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동운동 내에서 ‘사회연대전략’을 둘러싸고 논의가 활발하다.

사용자들과 정부는 민주노총을 “귀족노조, 집단이기주의” 등으로 비난해 왔다. 이에 대응해 노동조합 고위 상근간부들은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을 넘어 비정규·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불평등 격차 해소 등에 나서는 방안으로 사회연대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어 노동계급 공통의 이해관계를 앞세우고 계급적 단결을 추구하자는 것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생각이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온건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온건 진보(이하 개혁주의) 정치인들이 꾸준히 제기해 온 사회연대전략은 이런 옳은 취지를 잘못 구체화하고 있다.

그 ‘전략’은 노동조합이 미조직 노동자들과 연대 투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소득·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 양보나 세금, 복지 비용 부담을 늘리자는 것이 전제돼 있다. 이러한 양보를 통해 일자리 늘리기, 비정규직 처우 개선, 복지 확대 등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가 먼저 양보하면, 자본을 압박하는 사회적 여론이 생겨, 노동운동에 유리하다고 한다. 과연 이런 정치적 메커니즘이 현실적일까?

SK이노베이션은 최근 몇 년 동안 수조 원의 이익을 챙겼지만, 그중 0.1퍼센트만 행복나눔기금에 투입하고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폼을 잡고 있다 ⓒ출처 SK이노베이션

최근에는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에 활용하자는 제안이 활발하게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은 2020년 임금인상 요구안을 논의 중이다. 그런데 제안들 가운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을 정액 인상하자는 기존의 요구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연대임금’ 명목으로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분의 일부를 기금으로 내면 사용자 측도 출연해 근로복지기금이나 재단 등(이하 사회연대기금)을 만드는 안들도 있다고 한다.

한국노총도 최근 2020년 임금인상 요구안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 월 정액 29만 4417원 인상에 더해 ‘원·하청 공동근로복지기금 설치’도 포함돼 있다. 공동근로복지기금은 노사가 임금인상분 내에서 일정 비율을 공동 출연해, 하청 노동자에게도 복지 혜택을 주자는 것이다.

사회연대기금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이미 민주노총과 산하 노조들을 비롯한 여러 노조들이 제안해 실행한 바 있다.

최근에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사례는 2018년부터 시행된 SK이노베이션의 ‘1퍼센트행복나눔기금’과 2019년에 출범한 사무금융노조의 ‘우분투재단’이다. SK이노베이션은 노동자들이 기본급의 1퍼센트를 출연하면 사용자 측도 그에 상응해 출연해 기금을 조성했다. 사무금융노조도 사용자 측과 협상해 사용자 측의 출연으로 ‘우분투재단’을 조성했다. 이 기금의 일부는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 개선에 쓰이고, 다른 일부는 지역사회 지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대기업·공공기관 정규직 노동자들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다. 일부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사회연대기금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턱없이 모자란

그러나 정규직이 임금을 양보해 사회연대기금을 만들자는 제안이 과연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낼지는 따져 봐야 한다.

우선, 사회연대기금은 비정규직 정규직화나 차별 해소를 위한 재원으로 턱없이 모자란다. 오히려 사회연대기금은 비정규직에게는 실질적 도움이 못 되면서, 사용자 측의 책임은 덜어 주는 효과를 낸다.

예를 들어, 2018년부터 시행 중인 SK이노베이션의 원·하청 상생기금은 올해까지 3년간 74억 7000만 원이 기금으로 조성됐다. 2019년 1월에는 이 중 23억 6000만 원을 하청 노동자 4421명에게 전달했다. SK이노베이션의 하청 노동자 전체에게 혜택이 돌아간 것도 아닌 데다 1인당 고작 50만 원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SK이노베이션은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2016년과 2017년에는 3조 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기록했고, 석유화학산업이 침체했다는 지난해에도 영업이익은 1조 2693억 원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분투재단도 금융회사 9곳이 출연 약정을 해, 지난해까지 30억 원가량의 자금을 기금으로 조성했다. 사무금융노조가 조직하는 제2금융권 회사 전체가 참여한 것도 아닌 데다, 기금을 출연한 기업들도 고작 3억 원 정도를 낸 것이다. 우분투재단은 이 중 1억 5000만 원을 지난해 6월 사무금융 분야 비정규직 노동자 고작 100명에게 전달했다. 1인당 고작 150만 원을 지원한 것이다.

