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 역자의 주, [ ―추나라]는 원저자의 주.


21세기 들어 세 번째 세계적 투쟁의 물결이 지금 일고 있다 9월 홍콩 ⓒ출처 Studio Incendo

2019년을 돌아보면, 세계는 투쟁의 새 물결 속에 들어섰다. 봄부터 그 조짐이 있었다. 4월 알제리와 수단에서 군부가 혁명이 계속 전개되는 것을 막으려고 독재자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알제리)와 오마르 알바시르(수단)를 제거해야 했다. 6월 홍콩에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인 2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민주적 변화를 요구하는 항쟁에 나섰다. 7월 푸에르토리코에서 통치자 리카르도 로세요가 시위로 쫓겨났다. 초겨울이 되자 반란과 대규모 시위가 칠레·에콰도르·콜롬비아·레바논·아이티·기니·카자흐스탄·이라크·이란·카탈루냐에서 터져나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프랑스에서 총파업이 진행 중이고 일부 지방에서는 노란 조끼 운동이 여기에 동참했다. 그 전에 노란 조끼 운동은 사회 변화를 요구하며 1년째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현재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일은 투쟁 물결이 유럽으로도 밀려들어 왔음을 보여 주는 듯하다.

21세기 들어 세 번째로 맞이하는 투쟁 주기다. 첫째 주기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엽까지 이어졌다. 당시에는 기업 위주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부상했다. 특히, 세계무역기구(WTO), G8 정상회담,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같은 기구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와 세계사회포럼·유럽사회포럼 같은 대토론회들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투쟁의 정점은 라틴아메리카였다.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잇달아 반란이 일어나 정부들이 무너졌다. 투쟁이 대륙적 규모로 벌어진 결과 좌파적 민족주의 경향의 “핑크 물결” 정부들이 등장했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정부가 수립됐고,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정부처럼 좀 더 온건한 축도 있었다.

둘째 주기는 2011년에 시작됐다. 이는 유럽에서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운동 같은 광장 점거 운동과 스페인·포르투갈·프랑스·그리스·벨기에·이탈리아·영국에서 노동조합 연맹들이 소명한 대중 파업으로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점거하라’ 운동으로 나타났다. 이 운동은 “우리가 99퍼센트다”라는 슬로건으로 많은 시위대를 결집시켰다. 시위는 월스트리트에서 특히 많이 벌어졌고 이후 세계적으로 확산했다. 이 투쟁들은 2008년부터 이어진 경제 위기와 긴축정책에 대한 반감을 반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반란의 정점은 선진국 바깥에 있었다. 이번에는 아랍 세계였다. 처음에는 튀니지, 그 다음에는 이집트에서 혁명적 운동이 일어나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고 리비아·시리아·바레인·예멘으로도 투쟁이 번졌다.

투쟁의 셋째 주기가 지금 시작됐다는 주장에는 두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한다. 첫째, 지금의 투쟁들은 단일한 운동으로 어우러져서 벌어지고 있지 않다. 40억 명이 이동통신망을 이용할 수 있게 된 덕분에 각종 투쟁 소식이 지구 반대편까지 빠르게 퍼지지만, 이것이 시위가 확산되는 주된 동력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 투쟁이 일어나는 범위와 투쟁이 요구하는 변화의 폭은 배후에 어떤 공통된 사회적 요인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모든 투쟁이 어떤 패턴에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각 투쟁은 저마다 독특한 구석이 있다. 예컨대 홍콩 항쟁은 영국이 과거 식민 지배자로서 한 구실과 홍콩이 중국으로 다시 통합된 방식을 빼놓고 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번 투쟁의 공통된 특징과 과제를 일반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둘째, 앞서 말한 투쟁 주기들은 결코 모든 곳에서 표현되지 않았다. 더욱이 현 시기를 보면 반란이 벌어지지 않는 나라가 있을 뿐 아니라 반대 경향, 즉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서서 인종차별과 국수주의를 부추겨 지배력을 강화하는 경향이 유력한 나라들도 있다. [강경 우익 정권이 들어선] 인도·필리핀·브라질·미국은 인구로 보나 국제 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나 전혀 사소한 나라들이 아니다. 뒤에서 볼리비아 쿠데타에 관한 대목에서 다루겠지만, 이런 정권들의 등장은 주류 정치의 위기가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저항을 추동하는 힘

