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5월 21일 알렉스 캘리니코스 중앙대학교 사회학과와 총학생회 초청 강연이다. 캘리니코스는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단체 SWP(사회주의노동자당)의 중앙위원이자 영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단체 ‘저항을 세계화하라’ 소속 활동가이기도 하다. 이 강연에 앞서 울산건설플랜트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 삼성에 항의한 고려대학교 학생들 등등의 투쟁 사례 발표가 있었다.

오늘 이 토론회를 마련해준 중앙대학교 사회학과와 총학생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대학교 학생들에게 먼저 연대를 표명하고 싶군요. 왜냐하면 삼성과 같은 거대 기업들이 전 세계를 집어삼키려 드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것에 반대해 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투쟁과 오늘 제가 이야기하려는 주제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계화’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기후처럼 인간과는 관계 없는 자연 현상인 양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기후는 더는 인간의 행위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특히 이산화탄소 배출을 통해 기후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화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닙니다.

세계화는 경제적으로 득세하는 세력들이 그로부터 득을 보기 위해, 특히 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해 추진하는 정치적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다국적기업들에 최대한 많은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전 세계 국가에 현존하는 장벽을 모두 철폐하려 합니다.

다국적기업들은 이윤 창출을 위해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과 과학발명까지도 착취하려 듭니다. 우리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것, 예컨대 물을 들 수 있겠죠. 우린 물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기업들은 세계에서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최빈국들이 물을 사유화하도록 강제해 그로부터 이윤을 얻습니다.

이것이 세계화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결코 자비로운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든 순응해야 할 불가항력도 아닙니다.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착취를 증대시키기 위해 경계를 허무는 매우 특정한 경제적·정치적 프로젝트입니다.

한국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이제껏 제가 말한 것들에 동의할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난 수년간 우리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운동이 세계적으로 고양되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 운동은 1999년 시애틀 시위에서 시작해 단 몇 년 만에 세계의 다른 여러 지역으로 확산됐죠.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화를 단지 공공연히 비난하는 데서 더 나아가 매우 엄밀하고 신중하게 그것을 분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컨대, 통념에 따르면, 금융이 지배하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경제 생활을 좌우하는 국제 시장을 금융 위주로 바라본 것입니다.

특히, 1997∼98년 외환 위기를 경험한 한국인들이 이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로 이해할 만한 것입니다. 외국 자본이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그런 파괴적인 결과가 빚어졌죠.

지난 20∼30년 동안 금융시장이 점점 더 강력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날마다 세계 금융시장에서는 엄청난 양의 돈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정부·기업·개인은 모두 금융시장의 움직임에 적응하려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윤은 금융시장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윤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죠. 근본적으로, 금융시장 이윤의 원천은 공장과 사무실, 콜센터, 병원, 그 밖의 모든 부문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들이 창출해 내는 이윤에 있습니다.
흔히들, 철과 같은 것들을 생산하는 산업체들이 갈수록 약해지는 반면 금융은 갈수록 강력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은 소매기업인 월마트를 소유한 가문입니다. 월마트는 국제적으로 엄청난 경제력을 자랑합니다. 저는 월마트가 이미 한국에도 상륙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럽에서는 빠른 속도로 소매 시장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중국에서 미국으로 수입되는 제품 전체의 가치에서 10분의 1을 월마트가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여러분은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값싼 상품들을 이 거대 유통기업의 점포들이 판매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금융시장·금융제도보다는 진정한 경제력과 오히려 더 관계 있는 문제입니다. 사실, 상업이 금융보다 더 영향력이 있습니다.

흔히들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국가로부터 달아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좌파 가운데 가장 저명한 인물은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유명한 책인 《제국》의 공저자 안토니오 네그리일 것입니다.

네그리는 우리가 ‘제국’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제국’이란 자본주의 권력의 새로운 초국가적 형태를 뜻합니다. 그는 국가 간 차이와 적대, 국가 권력 모두가 이 초국가적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용해됐다고 말합니다.

이 이론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의 이름은 조지 W 부시입니다. 왜냐하면 부시는 지금껏 자신과 각료들의 이익을 야만적이고 무자비하고 오만하게 실현해 왔고, 무장한 군인들과 무기 그리고 세계 ‘제국’의 ‘신하’들이 미국 권력의 국제적 이익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9·11 이후 일어난 일들, 곧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세계화를 이해하려면 제국주의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아주 분명히 보여 줍니다.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인들에게 총을 난사하고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볼 때, 아부 그라이브 감옥 같은 곳에서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인들을 고문하고 욕보이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본질적인 것, 즉 중동에서 드러나는 미국의 제국주의 권력 이면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 관점은, 레닌과 부하린 같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특정 발전단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뚜렷이 구분됐던 경쟁의 경향들, 즉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이 융합돼 나타나는 것이 제국주의입니다.

