역에 무자비하게 강요됐다.

1999년 시애틀 항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1994년 초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일어난 사파티스타 봉기,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 31년 독재자 수하르토를 끌어내린 1998년 인도네시아 대중 운동이 바로 그런 사건이었다.

불만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은 새로운 운동을 배양하고, 새로운 운동은 다시 불만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무한다.

수많은 활동가가 29세 나오미 클라인의 《노 로고》 (시애틀 항쟁 이전에 썼고 직후에 출간했다) 같은 책들을 읽고 토론했다. 이 책은 3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됐고 전 세계적으로 100만 부 넘게 팔렸다.

시애틀 항쟁 이후 반자본주의의 부상은 좌파에게 도전을 안겨 줬다. 꼭 필요했던 첫 단계는 항쟁을 크게 환영하는 것이었다.

모든 좌파가 이를 해낸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시위대의 “폭력”을 규탄했다. 다른 이들은 항쟁이 대체로 국수주의적이라고 오해했다.

‘유연단체’*, “체포각오자”와 “비체포각오자” 같은 신조어와 수신호로 의사소통하는 회의 방식에 진저리를 낸 이들도 있었다.

가장 무익한 태도는 새로운 열기를 모두 기존 관행에 욱여넣으려 하는 것이었다.

최선의 대응은 배울 점이 많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운동과 동떨어진 채 설교나 늘어놓으며 우리의 멋진 프로젝트에 당신들이 열의를 쏟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20퍼센트의 이견이 아니라 80퍼센트의 동의를 부각해야 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도 운동에 기여할 점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무엇보다도, 노동자 혁명의 기반 위에서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가 다니엘 벤사이드가 말했듯이 “자유시장 규제에 기초한 공상적 대안, 케인스주의적 공상적 대안, 특히 자유지상주의적 공상적 대안 등 권력을 잡지 않고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일체의 공상적 사상들”을 사회주의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혁명가들은 노동계급의 구실에 관한 핵심 쟁점들을 제기할 수 있었다.

시애틀 항쟁이 촉발한 국면은 9·11 테러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제국주의적 공세로 끝을 맺었다.

시애틀 항쟁에 참가한 이들 중 다수는 반전 운동의 일부가 됐다. 특히 영국에서 그랬고 미국에서는 그보다 덜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경험은 오늘날 우리가 시애틀의 구호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다른 세계는 필요하다”를 다시금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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