2019년 반란에는 세계 노동계급의 성장과 활력이 투영돼 있다. 오늘날 임금노동자는 18억 명에 이르는데, 이는 2000년 이후 6억 명이 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대규모일 뿐 아니라, 크고 작은 도시들에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집중돼 있다. 도시 인구가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의 47퍼센트에서 현재 56퍼센트로 늘었다. 20년 만에 14억 명이 도시로 새로 유입된 것이다. 도시화와 프롤레타리아화의 결합은 이번 투쟁 주기에 포함된 많은 나라들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칠레의 도시 노동인구는 1990년 370만 명에서 2018년 730만 명으로 늘었다. 에콰도르는 2000년 330만 명에서 2018년 510만 명으로 늘었다. 자본주의가 낳은 이 새로운 노동계급 집단과 이들이 일으킨 저항의 특징은 잠시 후에 다루겠다.

그 전에 주목해야 할 것은 노동계급이 이렇게 성장한 시기에 자본주의 생산력은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정체해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경제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연평균 5퍼센트씩 성장했지만, 이 수치는 1970년대 위기를 거치면서 3퍼센트로 떨어졌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 정책으로의 전환은 이런 흐름을 그다지 뒤집지 못했고, 2008년 이후 성장은 더 약해졌다. 중국이 세계 2위 규모의 경제로 부상하며 호황을 구가했는데도 이런 추세가 변하지 않은 것이다.(표1 참고)

이런 조건 하에서는, 도시화가 진척되고 세계적으로 노동인구가 증가해도, 벌이가 좋거나 괜찮은 일자리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일자리가 저질이거나 아예 없는 대규모 노동자 집단이 생겨났다. 이런 특징이 뚜렷한 청년층이 최근 투쟁에서 존재감을 매우 크게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다수는 일정 수준의 교육을 가까스로 받았지만 정작 자신이 배운 일을 하는 일자리가 없다는 현실에 직면한다. 일부 청년들은 간헐적으로만 임금노동을 하며, “비공식” 부문에서 다른 경제활동을 겸하기도 한다.(‘비공식 부문’은 노동법이 적용되는 공식적 일자리가 아닌 모든 것을 뭉뚱그려 가리키는 용어다.) 이런 추세와 함께 슬럼이 성장한다. 2000년 세계에는 슬럼이 20만 개 있었고, 도시 인구의 3분의 1이 슬럼에 살았다. 설령 슬럼에 살지 않더라도 도시 거주민 다수는 도시화가 무계획적이고 주먹구구식인 탓에 열악한 주거, 교통, 날마다 심해지는 환경오염을 피할 수 없다. 그 결과 교통비(대중교통이든 자가용이든)가 최근 투쟁의 뇌관이 됐다.

미미하고 불안한 성장에 따르는 고통은 전혀 공정하지 않게 분배되고 있다. 2015년 옥스팜은 고작 62명이 세계 인구의 절반인 36억 명과 같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반면 인류의 빈곤한 절반이 차지하는 부는 2010년 이후 41퍼센트나 줄었다. 슈퍼 부자들은 체제의 역사적 중심지에 가장 많지만, 몰상식하다 하리만큼 부유한 집단은 오늘날 모든 나라에서 마치 섬처럼 존재한다. 제프리 웨버는 이렇게 주장했다.

칠레 억만장자 10명의 자산은 GDP(국민총생산) 16퍼센트와 맞먹는다. 〈이코노미스트〉의 … ‘벨라’[라틴아메리카를 주제로 하는 연재 사설]의 한 필자가 전하는 시사적인 일화가 있다. “몇 해 전 산티아고에서 필자는 60명쯤 모인 칵테일 파티에 갔다. 한 친구가 귓속말로 말하기를, ‘칠레 GDP의 절반이 여기에 모여 있다’고 했다.” 한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은 빚에 의지해 근근이 산다. 교육·보건·연금·고속도로·수도가 사유화되고, 가난한 사람에게서 은밀하게 징수하는 가혹한 세금과 다름없는 비싼 교통요금 때문에 이들은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레바논의 불평등은 심지어 중동 기준으로 봐도 극단적이다. 인구 상위 0.1퍼센트의 소득이 하위 50퍼센트의 소득과 맞먹고, 상위 1퍼센트가 전체 부의 45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러니 불평등에 대한 항의가 투쟁 물결에서 주요 쟁점이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소수의 부와 특권을 공고히 하는 법과 정치 체제 때문에 더 악화된다. 그 결과 이런 투쟁들은 레바논·이집트·아이티·이라크에서처럼 “부패”에도 항의하거나, 알제리에서처럼 기존 지배층의 권력 연장 시도에 반대한다.