경제적 경쟁이란 앞서 제가 말한 바, 곧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시장을 둘러싸고 서로 싸우는 것이고, 지정학적 경쟁이란 경쟁 국가들이 영향력과 주도권을 둘러싸고 서로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경쟁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중첩되고 개입하면서 오늘날의 세계를 형성하고 지배합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거대 기업들은 효과적인 경쟁을 위해 국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연합은 항공기 생산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항공회사 보잉이, 유럽연합에는 에어버스가 있습니다. 이 정치적 실체들, 즉 미국과 유럽연합은 자국의 항공회사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벌입니다.

한편, 국제 무대에서 다른 나라에 대항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의 패권은 결정적으로 그들의 경제적 토대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 이것의 가장 적절한 사례는 중국입니다.

미국의 지배자들은 중국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중국 투자로 얻는 막대한 이윤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중국 경제의 확장이 가져올 중국의 강력한 정치·경제 권력을 두려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미국과 유럽연합 사이에서 첨예한 논쟁이 불거졌습니다.

유럽연합은 1989년 6월 톈안먼 광장 학살 이후 시행된 대(對)중국 무기수출 금지조치를 풀고 싶어합니다. 현재 미국 정부와 정치인들은 유럽연합이 대중국 무기수출 금지를 해제하려는 데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와 정치인들이 이것을 반대하는 이유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10년 내에 중국과 전쟁을 벌일지 모르기 때문에 유럽연합의 대중국 무기 수출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중국인들은 여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중동에 있는 나라를 막 침략한 세계 최강대국이 ‘우리는 아마 몇 년 안에 당신들과 전쟁을 벌여야 할지 모른다’ 하고 말했을 때 말이죠.

제가 생각하기에, 최근 아시아태평양지역은 엄청나게 모순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중국의 급성장은 다국적기업들과 중국 정부 간 동맹의 결과입니다. 그 결과 매우 복잡한 경제적 연계망이 발전했습니다. 제가 어제 참석한 학술회의에서는 이 점을 매우 잘 보여 주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중국은 엄청나게 많은 저가(低價) 상품들을 미국과 유럽연합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제가 언급했던 월마트가 대표 사례일 겁니다. 일본과 한국 같은 나라들은 핵심 부품과 기술의 공급을 늘리는 방향으로 산업을 재편하고 있고, 중국은 그러한 수출들이 늘기를 원합니다. 또,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갈수록 많은 나라들이 중국에 원자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 미국에 상품을 수출해서 돈을 벌어들이고, 다시 그 돈을 미국에 빌려줘, 미국이 중국 상품을 계속 구매할 수 있도록 한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은 자국 경제의 6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경상수지 적자를 안고 있습니다. 미국의 부채는 일본·중국·한국, 그 밖의 동아시아 나라들의 중앙은행에서 빌린 것이죠. 따라서 세계경제에서 중국이 하는 구실, 더 광범하게 동아시아가 하는 구실은 세계경제의 부양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만일 중국의 경제 호황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심각한 경기후퇴를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또한 지정학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입니다. 심지어 중동보다 더 위험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한편으로 중국이,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 일본이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적대가 단지 일본 정부가 과거에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저지른 악행에 개의치 않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적대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국 지배에 대한 중국의 도전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이 중국을 고립시키고 견제할 목적으로 맺고 있는 동맹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 긴장의 결과는 매우 위험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대만에서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봅니다. 만일 이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현재 이라크에서 진행 중인 끔찍한 전쟁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과거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핵무기 보유국들 사이에 벌어지는 최초의 전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전쟁 반대 행동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핵심적 이유입니다.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전쟁 위기 일체에 반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만일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진정 북한 정권의 정책이라면, 저는 그 정책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바그다드가 함락된 이후, 세계 도처의 많은 정권들은 사담 후세인이 바보였고, 그는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으며, 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고 믿게 됐죠.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지속적으로 반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과 영국처럼 미국의 점령에 동참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점령 반대 행동이 특별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라크의 사례는 단지 이라크인들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것만을 뜻하진 않기 때문이죠. 그것은 분명 중동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했을 때, 그들은 중국에, 그리고 전 세계 모든 국가에 “미국의 지배에 도전하려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입니다.