우분투재단 자신이 조사한 바를 봐도, 제2금융권 노동자 중 정규직은 고작 37.49퍼센트밖에 안 될 정도로 비정규직 비중이 높다. 이처럼, 제2금융권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쥐어짜 지난해에도 수조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극히 일부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 당장 정규직 전환이나 처우 개선이 시급한 것이다.

이처럼 사회연대기금은 진정한 차별 해소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사용자들이 비정규직을 고용하고 하청 노동자들을 쥐어짜 막대한 이익을 거두면서도, 푼돈 수준의 재원을 지원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는 생색을 내기에 유용한 수단이 되곤 한다.

정규직 책임론 강화

사회연대기금의 주창자들도 기금만으로는 하청·비정규직 처우 개선 효과가 미미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원청 정규직 노동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 나서야 한다며 자신들의 제안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사회연대기금은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정규직 책임론을 강화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 투쟁에 오히려 해로운 효과를 낼 수 있다. 당장에 사회연대기금 조성 요구는 민주노총 등이 주장하는 정규직·비정규직 정액 임금 인상 투쟁과 충돌할 수 있다.

정규직·비정규직 정액 임금 인상 요구는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결해 충분히 임금을 인상함으로써 노동자 몫을 늘리고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도 좁히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는 정규직의 고임금 탓이 아니라 사용자들 탓이라는 점이 전제된다. 정규직·비정규직의 월 임금을 정액으로 20만~30만 원씩 제대로 올리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단결해 만만찮게 투쟁해야 한다.

반면 사회연대기금 제안에는 정규직 책임론이 함축돼 있다. 특히, 사회연대기금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면 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많이 양보해 기금을 확충해야 한다는 논리가 발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회연대기금 제안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하청·비정규직 문제에 책임이 있다는 정부와 사용자들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해 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 자신감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낸다.

실제로 사회연대기금 제안자들은 정규직 책임론을 받아들이고 정규직 양보를 실행했다. SK이노베이션 노사는 사회연대기금을 논의하기 시작한 2017년부터 임금인상률을 전년도 소비자물가상승률에 연동시키기로 합의한다. 그래서 임금이 2017년 1퍼센트, 2018년 1.9퍼센트, 2019년 1.5퍼센트 인상되는 데 그쳤다. 보통, 물가상승률과 경제성장률을 합친 수준이 최소한의 임금 인상 요구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사실상 실질임금 삭감일 수 있다.

사무금융노조 집행부도 2019년 산하 사업장이 직접고용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거나, 파견·도급 노동자를 직접고용하면 “물가상승률을 제외한 임금을 동결하자”고 제안했다.

임금 억제

이처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사회연대기금을 주장하며 정규직 책임론을 일부 수용하는 것은 투쟁을 회피하는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게다가 정규직 책임론은 결국 줄어든 몫을 두고 노동자들끼리 다투게 만든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갈등과 반목만 낳을 공산이 크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뿐 아니라 기성 언론들이 이런 연대기금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한 양보 압박의 일환이다.

문재인은 2017년 금속노조 지도부의 ‘일자리연대기금’ 제안을 반기며 “사회적 대타협”을 강조했다. 2019년 우분투재단이 출범했을 때는 민주당 대표 이해찬과 원내대표 이인영, 경사노위 위원장 문성현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우분투재단을 적극 추진한 김현정 전 사무금융노조 위원장은 4·15 총선을 앞두고 얼마 전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2017년 공공운수노조 집행부를 비롯한 공공부문 노조 지도부들이 성과연봉제 도입 때 받은 인센티브를 반납할 테니 정부도 돈을 내어 ‘공공상생연대기금’을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에 문재인 정부는 기금 구성에 전혀 돈을 내지 않았다. 말로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한 “사회적 타협”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정규직의 양보를 압박할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앞서 봤듯이, 이런 식의 노사정 타협으로는 비정규직의 처우도 제대로 개선하지 못한다.

경기 불황 속에서 기업 지원에 매달리고 있는 문재인 정부는 시간이 갈수록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양보와 희생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이윤 회복에 목매는 사용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연대기금 제안은 정부와 사용자들의 양보를 이끌어 내기보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희생을 압박하는 그들의 공세에 길을 열어 줄 공산이 크다.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회연대기금이 아니라 정규직·비정규직 모두의 임금을 올리기 위해 노동자 투쟁에 앞장서는 것이다. 특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사용자 측을 압박해 정규직 노동자들의 조건을 지키면서도,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한 사용자의 양보를 이끌어 낼 잠재력이 충분히 있다. 문제는 그 잠재력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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