이런 투쟁의 배경에 있는 불만은 [세계 금융 위기가 닥친] 2008~2009년 이후 커져 왔다. 10년 동안 경제 성장은 미미하고 불안정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들은 나중에 “원자재 호황”으로 불리는 현상을 이용해 경제 위기의 찬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중국의 경제 성장, 유전 지대를 둘러싼 지정학적 갈등에 금융 투기가 더해지면서 원료, 광물, 식량의 가격이 올랐다. 이에 대응해 많은 정부들은 더 확실하게 “채굴주의”로 선회해(라틴아메리카에서는 “신新채굴주의”로 종종 불린다) 국가의 주요 수입원으로서 원자재 생산에 더 큰 경제적 중요성이 부여됐다. “핑크 물결” 정부들은 주도면밀하게 “광물 채굴, 석유·가스 추출, 산업적 단일 작물 경작을 강화했다.” 비슷한 패턴이 일부 아프리카 나라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원자재 호황은 2011년에 정점을 찍었고, 중국 경제성장이 둔화하고 투기 거품이 꺼지면서 늦어도 2015년에는 거의 모든 상품의 가격이 급락했다.

신자유주의 공세

이처럼 압력이 커지자 여러 나라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새로 나섰다. 미국의 제재로 더 큰 압력을 받는 이란과, 에콰도르에서는 정부가 유가보조금을 폐지한 것이 시위의 발단이 됐다. 칠레에서는 지하철 요금 인상, 레바논에서는 “왓츠앱 [메신저] 통화세” 징세 계획, 콜롬비아에서는 연금 삭감 계획이 도화선 구실을 했다. 수단에서는 식료품 보조금을 폐지한 것이 첫 시위의 계기였다. 이런 조처의 배경에는 남수단 분리·독립으로 인한 석유 수입 감소가 있다. 일단 투쟁이 시작되면 이전부터 쌓인 더 깊은 분노를 연료로 삼아 투쟁이 더 크게 타올랐다.

이 분노를 보면, 수십 년 동안 쌓인 주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컸는지도 알 수 있다. 크리스 하먼이 썼듯이, 영국의 마거릿 대처,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의 전환에 앞장선 후에는, [선진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개발도상국의 집권 정치세력들도 신자유주의 사상에 물들었다. 자본주의 국제기구들의 압력은 이런 전환을 더 부추겼다. 주류 정치권이 신자유주의로 수렴하자 주류 정치 내 논의는 매우 협소한 틀로 한정됐다. 대중이 갈수록 신자유주의를 거부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칠레에서는 저항의 촉매제가 된 지하철 요금 인상을 언급하는 이런 구호가 나왔다. “30페소가 아니라 30년이 문제다.”

주류 정치와 대중의 괴리가 이처럼 컸던 탓에 (형식상 민주주의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본주의의 지배력은 갈수록 불안정해졌다. 많은 경우 국가는 최근 시위에 폭력적으로 대응했고, 이는 분노를 더 키우고 일반화했다. 칠레에서는 10월 7일 수도 산티아고에서 학생들의 무임승차 운동으로 시위가 시작됐다. 탄압이 거세지자 시위도 거세졌으며, 시위는 가두행진을 하거나 슈퍼마켓, 지하철역, 전력회사 같은 불평등의 상징을 습격하는 형태를 취했다. 대통령 세바스티안 피녜라는 10월 18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인과 시위 진압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를 공격했다. 10월 25일 120만 명(인구의 5분의 1)이 산티아고 거리로 나왔고 총파업이 벌어졌다. 레바논·홍콩·카탈루냐에서도 탄압이 도리어 투쟁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정치인들을 향한 불만 때문에 시위대는 많은 경우 정치체제 전체를 반대한다. 이는 특히 레바논에서 두드러진다. 레바논의 정치체제는 마론파 기독교도, 시아파 무슬림, 수니파 무슬림, 드루즈교도 등 종단·종파에 따라 나뉘어 있다. 그런데 모든 종단·종파의 구성원들이 항의에 나섰다. 이들은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벌이며 이런 구호를 외쳤다. “다 나가라면 다 나가라!” 이 구호에는 썩어빠진 체제를 통째로 바꿔야 한다는 염원이 담겨 있다. 이라크에서도 비슷한 동역학이 작용하고 있다. [시아파 종주국] 이란이 지원하는 종파주의적 이라크 정부를 갈수록 강하게 압박하는 투쟁은 시아파 지역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수니파 시아파를 초월해 단결한 이라크인들 10월 말 바그다드의 타흐리르 광장 시위 ⓒ출처 Xequals(위키미디어)

볼리비아의 교훈

신자유주의가 공세를 퍼붓고 정치와 대중의 괴리가 깊어지는 과정은 대중의 분노가 진보적인 집단행동으로 폭발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만,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볼리비아에서 모랄레스를 끌어내린 쿠데타가 그 사례다.