특정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나 부시 정부의 전쟁몰이에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예로 들어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체제로서 제국주의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는 경제적 경쟁의 논리와 지정학적 경쟁의 논리를 연결시켜 추진되는 체제이고, 전 세계가 인류 파멸의 끔찍한 전쟁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위협하는 논리입니다.

이라크는 세계화 시대에 자본주의의 현실이 제국주의를 낳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라면, 그 체제 자체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저와 ‘다함께’가 지지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는, 자본주의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이 노동계급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심지어 좌파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조차 오늘날 노동계급은 사회세력으로서 그 수명을 다했다고 말합니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다중’이 자본에 도전하는 새로운 혁명 주체라고 말합니다. ‘다중’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받는 사람 모두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는 전통적 형태의 노동이 계속 사라지고 있으며 노동은 갈수록 비물질화하고 있다는 매우 모호한 일련의 주장들을 쏟아냅니다.

제가 보기에는, 온갖 혼란이 이 주장과 연관돼 있습니다. 그 혼란 가운데 일부는 사람들이 노동계급을 말할 때 흔히, 순전히 공장에서 일하며 물질적 제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만을 떠올리는 데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을 이해했던 방식이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재산이 적어서 겪는 가난 때문에 착취받는 조건으로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착취는 물질적 제품을 생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착취는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노동자들은 제철소와 광산에서만이 아니라 콜센터·수퍼마켓·사무실에서도 착취받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영국, 미국에서 공장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것이 더는 아무도 물질적 제품을 생산하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비물질적이고 불확실한 세계, 파편화 등등을 말할 때, 때때로 그들은 사람들이 먹고 입는 것을 그만둔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세계의 어떤 지역에서 공장이 사라지거나 감소할 때, 중국의 주강(江) 삼각주 같은 곳에서는 공장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때때로, 전통적 임금노동을 다양한 비정규 노동이 대체하고 있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한 정규직 노동자들이 특권적 소수[“귀족”]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전 세계적으로 노동을 변화시키는 자본주의 구조조정의 시기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구조조정을 노동계급이 물리치지 못하고, 이 때문에 잘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도 해체되곤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광부들이나 한국의 삼성 노동자들처럼 말이죠.

그리고 종종 사용자들이 공장에서 노동조합에 가입된 정규직 노동자들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임시·비정규직에 더욱 많이 의존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도 비율에 맞게 유지된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한 세대 전과 비교했을 때 세계적 차원에서나 개별 사회 차원에서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임금노동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강력한 여성운동은 노동시장에 커다란 사회·경제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이것은 임금노동이 사람들의 삶에서 전보다 더 결정적 요인이 됐음을 뜻합니다.

조금 전에 한 이주 노동자 대표가 우리에게 말한 것처럼, 이주 노동자들과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이 현재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투쟁이 더 효과적이려면, 잘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그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일종의 ‘귀족’, 즉 특권층이라며 비난한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재미난 것인데, 왜냐하면 저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패배해서 일자리를 잃었을 때, 그 패배에서 생겨난 돈이 비정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에 사용되는 사례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삼성 재벌들이 노동조합을 공격할 때, 또는 영국에서 사장들이 광부들을 공격할 때 누가 그로부터 득을 보겠습니까? 당연히 사용자들입니다. 우리는 노동자들을 분열·지배하려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 이데올로기는 착취자들에 대항한 모든 노동자들의 단결을 약화시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는 거대하게 확대되고 변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자비하고 파괴적인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약점을 갖고 있는 체제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이윤을 임금노동자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이 노동자들은 세계를 변혁할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한국의 노동자들과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하나의 계급, 국제적 노동계급의 일부로 인식하게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단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분리만이 아니라 인종·종교·국적의 분리를 뛰어넘어서 말이죠.

저는 우리가 여전히 새로운 종류의 노동계급 운동을 창출하는 초기 국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운동은 최근 야만적인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에 도전하기 위해 단지 개개 나라 안에서가 아니라 국제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운동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치가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정치 운동이 있었던 지난 몇 년 동안 2003년 초 몇 달 동안 3천5백만 명 이상을 거리로 불러모은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과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구호로 알려진 저항을 조직하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을 한데 모은 자본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은 사람들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도록 고무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직면한 위험들, 즉 파괴적인 전쟁과 증대된 자본주의 착취의 결과로 맞게 될 기후 변화는 우리가 자본주의 하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사회 정의에 기초한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 모인 분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늘 오후 우리는 한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투쟁들을 경청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전쟁과 자본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위대한 운동의 일부가 되십시오.