모랄레스와 그가 이끈 사회주의운동당(MAS)은 물과 가스 사유화에 반대한 1999년·2003년·2005년 대규모 투쟁의 여파로 권좌에 올랐다. 그는 [볼리비아] 현대사의 첫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었다. 볼리비아는 전체 인구의 62퍼센트가 원주민으로 분류되고 인종과 계급이 밀접하게 얽힌 나라다. 모랄레스 집권기 동안 빈민을 위한 상당한 개혁이 이뤄졌다. 공식 빈곤선 이하로 생활하는 인구 비율은 2005년 59.6퍼센트에서 2013년 38.9퍼센트로 떨어졌다. 이런 변화를 배경으로 모랄레스의 득표는 2005년 54퍼센트에서 2009년 64퍼센트로 올랐고 2014년에도 61퍼센트를 유지했다. 그러나 2016년 그는 4선 연임을 위한 개헌 국민투표에서 졌다. 이 일로 모랄레스의 입지는 크게 훼손됐는데, 특히 그가 법적 책략으로 이 국민투표 결과를 우회하면서 더 그랬다. 모랄레스는 2019년 10월 20일에 치른 대선에서 전직 대통령 카를로스 메사를 앞질렀지만 그 격차는 결선 투표를 피할 만큼 크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선거관리위원회 웹사이트가 돌연 개표 중계를 중단했다. 선거가 이처럼 변칙적으로 진행되자 우익은 이를 기회 삼아 모랄레스 퇴진을 요구하는 행동을 선동했다.

파시스트 청년회 출신이 모랄레스 퇴진 운동을 이끌었다 ⓒ출처 카마초 (페이스북)

시위 초기에 거리로 나온 사람 대다수는 사회주의운동당의 통치에 이반감을 느낀 중간계급의 일부였다. 초기 시위는 신자유주의적 중도우파인 카를로스 메사가 이끌었지만 주도권은 금세 더 강경한 우익에게로 넘어갔다. 그중 특히 두각을 보인 인물이 “마초 카마초”라고 불리는 루이스 페르난도 카마초다. 카마초는 [부유층이 몰려 있는] 볼리비아 동부 산타크루스 저지대 출신의 기업인이다. 카마초는 산타크루스에서 원주민 상인을 습격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산타크루스청년회’ 간부였다. 11월 초 경찰이 반란을 일으키자 카마초는 경찰차에 올라서서 수도 라파스의 거리를 누볐다. 같은 날 군 수뇌부는 모랄레스 사임을 요구했고, 곧 모랄레스는 멕시코로 피신했다.

카마초는 대통령궁에 들어서서 바닥에 볼리비아 국기를 포개어 놓고 그 위에 성경을 올려 놓더니 무릎을 꿇고 이렇게 선언했다. “하느님께서 대통령궁으로 복귀하셨다.” 바깥에서는 원주민을 초당적으로 상징하는 위팔라 깃발을 카마초 지지자들이 건물에서 내리고 찢고 불태우며 공산주의를 물리쳤다고 선언했다.

선거에서 고작 4퍼센트밖에 득표하지 못한 정당에 속한 상원의원 지아니네 아녜스는 스스로 임시 대통령으로 선포하고 백인들로만 내각을 구성했다.