토론 정리 발언

토론 과정에서 제기된 몇 가지 질문에 답하면서 오늘의 토론을 정리해야 할 것 같군요.

최근 안토니오 네그리가 유럽연합 헌법을 지지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새로 제안된 유럽연합 헌법을 두고 유럽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죠. 유럽 좌파는 일반으로 유럽연합 헌법에 반대합니다. 부분적으로, 그것이 유럽연합의 군사력 증강을 촉진하고, 유럽연합의 정치·경제 구조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영속적으로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 프랑스에서는 유럽연합 헌법한 국민투표가 있습니다. 프랑스 국민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를 보면, 좌파가 주도하고 있는 유럽연합 헌법 반대 운동이 승리할 것 듯합니다.

그런데 네그리는 그 운동에 개입해 유럽연합 헌법을 지지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네그리의 입장은 완전한 잘못인데, 그가 내세운 근거들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네그리는 유럽연합이 국가 간 경계를 넘어 조직된 것이기 때문에 미국보다 훨씬 진보적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유럽연합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미국 지배계급의 중요한 일부는 세계를 단속하기 위해, 더욱 강력해진 유럽연합을 자신들의 하위 파트너로 삼고 싶어합니다.

두 번째로, 이것이 훨씬 중요한 문제인데, 제가 보기에 이 주장은 자본의 일부가 다른 자본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어떤 착취자가 다른 착취자에 비해 더 낫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것은 한국 경제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외국계 투기자본에 관한 질문에도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최근 이 문제가 한국의 중요한 정치적 이슈가 된 것을 십분 이해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자신들의 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해 회사를 문닫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금융투기꾼들에 반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국의 반자본주의 운동이 한국의 금융 투기에는 반대하지 않고 영국의 금융 투기에만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입증하는 전형적인 예는 금융 투기 반대 운동이 토빈세를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토빈세가 시행되면 세계 도처의 금융 투기에 세금이 부과될 것이고, 이를 통해 조성된 기금은 남반구[제3세계 ― 옮긴이]의 빈곤을 줄이거나 완화하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입니다.

또한 투기에 반대하는 주장은 때때로 외국 자본가들은 나쁘고 민족 자본가들은 괜찮다는 식의 주장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저는 영국이나 미국의 다국적기업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한 한국 노동자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나 삼성 같은 한국 기업이 예컨대 네덜란드에서 매우 훌륭한 기업이 될 것이고, 그 곳의 노동자들을 굉장히 잘 배려해줄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자본가들의 문제는 그들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여권이 아니라 그들이 몸담고 있는 체제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남반구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으로 옮겨가 봅시다. 저는 다국적기업들이 주로 미국과 서유럽에 수출할 상품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중국을 묘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평범한 사람들은 가난과 고통, 착취에 시달려야 했고, 중국의 경제 호황은 바로 이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사례를 보며 드는 생각은 오늘날의 세계화가 고통의 세계화라는 것입니다.

작년에 영국 북부 지역에서는 중국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해안을 따라 조개 줍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불법적이고 부패한 사용자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었지요. 어느 날 예상치 못한 밀물 때문에 그 노동자들 가운데 23명이 익사했습니다. 그 23명 가운데 한 명은 익사하기 전에 아내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나는 이제 세상을 뜨오. 잘 사시오.” 하고 말했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세계화가 의미하는 것은 지구의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으로 밀려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가장 끔직하게 고통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죽기 직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삼성이나 노키아로부터 핸드폰을 공급받은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겠지요.

저는 이것이 지역화에 대한 질문의 답변일 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를 갈갈이 찢어놓는 세계경제의 관계들로부터 과거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국제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후 변화는 이것을 가장 분명히 보여 줍니다.

기후 변화에 대한 지역적 해결책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역을 중세로 되돌린다 할지라도 다른 지역에서 유해물질을 계속 대기로 쏟아낸다면 기후 변화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사회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사회주의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우리에게는 세계적 규모로 계획되는 경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기존 권력구조에 맞선 혁명이 필요합니다. 혁명은 총칼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혁명은 기존에 세계를 통제하던 국제 기업과 정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올 태세가 돼 있고, 민주적으로 조직된 국제적 운동을 뜻합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운동의 일부가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단지 그런 상태를 사실상 용인하거나 그 문제의 일부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재 성장하고 있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운동 속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그 해답의 일부가 되시겠습니까?