지금 볼리비아에서 아녜스와 카마초에 반대해 거리로 나선 시위대를 우리는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쿠데타를 막기 위해 필요한 사회운동의 기반을 그간 모랄레스 정권이 어떻게 약화시켜 왔는지도 이해해야 한다. 볼리비아 사회주의운동당이 추구했던 것은 모랄레스의 부통령 알바로 가르시아 리네라의 표현대로 (사회주의가 아니라) “안데스식 자본주의”였다. 실천에서 이는 제프리 웨버가 “재건된 신자유주의”라고 부른 것을 뜻했다. 신자유주의의 여러 교리, 예컨대 물가인상을 억제하는 중앙은행 독립 같은 것들이 그대로 남았다. 광물·석유·천연가스 등의 채굴에 의존하는 경제 모델은 더 강화됐다. 그 수입의 더 큰 몫을 국가가 차지하고 일부를 빈곤 완화 정책, 특히 빈민 직접 지원 정책으로 재분배하는 개혁이 있기는 했다. 복지 비용이 국내총생산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일정하게 유지됐는데 이는 [경제가 성장하던] 초기에 복지 지출이 실제로 늘어났음을 뜻한다.

리네라의 말처럼 이는 자본주의 국가를 변혁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원자재 호황기 동안에 볼리비아는 자본가 계급에 근본적으로 도전하지 않고도 개혁을 제공할 수 있었다.(물론 이후 사태에서 드러나듯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정치에서 배제됐다고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운동의 일부가 국가기구에 참여했고 정부 통치 기관으로 흡수되기도 했다. 나머지 사회운동 세력, 특히 채굴주의의 장애물로 간주된 저지대 원주민들은 국가와 충돌했다. 1999~2005년의 혁명적 운동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에너지는 불안정한 것으로 드러난 개혁주의 프로젝트로 흡수됐다.

개혁주의와 국가

“핑크 물결”의 교훈은 더 일반화해서 둘째 주기의 투쟁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2011년 무렵에 시작한 이 반란들은 2015년 중엽이 되기 전에 대부분 한계를 맞이했다. 유럽에서 대중 파업을 시작한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 관료 기구의 통제를 벗어나 행동할 수 있는 현장 조합원 운동이 부상하기 전에 파업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거리 운동이 소진하자, 부상하는 좌파적 개혁주의 정치세력이 급진화의 초점이 됐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와 민주사회주의당(DSA), 스페인 포데모스, 영국 노동당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은 제러미 코빈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사회주의 세력들이 부상한 것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높이고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토론을 고무한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현 시기에 그들은 권력에 접근할수록 극단적으로 가혹한 현실의 시험대에 오른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시리자처럼 이를 극명하게 보여 준 사례도 없다. 알렉시스 치프라스의 시리자 정부는 그리스의 긴축 프로그램을 뒤엎겠다고 해서 선출됐지만 결국 자기 손으로 긴축을 집행했다.

좌파적 개혁주의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개혁주의는 모습을 드러냈다. 2011년 이집트 혁명에서 혁명 초기에 주된 정치적 수혜 세력은 무슬림형제단이었다. 그들은 개혁주의 정서의 담지자가 됐지만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고도] 실제 개혁은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덕분에 숨통이 트인 이집트 국가기구가 [군부의] 압둘팟타흐 시시를 중심으로 재결집해 [사실상의 쿠데타로] 자신들의 반혁명적 해법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현재 투쟁들에도 비슷한 위험이 있다. 예컨대 수단 혁명에서 운동 진영의 연합체 ‘자유와 변화를 위한 세력들’(FFC)은 알바시르가 물러난 후에도 권좌를 지킨 군부와 결국 협상에 나섰다. 한 관찰자는 이렇게 전한다. “협상이라는 전략은 전통적으로 제도권 내에서 알바시르 정권에 반대해 온 정당들 때문이라고 일부 설명할 수 있다. 정권과 타협하고 의회에 참여한다는 기존 전략을 따라 그 정당들은 군부와의 타협을 준비했다.” 그러나 혁명 초기에 파업 행동을 조율하고 운동의 요구와 슬로건을 제시한 수단직능인협회(SPA)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협상에서 운동 세력은 군부와 권력을 분점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기존 정권 해체에 한참 못 미치거니와, 혁명적 투쟁 참가자들의 더 폭넓은 염원을 실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합의였다. 그래서 합의가 이뤄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가 다시 시작됐다.

에콰도르에서는 원주민 운동 조직인 에콰도르원주민연합(CONAIE)이 2019년 반란의 핵심 조직이었다. 1980년대 중엽에 결성된 에콰도르원주민연합은 도시민과 노동자 단체들과 연합해 여러 번 투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공식 정치에도 관여해, 진보적 언사를 구사하는 대통령들을 지지했다가 거듭 뒤통수를 맞았다. 2000년대 초에 에콰도르원주민연합은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서 주도적 구실을 한 후, 대선에서 대령 출신의 루시오 구티에레스를 지지했다. 2003년 대통령이 된 구티에레스는 재빨리 운동과 단절했지만 결국 쫓겨났다. 2007년에는 코레아가 다시 한 번 에콰도르원주민연합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코레아는 채굴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강화하고 노동조합과 에콰도르원주민연합 둘 다를 공격해,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과 충돌했다. 코레아는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몇몇 빈곤 완화 대책도 함께 제공했다. 이런 조합의 안정성은 볼리비아에서처럼 원자재 호황에 크게 의존했다.

현직 대통령 레닌 모레노는 코레아의 충실한 후계자로 2017년에 출마했다. 그러나 모레노는 당선 직후 뚜렷하게 우경화했고 미국에 협력하며 IMF와 합의를 맺었다.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부활한 에콰도르원주민연합은 시위 물결을 이끌었다. 원주민 지역에서 도로가 봉쇄되고 운송 부문 파업에 뒤이어 무기한 “전국 파업”이 벌어졌으며, 수도 키토에서는 추정컨대 지난 40년 이래 가장 큰 시위가 벌어졌다. 그 바람에 모레노 정부는 수도에서 도망쳐 나와 서해안 도시 과야킬로 정부 기능을 이전했다. 그러나 모레노 정부가 유가 보조금을 폐지하는 행정명령을 철회하자 파업이 며칠 만에 취소됐고, 원주민과 노동자 단체들은 정부와 새로운 행정명령을 협상하는 데로 빨려 들어갔다. 한 논평가에 따르면, 에콰도르원주민연합은 모레노 퇴진을 요구하길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 과야킬 시장 하이메 네보트가 이끄는 더 강경한 우익 정부가 들어설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말이다.

시위대의 염원을 일관되게 대변할 혁명적 좌파 조직이 중요하다 10월 칠레 산티아고 ⓒ출처 Susana Hidalgo

칠레에서는 좌파 정당들이 투쟁의 향방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주류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사회당 대통령 미셸 바첼레트 집권기를 거치며 불신의 대상이 됐고, 칠레 공산당은 바첼레트가 주도한 누에바마요리아(‘새로운 다수’) 연정에 참여했다. 2006~2011년 학생 운동으로 부상한 새로운 좌파 세력에게 기회일 법한 상황이었다. 포데모스를 일부 본뜬 ‘민주혁명’(Revolución Democrática)과 그들의 선거 연합 ‘광범전선’(Frente Amplio) 같은 단체들에게 말이다. 그러나 한 칠레 활동가는 이렇게 전한다.

[광범전선은 ― 추나라] 시위대에 뚜렷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 그들이 “민중과 함께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 그들은 사실상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다. 반면 공산당은 저소득 지역과 노조에서 참여를 이끌어 낼 아주 강력한 조직들이 있다. … 내 생각에 좌파 전체가 이번 시위를 예상하지 못했다. 어떤 점에서 이번 시위는 좌파가 자신들이 대변하려는 사람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 줬다. … 대규모 시위 이후 카빌도[지역 회의]를 만들고 참가하자는 호소들이 많았다. 카빌도는 아래로부터 사회에 참여하는 기구다. … 이런 호소는 많은 경우 정당과 독립적으로 나오지만, 공산당도 풀뿌리 조직들을 동원해 카빌도 참가를 독려할 거라고 확신한다.

이런 개혁주의 세력들이 운동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도록 방치하는 것이 왜 위험한지는 11월에 드러났다. 강력한 총파업이 전국을 뒤흔드는 동안, ‘민주혁명’ 지도자들과 ‘광범전선’의 지도자들을 포함한 좌파 정당들은 피녜라와 협상을 했다. 그들은 시위를 끝내는 대신, 위로부터 철저하게 통제되는 절차를 거쳐 새 헌법안을 작성할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합의했다. 제헌의회 구성이나 피녜라 퇴진 같은 운동의 요구에는 한참 못 미치는 합의였다. 공산당은 정부에 참여한 과거를 숨기는 데 안달 나 있었기에 이 합의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합의를 환영하고 향후 과정에 동참하기로 했다.

새로운 노동계급 세력

이런 운동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으려면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에 근거한 전략이라는 대안이 필요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적 분업의 구조에 상당한 구조조정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이 억압받고, 노동계급의 전통적 보루들이 약화됐으며, 노동자들의 자체 활동은 기세가 꺾였다. 그러나 이것은 불변하는 상황이 아니다. 계급은 사회를 이루는 집단들에게 특정한 능력과 이해관계를 부여하는 사회적 관계다. 노동자들은 생산에서 차지하는 필수적 구실 덕분에 자본에 맞설 집단적 힘이 있다. 또한 노동자들은 착취당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지배에 맞서 싸울 이해관계가 있다. 이런 사회적 관계는 노동자들을 집단적 투쟁으로 추동하는 경향이 있고, 그런 투쟁으로 부상한 계급 세력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꿀 능력이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최근의 모든 투쟁들에서 노동자들이 그저 거리 시위 참가자가 아니라 집단적 힘을 가진 세력으로서 중심적 구실을 수행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홍콩에서는 활동가들이 민주주의 투쟁과 중국 본토 노동자들의 경제투쟁 물결을 연결할 전략이 없는 채로, 자신을 막아선 강력한 공권력에 대항해 용감무쌍하게 게릴라 시가전을 펴는 경향을 보여 줬다. 더 나쁜 일은, 강력한 공권력에 직면해 운동 내 소수가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고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에 요청한다는 것이다. 활동가들은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도 실제로 그런 행동을 가능케 할 만큼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다. 한 홍콩 활동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들에게 파업하라고 호소하지만 결실이 없었다. 그들은 노동자 [파업]이 마치 즉석 라면 요리인 것처럼 군다. 마치 주문만 하면 종업원이 바로 갖다 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이 실제로 일정한 구실을 하는 곳에서는 그 계급적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많은 지역에서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이 이 세력의 일부였다. 볼리비아 같은 나라에서는 소상인들, 농촌과 강한 유대를 유지한 채 간헐적으로 임금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영세한 제조업체 노동자들의 여러 네트워크가 그런 세력이었다. 노동자들의 이질성이나 일터의 영세함, 불안정한 생활조건 같은 장애물이 집단행동을 지속하기 어렵게 했지만, 그럼에도 이런 네트워크들은 중요한 구실을 해 왔다. 2003년과 2005년 볼리비아 반란의 중심지 엘알토에서는 지역 주민위원회와 이들의 광범한 연합체, 지역 노동자 기구들의 촘촘한 네트워크가 투쟁을 조율했다. 여기에 자신들의 노조로 조직된 공식 부문의 노동자들이 가세했다. 그러면서 공식 부문 노조들은 차별에 맞선 더 광범한 투쟁으로 손을 뻗쳐 지지를 제공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원주민의 후예라는 공통점이 엘알토 노동자들(일부는 혁명적 신디컬리즘과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강한 주석 광산 광원 출신이다)과 근교 농민들을 이어 줬다. 이런 대중운동을 배경으로, 성장하는 혁명적 의식과 모랄레스·사회주의운동당의 더 온건함 사이에서 긴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채굴주의가 강화된 결과 일부 노동자들은 다시 힘이 커졌다. 채굴 산업 노동자는 물론, 채굴 산업과 세계시장을 연결하는 운송 부문 노동자들의 힘도 커졌다. 칠레 항운 노동자들은 피녜라에 맞선 시위에 연대하는 행동에 앞장섰다. 노조 조합원들은 세계 최대 민간 구리 광산인 에스콘디다 광산과 국영 광산 네트워크를 폐쇄하기도 했다. 운수 노조의 파업은 에콰도르 투쟁의 중요한 일부였다.

대체로 보아, 국가가 고용하는 부문의 노동자들도 이들과 함께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전문직으로 취급된 부문이다. 그들은 수가 늘었지만,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 그들이 전문가로서 누리던 특권은 약해졌다. 교원노조는 오늘날 세계 곳곳의 파업에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 베벌리 실버는 2003년에 쓴 연구서에서 “교사들의 쟁의는 역사적으로 직물공이나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이 벌인 쟁의보다 지리적 분포가 훨씬 넓다”고 지적한다. 이 노동자들이 자본을 직접 타격하는 힘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들은 투쟁을 지속시키고 조직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세력이 될 수 있다. 칠레에서 교사와 보건 노동자들은 파업에 나섰다. 레바논에서는 공무원 노동자들이 파업에 앞장섰고 몇 주 후 보건 노동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알제리에서도 교육과 보건 노동자들이 최근 몇 년 동안 전투성을 회복했다. 수단에서 [수련의 등이 핵심적 구실을 한] 수단직능인협회가 한 구실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볼리비아에서는 2003년과 2005년에 도시와 농촌에서 교사들의 파업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이런 노동자들이 두각을 보인다고 해서 제조업 노동자들을 없는 셈 치면 안 된다. 개발도상국의 몇몇 지역에서 산업이 쇠퇴하기는 했지만 더 큰 흐름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저개발 지역”에 집중된 세계 제조업 노동력 비율은 1950년 34퍼센트에서 2010년 79퍼센트로 늘었다. 이집트에는 나세르 시대에 생긴 대공장 단지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자동차 조립, 제철 부문 같은 부문의 대공장 단지가 새로 들어섰고, 그보다 규모는 작지만 제약업과 기계공업 단지도 들어섰다. 이런 공단 주변에는 대체로 10명 이하를 고용하는 작은 제조업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알제리의 조건도 비슷하다. 알제리에는 쇠락하는 제조업 단지의 노동자들과, 규모는 작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석유·천연가스 부문의 노동자들, 저급 일자리나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공존한다.

사회 혁명을 위한 전략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강력한 세력임을 입증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투쟁은 사회혁명이 아니라 정치혁명을 추구했다. 정치혁명이 혁명적 투쟁으로써 한 통치 집단을 다른 집단으로 교체하는 것이라면, 사회혁명은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노동자 특유의 자주적 통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정치혁명은 “사회혁명의 요소들을 일깨우는 경향”이 있다고 미국 마르크스주의자 핼 드레이퍼는 주장했다. 20세기에 일어난 투쟁 물결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에 맞서 체계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맹아적인 자주적 통치 기구가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21세기에 일어난 투쟁 물결에서는 이런 대안적 통치 기구가 등장하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 반란이 자발적인 상태에서 사회혁명을 향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듯하다. 이는 아세프 바얏이 1979년 이란 혁명과 2011년 아랍의 봄을 대조하는 흥미로운 글에서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참가자들은 집회 전술에는 해박했지만 사회 변혁의 전망과 전략에는 무지했다. … [그들은] 자신들이 맞서 싸우는 정부 외에는 다른 형태의 조직과 통치 기구를 상상하지 못했다. … 그들은 경제를, 자신들이 타도하려 하는 정치 질서와 개념적으로 분리해서 사고한다. 그들은 국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며 국가 권력을 어떻게 바꿀지 탐구해서 제시한 바가 거의 없다.

사실 이집트 같은 나라들에는 규모가 작긴 하지만 더 심층적인 사회 변화를 제시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들이 존재한다. 더욱이 이집트와 그 인근 지역 나라들에서는 최근의 투쟁들이 일어나기 전에 노동자 투쟁의 물결이 일어나 중요한 현장조합원 네트워크나, 국가에서 독립적인 노조를 남겼다. 그럼에도 중동의 주요 야당 세력들(이슬람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 모두)이 계급 정치를 지향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물들어 있다는 바얏의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투쟁에 나선 사람들은 종종 정치를 일절 거부하면서 기존 정치결사체들이 내세운 대단치 않은 사회 변화 지향마저도 함께 거부한다. 스탈린주의의 오점과 기나긴 배신의 역사에서 생겨난 공산당 세력에 대한 불신이 이런 경향을 악화시킨다. 오히려 “파편적인 프로젝트”와 “임기응변”이 “거대한 전망과 해방된 유토피아”를 대신하고 있는 오늘날 운동의 변혁적 잠재력과 창조력에 대한 예찬이 많다. 이런 ‘자발성 예찬론’은 철저한 혁명적 변화가 아닌 개혁을 지향하는 흐름을 운동 내에서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운동이 자발성 예찬에만 머물면 투쟁이 난관에 놓이거나 기력이 소진될 때 온갖 개혁주의 정치가 정치 지형을 독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런 분석은 정치 세력 분포가 상이할 수 있음을 감안한다면 아랍 세계 너머로도 일반화할 수 있다.

이런 분석이 옳다면, 노동계급에 실질적 기반을 갖고 노동자 투쟁의 힘을 자본주의 국가와 대결하는 데에 집중시킬 능력이 있는 대중적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은 단지 사회혁명 승리의 전제조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를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은 잠재적인 노동자 권력 기구의 형성을 고무하는 데에서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심원한 사회 변화를 위한 투쟁, 즉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벌이는 세력이나 지지받지 못하는 통치자를 타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도전하는 투쟁을 촉진하는 데서도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를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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